솜처럼 부드럽지만 강철같은 기운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백성들의 마음이 내 마음/진보반란추 進步搬攔捶  

 

진보반란추進步搬攔捶는 무위태극선108식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식이다. 진보반란추, 전신반란추, 혹은 번신반란추 등이 그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허리를 뒤집어 돌아나오며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손은 허리가 다시 좌회전함에 따라 오른쪽 옆구리에서 권으로 바뀌어 나가는데, 왼쪽에서 들어오는 왼손과 오른손의 질러 나아가는 권이 만나는 지점이 하단전 바로 앞이 된다. 계속해서 오른손의 권이 왼손과 십자 모양으로 가슴 정면에서 앞을 향해 똑바로 서는 식이 진보반란추이다.

완성된 세는 왼발이 실하고 오른발이 허하며 궁보다. 앞으로 무게중심이 전진 배치되어 있는 형국이다. 본 초식은 부드러움을 체로 하고 강함을 용으로 쓴다. 의식은 지극히 부드러운데 외형은 강한 권의 나아감이 세를 이룬다. 뜻을 부드럽게 두고, 밖에 드러나는 형세를 강하지 않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초심자들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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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은 그 기세가 밖에 드러날 때는 지극히 부드러워서 마치 목화솜처럼 느껴지도록 해야 하고, 그 기운이 안에서 형성되고 운행될 때는 마치 용광로 안에서 강철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다 뜻에 있을 뿐이지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반란추는 앞으로 나아가니 진보요, 다가오는 외물에 정면으로 응접하니 반란추이다. 나의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다가오는 손님의 뜻과 기운에 따라 나의 견해를 버리고 상대의 뜻과 기운에 부합하는 뜻을 갖는다. 진보반란추를 행하는 수련자는 이처럼 ’, ‘나의 것’, ‘나의 관점을 앞세우지 않는다.

나의 고정된 생각을 앞세우게 되면 하늘땅의 기운에 나를 조정할 수 없다. 나의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관철하려 하면 내가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과 통할 수가 없다. 내가 무심하게 나의 고정된 상을 버리고 나서야, 사물과 사람들이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된다. 본래 마음의 근본 성품으로 되돌아간다. 마음의 본성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밖은 흡사 목화송이 같이 부드럽네.”

안은 마치 강철 같구나.”

 

外似棉花 외사면화

內如鋼條 내여강조 (태극구결)

 

배우는 이들은 무릇 이 요결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깊이 숙달해야 한다. 태극선은 나를 깨우치는 공부이며, 나를 단련시키는 공부이다. 누군가를 경쟁의 상대로 두고 그와 싸워서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그런 것은 동물들이나 하는 일이다. 아니 동물들도 쓸데없이 싸우지 않는다. 고대의 논리로 자꾸 오늘날의 태극선을 이해하고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시대는 뺨 한 대만 잘못 때려도 철창신세를 진다. 수승한 법을 저급한 목적에 적용하려고 하니 몸 안에 힘만 잔뜩 들어가게 된다. 몸에 힘이 들어간다는 것은 의식이 강퍅해져 있다는 말이다.

 

내가 부드럽고 내가 비어 있어야 손님이 온다. 손님이 오면 따뜻한 품으로 맞으면 된다. 내 안이 강하다는 말은 나의 몸과 마음이 강한 에너지, 따뜻한 기운,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밖은 목화송이처럼 부드러워서 누구라도 문을 열고 들어오고 싶게 되고, 안은 강한 기운으로 가득 차있으니, 따뜻한 품으로 그들을 반겨 맞을 수 있게 된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의 상이 없다.

오로지 백 가지 성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준다.

그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인은 세상에 임할 때에는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이고

세상을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연하게 한다.

백 가지 성의 사람들이 모두 귀와 눈을 곤두세울 때,

성인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聖人無常心, 성인무상심

以百姓心爲心, 이백성심위심

善者吾善之, 선자오선지

不善者吾亦善之, 불선자오역선지

德善. 덕선

信者吾信之, 신자오신지

不信者吾亦信之, 불신자오역신지

德信. 덕신

聖人在天下, 성인재천하

歙歙焉 흡흡언

爲天下渾其心, 위천하훈기심

百姓皆注其耳目, 백성개주기이목

聖人皆孩之 성인개해지(49)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자연의 도를 담지한 사람이다. 자연은 본래 어떤 의도를 갖고 만물을 이끌어가거나 만물의 마음을 한 방향으로 결집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이 무상심無常心이라는 말은 성인의 마음도 자연의 도를 닮아서 자기 자신의 고정된 생각을 갖고 일과 사람들에 응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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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상은 노자의 언어의 세계에서 매우 각별한 말이다. “도는 도라고 말하게 되면 상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1)”에서 언명한 상영원하다’, ‘늘 그러하다의 뜻으로 쓰였으나, 여기 나온 무상심無常心고정된 마음’, 혹은 분별하는 마음의 상이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의 주관적인 마음의 상을 갖지 않은 채로 백성들을 대할 수 있고, 그렇게 되니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게 된다고 했다(以百姓心爲心).

성인이 자신의 마음을 따로 갖지 않고, 백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의 백 가지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게 되니, 성인의 눈에는 선한 사람(善者)과 선하지 않은 사람(不善者)을 나누어 차별하는 마음이 없다. 선한 이에게도 선하게 대하고(善者吾善之), 선하지 않은 이에게도 선하게 대한다(不善者吾亦善之). 그러하니 얻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이다. 그것을 덕선德善이라 했다.

그리고 성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도 믿고(信者吾信之),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믿는다고 했다(不信者吾亦信之). 그렇게 되니 진정한 믿음()’을 얻게 된다(). 그것을 덕신德信이라고 했다.

 

노자가 설하는 법은 우리가 따르는 법칙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선한 자에게는 선하게 대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한다. 아울러 우리를 믿는 자에게는 우리도 믿어주고 우리를 불신하는 자는 우리도 불신한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다. 인과응보의 논리는 거래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가는 것이 있으니 오는 것이 있다. 사실 상대가 하는 만큼만 해도 잘하는 거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는 것만큼만 내가 믿어줘도 잘하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노자가 말한 덕선德善과 덕신德信은 차원이 다르다. 상대성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 절대적인 선의 영역에 존재한다. 절대적인 믿음()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의 생각과 의 이해에 따라 거래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고, 다만 내안의 본성의 자연스런 명령에 순응해서 나온 덕이다. 그러하니 덕선德善과 덕신德信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나온 성인의 자연스런 태도가 된다.

 

그리고 성인이 세상 사람들을 향할 때 대하는 태도를 묘사해 흡흡언歙歙焉이라 했다. 흡흡歙歙이란 들이마시는 소리나 모양을 나타내는 의성어나 의태어 같은 것이다. 무엇을 들이마시는가? 백성들의 마음을 들이마신다. 백성들의 생각과 필요를 받아들인다. 나의 것으로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밀어부치는 그런 태도가 아니다. 나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인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성인이 세상의 요구에 끌려들어간 것처럼 보이나 기실 그렇지 않다. 성인의 빈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마음은 강과 바다가 아래에 처해서(處下) 온갖 물줄기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왕이 되듯이, 그렇게 온 백성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므로 그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성인이 세상을 향할 때 내는 마음은 혼연하다고(渾其心) 했다. 은 혼과 같이 쓴다. 섞여있는 마음이다. 분별 이전의 마음을 혼돈混沌한 마음, 혼연渾然한 마음이라 하는데, 바로 성인이 세상 사람들을 향할 때 내는 그 마음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인은 세상 사람들을 자기 잣대로 일방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가지의 성을 가진 백성들을 대할 때, 백가지 잣대를 갖는다는 말과도 같다.

백성들은 그런 성인에게 그들의 눈과 귀를 집중한다. 그러함으로 성인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聖人皆孩之). 이제 백성들의 마음이 아래에 처한 성인의 빈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성인의 혼연하여 분별없는 마음에 계합해 들어왔다. 그 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 즉 우주의 마음이니, 그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쓰촨성은 중국의 서남지역에 있는 인구 약 1억을 갖고 있는 큰 땅덩어리의 성이다. 옛날의 파촉지방으로 삼국지의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이 근거지로 운집했던 땅이다. 특히 도교의 발원지로 한때 목숨을 걸고 수도정진했던 도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곳이다. 쓰촨성의 중심도시는 청두成都라는 곳이고, 청두에서 바로 30분쯤 서쪽으로 가면 유명한 청성산靑城山이 위치하고 있는데, 청성산은 도교의 성지로 산 전체가 도관道官으로 꽉 들어차있다.

  

청두에서 차를 타고 약 두세 시간 서남방향으로 가면 아미산이 있다. 아미산 가는 도중에 팽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중국의 역사에서 800살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그 전설적인 팽조가 살며 수도했던 곳이다. 그래서 고장 이름이 팽산이다. 팽산을 지나 한 시간쯤 더 가면 아미산시에 도착한다.

아미산峨嵋山은 정상이 3,100미터가 되는 대단히 크고 아름다운 산이다. 티벳고원에서 동남방향으로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동북쪽으로는 쓰촨분지가 크게 펼쳐져 있다. 아미산은 원래 도교의 집성지였으나, 수나라 때부터 불교가 전해 들어오기 시작했고, 당나라 시절에는 도교와 불교가 공존했었다고 한다. 이후 황제의 폐관 사건이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현재 아미산 전체가 불교성지로 변해서 쓰촨성의 4대 불산佛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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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리잡아 수련한 터는 아미산 춘양디엔純陽殿이다. 이곳은 해발 950미터의 높이로 아미산 금정(3100미터)을 오르기 위해 출정하는 이들의 산행 초입에 자리한 곳이다. 춘양디엔純陽殿은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도교의 도관이었으나, 나중에 불교 사찰로 바뀌었다. 한때 아미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290여 간의 건물을 가진 도관이었다고 했다. 앞마당의 500년 묵은 10여 그루의 은행나무와 정남수들이 그 옛스런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세 아름드리나 되는 고목들이 아직 창창하게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듯,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데, 이곳 절 앞마당이 몇 년 동안의 나의 수련터였다.

 

춘양디엔은 중국 도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여동빈조사의 호, 순양純陽을 따 지은 이름이다. 여순양呂純陽은 당 오대 시기의 사람으로 종리권과 함께 도교 내단內丹이론의 기초를 완비한 도인이다. 도교 내단파는 송원시대에 절정을 이루며 그 이론과 실천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상당부분 종리권, 여동빈 두 조사의 공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후기 도교 남종파와 북종파의 양파 모두로부터 시조로 추앙받았다.

한편 명대 무당산을 일으킨 장삼풍張三豊 도인은 태극권 등 내가권內家拳을 창시한 당대 무술의 최고봉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련의 이론과 경지로도 최고봉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청대의 16개의 도교 유파가 장삼풍 도인을 조사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자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장삼풍 도인을 만나기 위해 명대의 세 황제가 진인을 추서하고 그를 불렀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를 흠모하던 명 성조는 그를 위해 무당산武堂山290십 칸의 도관을 지어주기에 이르렀다. 삼풍도인의 당대의 도력과 행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장삼풍 도인이 평생을 두고 일념으로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시어 온 존재가 바로 여순양呂純陽 선생이었다. 삼풍 조사를 흠모하며, 그의 수련의 정신과 길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나의 눈앞에 순양전純陽殿의 세 글자는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입의 산문을 지나 산 아랫녁에 자리 잡은 보국사保國寺를 둘러보고 나서 산을 오르니, 눈에 들어온 아미산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담청의 고운 빛깔로 채색해놓은 듯, 산색이 미려하고 부드러운 것이 내게 아미산은 매우 여성적인 산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산색의 고운 것도 그러하려니와, 산 곳곳에 주종을 이루어 서식하는 정남수와 대나무들이 빽빽하고 기다랗게 높이 솟아올라 늘어진 풍경이, 청록색 잔물결이 넘실대듯 그토록 아름다운 풍치를 맘껏 자랑하고 있었다.

아미산에는 서식하는 대나무 종만 해도 16종이 넘는다. 나무 두께만큼 두껍고 통이 큰 종에서부터 가늘고 작은 것들, 그리고 수백 개의 통대가 한 뿌리에서 무더기로 자라나는 것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죽순 맛이 쌉쓰름하고 대가 가느다란 종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다, 키가 20~30미터가 넘는 것들도 많다. 주변 나무들과 키재기하며 살아야 하는 숲속의 환경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왠지 낯선 인상을 받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곳이 아열대 상록수림이 울창한 곳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미산은 중국 국가급의 1급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생태환경보존구역으로 등록된 매우 특별한 곳이다. 수십 개의 유서 깊은 사찰이 있고 그를 통해 불교문화가 풍성하게 꽃피운 곳일 뿐만 아니라, 아열대 우림의 풍부한 생태와 동식물의 종이 서생하는 생태공간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큰 곳이다. 곳곳에 야생 원숭이들이 출몰하는 곳이니 영화 속 정글의 그것 같은 신비함이 있다.

 

내가 머물렀던 춘양디엔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우 고풍스럽고 단아한 정취를 풍기는 곳이다. 그곳이 한때 도교의 도인들이 주석하며 정진했던 곳이라는 자취를 여러 곳에 남겨둔 채,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그리고 아미산 시내의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서, 소박한 전통양식의 목조건물들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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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까지 올라오는 차도가 없기 때문에, 시내버스가 끊긴 곳에서 약 1시간을 상당히 가파른 산길을 타고 걸어서 올라오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쉽지 않은 길을 휴일이나 주말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라오는데, 그중 태극권 수련단체나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이들도 자주 눈에 띈다. 수백 년 묵은 노거수들의 그늘이 안락한 그늘을 제공하는 산사 앞 광장에서 음악의 리듬에 맞춰 태극권의 군무를 즐기는 이들 손님들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알아보고 반색을 하며 악수를 청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어느 자리에서 태극권 단체의 회원들과 함께 시연하는 것을 인상 깊게 보았던 모양이었다.

 

아미산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다습한 날씨다. 운무에 갇혀서 산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앞산조차도 운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정상인 금정金頂을 볼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아예 운무에 가려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때도 많다. 그러하니 수련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수련은 마음이 밖으로 떠돌지 않고 안으로 잠겨들어와야 한다. 정신이 내렴內濂되도록 하여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할 때 비로소 수련의 준비가 된다. 그런 조건으로는 아미산은 딱 좋다. 안개가 자욱하면 저절로 명상의 기운에 젖어든다. 고요한 가운데 자기를 돌아볼 기회가 된다.

 

이곳의 여름은 그야말로 시끄럽다. 앉아있으면 온갖 새들과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시장바닥보다 소란하다. 그네들의 한때를 그토록 시끄럽고 무성한 생명력으로 지내겠거니 한다. 시끄러운 것 같아도 자연의 소리는 듣기 싫지가 않다. 앉아서 그 소리들이 내 마음 속에 닿는 것을 관하다 보면 저절로 소리 속으로 빠져든다. 이 소리들이 단전에 닿아울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좋은 수련이 된다. 소리는 바로 기의 파장이기 때문에 그 소리들을 단전으로 듣는 것으로 여기고, 단에 의식을 모으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소리와 하나 될 때가 있다. 소리를 듣는 이도 소리를 내는 이도 없다. 그냥 떨림의 일미一味에 젖어든다.

 

그해 아미산의 겨울은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중국 방송이 50여년만의 폭설이라고 연일 크게 보도했다. 춘양디엔에서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성수이거聖水閣에서 수련할 때의 일이다. 며칠간 눈이 계속해서 쉬지 않고 내렸던 길이라 천지사방이 눈 세상이 되었다. 고즈넉하게 잠겨 방안에 앉아있는데, 흡사 웬 따발총 쏘는 듯한 소리가 요란했다. 나가보니 다름이 아니다. 집주변의 빽빽하게 둘러난 대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는 소리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기대어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가, 급기야 그중 약한 놈 하나가 무너지니 도미노처럼 모두가 다 무너진 꼴이다. 대나무가 무너지는데 내 마음이 막 무너지듯 아파왔다. 천리만리 먼 이국땅에서 오직 눈앞에 바라보이는 건 사방에 둘러선 대나무뿐이었다. 집주변과 산책길과 산 요소요소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대나무들이 무너져내렸다. 그 대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아꼈던 나의 마음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상無常의 진리를 뼛속 깊이 아로새긴 그런 경험이었다.

 

인생의 사계가 지나가면 우리도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무척 덥고 부산스러웠던 인생의 여름을 지나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삶의 꽃들을 피웠다. 제비꽃처럼 소박한 꽃들과 나리꽃처럼 화려한 꽃들과 호박꽃처럼 투박한 꽃들과 장미꽃처럼 화사한 꽃들과 그리고 각양각색의 두루한 빛깔들과 향기들을 피워댔다.

 

다가오는 인생의 가을엔 이 꽃들의 인연으로 각기 다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더 무르익고 빛깔 고운 가을의 성숙함을 기다리며 피우고 또 피운다.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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