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이 손가락 하나로 통한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 5/하나를 얻는다는 것/일지선 一指禪 

      

단편의 오른손이 오른쪽으로 살짝 감아돌아 집개 손가락이 일지一指를 만들며 펴지고, 다시 왼쪽 방향으로 역회전하듯이 가슴 앞에 그 일지가 모아진다. 계속해서 일지는 왼쪽으로 돌면서 바로 아래로 찔러 들어가는데, 마치 송곳이 땅속으로 파고 돌아 들어가는 기세다. 찔러가는 일지와 동시에, 왼손은 왼쪽으로 돌고 오른 발은 옆차기 하듯 오른쪽으로 돌아 나간다. 의념은 단전을 지키고 단전의 기운이 왼손과 오른발의 끝 쪽으로 대칭의 포물선을 그리며 모아져 나온다.

일지선一指禪이란 한 손가락으로 찌르는 선법이라는 뜻이다. 이 일지선의 자세는 외형으로만 봐도 꽤 어려운 초식이다. 오른손의 일지와 왼손의 수도날, 그리고 오른발의 발차기가 삼위일체가 되어 식을 만든다. 왼발의 지지력도 한가지로 중요한 버팀목이다.

일지선에 능통하면 일지로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강한 집중력과 일심으로 닦은 수련의 결과물이라도, 그것은 인간의 한계능력을 넘어서는 것 같다. 단지 육체의 힘으로 단련한 것이 아니라, 순일한 마음바탕에서 전신이 완전히 일기로 집중되고 통일되는 경지에 닿아서야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일지선 초식은 초보자에게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초식이다.

 

발에서 다리와 허리까지 전체가 반드시 완정일기를 이루어야 한다.”

 

由脚而腿而腰 總須完整一氣 유각이퇴이요 총수완정일기(장삼풍 태극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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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완정일기完整一氣란 마치 온몸이 오궁합일五弓合一(양손, 두발, 단전의 완전한 조화의 상태)을 이룬 상태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이 완전히 일기로 통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완정이란 온몸이 한 조가 되어 발에서 다리, 허리 그리고 어깨와 손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로 관천함으로, 한번 움직이면 모두가 움직이고 한번 안정하면 모두가 안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신은 일방에 집중되고 힘은 분산되지 않으며, 앞발 끝이 내려가면 온몸도 함께 꿰듯 따라가는 것과 같다.

일지선一指禪은 한 손가락으로 하는 선이니, 여기서 선이란 일이관지一以貫之(오직 하나로 꿰는 것)의 정신상태를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이다. 옛날의 선사들은 화두話頭를 들면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 불을 땔 때나 경전을 볼 때, 그리고 명상을 할 때,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黙動靜 어느 때라도, 오직 마음속에 일심一心으로 그 화두에 전념했다. 모든 언어와 논리와 상을 깨고 도달한 바로 그 자리, 그것이 노자의 말로 하면 하나를 얻음(得一)’이다.

 

옛날에 하나를 얻어서 된 것들이 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말갛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안정되고

정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계곡은 하나를 얻어서 가득 차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생겨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서 세상을 평안히 다스린다.

이는 모두 하나에 이를 뿐이다.

 

昔之得一者: 석지득일자

天得一以淸, 천득일이청

地得一以寧, 지득일이녕

神得一以靈, 신득일이령

谷得一以盈, 곡득일이영

萬物得一以生, 만물득일이생

侯王得一以爲天下貞. 후왕득일이위천하정

其致之. 기치지 (39)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으로 뿌리를 삼고,

높음은 낮음으로 바탕을 삼는다.

 

故貴以踐爲本, 고귀이천위본

高以下爲基. 고이하위기 (39)

 

하나를 얻음(得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득일得一은 앞의 포일抱一과 다르지 않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란 존재와 만물의 양가성을 통합해서 보기’, 즉 분리된 두 개의 세계로 보이는 음과 양을 따로 떨어져 대립되고 상반되는 독립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본래 하나인 것으로, 혹은 음과 양의 새끼꼬기처럼 양면이 서로 갈마들어 있을뿐더러, 상대의 존재를 전제함으로써만 자기 존재의 조건이 충족되는 일체의 것으로 그 의미를 읽었다.

 

하늘은 밤과 낮이 교대하고 흐리고 청명함을 한데 갖추니 그래서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하늘, , 정신, 계곡, 만물, 후왕이 모두 자기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지 않고, 대립되고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음과 양의 양 측면을 모두 갖추어서 하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대립 상반되는 둘을 함께 얻어야 하나 됨에 이른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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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사유로 풀면 매우 간단하다. “귀함은 천함으로 뿌리를 삼고(貴以踐爲本), 높음은 낮음으로 바탕을 삼는다.(高以下爲基)”고 함이 그것이다. ·, ·, ·, ·, ·, ·, ·, ·, ·, ·, ·, ·, ·무가 본래 한 뿌리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존재함으로써 나눌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인 줄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못생김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함이 선함이라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음에 기대어 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天下皆知美之爲美, 천하개지미지위미

斯惡已 사오이

皆知善之爲善, 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고유무상생

難易相成, 난이상성

長短相較, 장단상교

高下相傾, 고하상경

聲音相和, 음성상화

前後相隨. 전후상수(2)

 

우리가 이름을 불러 경계가 생긴 그 만물들은 우리의 시상視象과 관념에 비추인 바, 그대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물들 간의 존재법칙은 노자의 언어로 하면 자연自然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함이니 본디 실재의 존재방식이다. 그것을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다.

 

사람은 땅의 법을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는데,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네.

 

人法地, 인법지

地法天, 지법천

天法道, 천법도

道法自然. 도법자연 (25)

 

사람은 땅의 법칙을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하늘은 도의 법칙을 따르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고 설하는 노자의 직관으로부터 경계 없는 실재의 존재방식이 어떠한지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존재방식, 그것을 일러 하나라고 하고, 그런 자연의 존재방식을 체득하는 것, 그것을 일러 하나를 얻음(得一)’ 혹은 하나를 껴안음(抱一)’이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란 우리가 우리의 프리즘으로 둘로 나누어 보기이전의 원래 존재하는 방식을 말함이다. 그것이 존재의 실상實相이고 여여如如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란 도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란 그릇으로 쪼개지기 이전의 원형의 통나무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자가 크게 씀은 나누지 않음이다.”라고 설한 말과 통한다.

 

통나무가 쪼개어져 그릇이 만들어진다.

크게 씀은 나누지 않음이다.

 

樸散則爲器, 박산즉위기

大制不割. 대제불할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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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가 쪼개져서 다양한 그릇으로 만들어져 쓰이는데,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통나무가 도의 체라면 그릇은 도의 용이다. 쓰임새를 위해서 나누었으나 작은 쓰임새에 가려짐으로 통나무의 원래의 모습, 즉 도의 본체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제불할大制不割이란 말은 큰 제도는 바로 그 통나무를 통째로 쓰는 것과 같이 나누지 않고 쓰는 그런 통 큰 제도 같은 것을 의미한다. 큰 정치는 내편 네편, 주류 비주류, 여당 야당 가르지 않고 하는 통 큰 정치를 말하고, 큰 평화는 내 집 네 집 , 내 나라 당신 나라, 안쪽 바깥쪽, 위쪽 아래쪽 가르지 않고 온우주를 통째로 사고하고 한데 보는 평화를 말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하나를 얻음得一이고, 하나를 껴안음抱一이고 크게 씀(大制)’이다.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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