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를 낮게 깔아들인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 3/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음양어 陰陽魚
   
 오른쪽 남찰의에 이어 두 손을 왼쪽으로 살짝 돌아 앞으로 찔러 들어갔다가, 다시 뒤로 돌면서 두 손을 십자수로 가슴 앞에서 모아 앞으로 밀어내, 마치 그물을 던지듯이 하여 오른쪽 왼쪽으로 나선형의 포물선을 그려내고, 이를 다시 회수해 두 손이 단전 앞에 낮게 깔려 들어온다.
 두 손의 손목이 살짝 꺾어 돌아 나와 전방을 향해 밀어나가는 것이 노도와 같이 무겁고도 부드럽다. 두꺼비 입모양처럼 손을 회수하여 왼쪽으로 두 회전을 돌아 흡사 손거울로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하는데,  이 자세가 수경간심手鏡看心이다. 다시 발을 모아 오른쪽에 선녀가 꽃을 뿌리는 모양의 천녀산화 天女散花 자세로 합한 뒤, 이어지는 식은 단편單鞭이다.
 
 108식에서 음양어陰陽魚가 아홉 번이나 나오는데 그 첫 번째이다. 기氣의 그물을 쳐서 음과 양의 물고기를 잡는 뜻을 담아 붙인 이름이다. 하체의 고관절과 사타구니 근육이 잘 열리도록 오른쪽과 왼쪽으로 넓게 벌린 두 다리로 떡 버티고 서서 어부가 그물을 쳐올리듯 수법手法이 교묘하고 현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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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이란 천지의 도이며, 만물의 근본이며, 변화의 모체이며,
 생살生殺의 본시며 신명神明의 창고다.”(황제내경, 음양응상대론)
 
 음양어는 음과 양을 포일抱一하는 식이다. 기수련에 있어 음은 양養하고 축蓄하는 기운이고, 양은 운행運行하고 통通하게 하는 기운이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명상하듯이 하는 참장공은  대표적인 양기 수련이고, 움직이는 선법仙法인 투로套路는 운기 수련이다. 운기 수련 위주의 투로 중에서도 음양어는 축기蓄氣를 위주로 한다. 기를 단전에 낮게 깔아들이는 기침단전이 단전축기법이다.  다시 말해 이 식은 양중의 음을 챙기는 것과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가 역설한 포일抱一이다.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세상의 시내가 된다.
 세상의 시내가 되면,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않아서 갓난아기로 되돌아간다.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면,
 세상의 모범이 된다.
 세상의 모범이 되면,
 항상스런 덕은 어긋나질 않아서 무극으로 되돌아간다.
 영화를 알고 굴욕을 지키면,
 세상의 골짜기가 된다.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스런 덕이 이에 족하니 통나무로 되돌아간다.
 
 노자의 포일抱一은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는 것을 모범으로 한다. 포일抱一이란 ‘하나로 감싸 안는다’는 말이니 하나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나누어지기 이전의 본디 상태이다. 본디란 ‘본래 있는 대로 그러함’이니 여여如如함이다. 실상實相의 세계이다. 세계를 우리의 분별된 눈으로 나누어 보기 이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모습으로 감싸 안는 것, 그것이 포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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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일은 우리에게 이름 없는 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마음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종용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래서 포일은 바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이다. 이러한 포일을 모범식으로 하여 항상스런 덕, 즉 상덕常德이 노자가 가장 예찬하는 덕이다. 그리하여 양을 알고(知其雄), 음을 지킴으로써(守其雌), 세상을 청량하게 씻어내려 주는 시내가 된다(爲天下谿). 시내는 여러 물줄기의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여 포일하기 때문이다. 노자의 덕은 도가 내재함이니, 상덕이 떠나지 않아,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흰 바탕에 검게 쓰인 글씨를 읽기 위해 검은 색만 취할 수는 없다. 흰 바탕이 없으면 검은 글씨도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둑을 두는데 백돌과 흑돌을 나누어 둔다. 흑백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서 바둑을 두는 법은 없으니, 여기서도 포일은 중요하다. 그래서 백을 알고서(知其白) 흑을 지킬 수 있느냐(守其黑)고 노자는 묻고 있는 것이다. 포일을 따를 것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극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復歸于無極).
 
 영예를 알고서(知其榮) 그 영예가 추락했을 때의 굴욕을 지킬 수 있느냐(守其辱) 묻는다. 좋은 것만 취하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어 부르게 될 좋지 않은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천하의 계곡이 될 수 있다(爲天下谷). 계곡은 텅 비어 있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신령하게 된다. 그래서 계곡의 신령함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다고 했다.(谷神不死,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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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항상스런 덕이 족하니(常德乃足) 원형의 통나무(樸)로 되돌아 갈 수 있다(復歸于樸)고 말한다. 박樸이란 통나무를 쪼개기 이전의 원재료이다. 옛날에는 통나무를 쪼개어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릇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그릇의 쓰임새와 이름과 가격이 차별되이 생겨 나오는데, 원형의 통나무란 이름 없는 도의 원래의 자리를 비유함이다. 그러므로 통나무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와 하나 됨’을 의미하게 된다.
 
 꼬부라지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된다.
 그래서 성인은 하나로 감싸 안아 세상의 모범으로 삼는다.
 
 스스로 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뽐내지 아니하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치 아니하니 으뜸이 된다.
 무릇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
 
 不自見故明, 부자견고명
 不自是故彰, 부자시고창
 不自伐故有功, 부자벌고유공
 不自矜故長. 부자긍고장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제22장)
 
 ‘곡전曲全’ 이 두 글자는 장자가 평생 매달렸던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한다. 곡曲은 구부러짐이요, 전全은 온전함이다. 곡曲하니 전全한다는 사상은 대단한 역설이요, 삶의 지혜이다. 장자[산목]편에서는 “곧은 나무는 일찍 베이고, 물맛 좋은 우물은 얼른 고갈된다.”고 말한다. ‘곡전曲全’의 역설적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무위無爲하니 무불위無不爲한다.”의 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다투지 않으니 세상이 그와 다투려 않는다.”(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는 구절은 오늘날로 하면 ‘평화사상’이다. 부쟁不爭은 노자의 핵심 사상중의 하나인데 부쟁의 방법론이 위에 설해져 있는 바로 곡즉전曲則全이다.
 
 그래서 곡즉전曲則全은 포일抱一사상을 실현하는 실천적 덕목이기도 하다. 그것은 “겸허하게 물러남”(謙退), “부드러움을 지킴”(守柔), “낮은 데 처함”(處下) 등과 통하는 노자의 중심사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껴안는 사상은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고’ ‘나를 굽히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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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든 딸이든 어린아이는 중성이다. 아직 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을 드러내고 성을 배우기 시작한다. 아들은 남자를 배우고 딸은 여자를 배운다. 어릴 때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가릴 것 없이 한데 얼려 놀았지만, 이제 남녀 7세가 되면 부동석이다. 서로를 따돌리면서 동시에 서로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음양을 배우고 음양의 이분법적 가치를 배운다. 나를 그것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게 되어 ‘자아’의식이 싹트고, 선과 악이 있다고 믿기 시작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다른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신체와 마음을 따로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니 그리하여 세상은 서로 분리된 어떤 것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그 이름에 따른 관념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 관념, 즉 상想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아이들이 음양의 바다에서 헤엄치기를 시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음양의 바다에는 무한히 많은 물고기떼가 있다. 아이들이 음양이라는 물고기떼를 따라서, 넓은 바다를 배워 나간다. 때로 잔잔한 물속을 유유히 노닐기도 하고, 때로 거친 파도를 타며 음양의 파도타기를 배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바다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배경임을 알기 시작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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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는 원래 ‘물’ 자체이고 아이들도 그 물과 원래 한 몸임을 익혀서 알고 있을 것이다. 물결이 거셀 때 슬프다거나, 물결이 잔잔하여 평온할 때 감미롭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습관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음)의 법칙을 몸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이제 세상이 음양의 이법理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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