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쓸데없어,,마음만 비우면돼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기 21/만주를 지나 연변에 가다

 

베이징 중심을 가르고 지나가는 길에 천안문 광장을 만났고, 꼭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북경대학교도 만났다. 당장 내려서 그곳에 쑤욱 들어가고 싶은 충동질이 일었으나 참았다. 택시로 시간 반쯤 달리니 갈아타는 역이 나온다. 이제 만주 벌판으로 달리는 길만 남았다. 한밤을 지새우고 그곳에 가면 우리 동포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운 된장국도 있고 김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로 정겹게 마음을 전달하고 전달받을 수 있는 사람들, 그곳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따뜻해진다.
 
 연변엔 이번이 두 번째나 마음으론 벌써 골백번도 더 갔던 고향 길 같다. 10년이 채 못 되었다. 북녘의 식량난이 심각한 이슈가 되었던 때 남녘의 몇몇 인사들과 북한 식량 돕기 차원의 연변 방문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땐 인천을 떠나 심양의 봉천역에서 비행기를 내렸었다. 그리고선 간판에 ‘봉천역’이라 쓰인 이름이 하도 낯익어서 발길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봉천역과 안중근 의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신의주 건너편의 단동을 거쳐 장백산맥의 기나긴 협곡을 통과해 집안과 통화에 이르렀었다. 도중에 조선족들의 집성촌들을 방문했다. 요로 요로에서 탈북자들을 만났고, 북쪽의 긴급한 식량사정을 타진하며 대책을 숙의했었다. 연변지역 첫 방문의 단편들이다.

만주 벌판.jpg » 만주벌판
 
 정확히 말하면 연변은 두 번째지만, 연길로 보면 초행인 셈이다. 고구려의 고토이자 일제하에 식민지 민족해방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 독립군의 후예들과 조국을 잃고 떠돌던 수많은 동포들의 굴하지 않았던 삶의 자취와 애환이 아로새겨진 곳, 아직도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동포들이 역사의 고토에서 면면이 그 줄기를 이어오고 있는 곳, 그곳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다.
 
 고향 생각, 동포 생각을 하니 새 힘이 난다. 상상의 나래를 타고 가는 여정은 지루할 까닭이 없다. 달콤한 잠에 빠진 채 열차 칸의 밤은 깊어만 갔다. 단잠을 자고 단꿈을 꾸었겠다. 새벽의 미명이 어슴푸레 밝아온다. 열차는 아직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기적소리가 먼 하늘에 새벽을 알린다. 눈을 비비고 이층 칸에서 내려온다. 어, 이것 봐라, 눈이 확 깬다. 어디선가 우리말 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바로 밑 통로에 앉은 이들의 말소리였는가. 아 그런데, 이건 또 웬 조화람,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복장이 불량하다. 저게 타이즌가 내복인가? 몸에 딱 들어맞는 속곳들을 입고서 커피를 마시거나 재담들을 나누고 있다. 

중국 기차 1.jpg » 중국 기차
 
 중국 동포들의 목소리가 맞다. 고향엘 가는가 보다. 속에서 반가운 정이 확 인다. 실례를 무릅쓰고 옆의 젊은 처자들에게 가서 물었다. 또렷한 조선말로 대답하는 그들이 바로 우리 동포 맞았다.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우리말인가. 언어가 통하는 동포들을 이토록 한 열차 칸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복장불량에 대한 궁금증만 남기고.
 
 궁금증의 전모도 머잖아 밝혀졌다. 처음 연길에 가서 한 민간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던 모 회장의 집에 의탁해 있을 때였다. 거기선 잘사는 축에 들었던 그네의 아파트는 상당히 고층에 있었다. 나는 당분간 태극권의 투로를 숙련시키느라 여념이 없었고, 이 집의 널찍한 거실을 개인 수련장이나 되는 양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새벽의 거실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람마다 새벽이면 볼일이 있게 마련이다. 이집 주인 내외와 아들을 불문하고 잠에서 깨어 거실을 가로지르는 복장이 내 눈에 띄었다. 불량했다. 남녀불문하고 열차 칸의 그 젊은 사람들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사적인 공간이어서 그러겠지. 자기 집이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다. 연길의 겨울은 기본적으로 영하 30도 이하다. 추워도 너무 춥다, 이 사람들이 두꺼운 내복을 이중삼중으로 껴입는데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그런 내복 상태로 외출을 하고 가까운 슈퍼에서 물건을 사오기도 하니,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 별반 호기심을 못 이겨 언젠가 기어코 그것을 물었다. 그랬더니, 이 보살, 대답이 더 걸작이다.

중국 기차 2.jpg » 중국 기차 침대칸
 
 여러 해 전이었단다. 북녘의 공화국 국가수립기념절을 맞아, 연변조선족동포 축하객일원의 자격으로 초대받아 평양엘 갔더랬다. 그곳의 최고급 호텔격인 고려호텔에 묵게 되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대표 사절들이 함께 묵고 있던 고려호텔은 세계 각국에서 온 귀빈들로 북적댔다. 북조선에선 아마 가장 뜻 깊고 큰 규모의 행사였지 싶었다. 북조선의 입장에서도 연변의 동포들은 그중 반갑고 우호적인 손님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에 어려움에 처해 북조선으로 국경을 넘어 피신해오는 많은 연변 동포들에게, 북조선 당국은 따뜻한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을 달리하며 훨씬 훗날의 일이다. 식량난으로 탈북자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물밀듯이 연변으로 들어와 구호를 요청했고, 처지가 바뀌어 이번에는 연변동포들이 동포애를 발휘했다. 몰래 가게에 찾아드는 사람들과 손을 내미는 아이들, 숨을 곳이 필요한 탈북 동포들이 쇄도해오는데도 마다하지 않고 도움에 전혀 인색함이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우애와 협력의 역사를 간직해왔던 까닭에 더욱 연변 동포들에 대한 북조선 당국과 인민들의 시선은 따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기념식의 전야를 즐기던 연변 동포들이, 예의 그 내복 바람으로 호텔의 안과 밖을 열심히 출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다. 어찌나 즐겁고 화려한 그들만의 출타를 기념하여 호텔 안팎을 분주히 출입하던 동포들에게,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긴급한 타전이 왔다.
 “동포여러분, 창피해 못 살겄시유. 왜 이렇게 내복 바람으로 나댕기는 겁네까? 일본 동무들이 뭐라 한 줄이나 아십네까? 제발 우리 민족의 품위를 지켜주시라요.”
 뭐, 이러면서.
 나는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그런 다음엔 나도 그들만의 독특한(?) 만주벌의 풍속을 따라가고 있었다.

중국 기차 3.jpg » 중국 기차
    
 그러거나 말거나 열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드문드문 창밖을 스치는 건물들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변지방인 게 확실하다. 간판에 쓰인 글씨가 하나같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위쪽에 우리글과 아래쪽엔 중국어. 햐아, 익숙하기만 한 우리 글자에 동공이 확대되는 것 같다. 시선이 닿는 곳곳이 모두 다 그랬다. 우리말 글자들이 박힌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숨결이 느껴진다. 민족혼이란 이런 것인가. 같은 동포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같은 언어로 수없는 길이의 세월을 함께 흐르고 흘러왔을 것이다. 인간이란 언어적 존재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 마디마디엔 우리 자신의 생활과 사유의 자취가 구구절절이 박혀 있다. 살아온 시간은 달라도, 흘러온 공간은 달랐어도, 생각하는 방식에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같은 언어의 줄기를 쓰는 한 동포였던 것이다. 마침내 비행기는 서서히 연길의 마당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말이니, 연길로 보면 벌써 겨울이 본격적으로 도래한 거나 진배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마련해진 숙소가 있는 시 외곽의 모처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서 4시간 쯤 버스를 타고 가면 꿈에 그리던 백두산이 있다. 한반도의 지붕이 맞을까, 머리 꼭대기(頭頂)가 맞을까. 사람으로 말하면 두정의 백회혈(白會穴) 부근일 것이다.
 
 몇 달 만일까, 타지에서 외로이 수련에 골몰하던 내가 그것도 연길이라는 만주벌에서 싸부를 만나니, 그 감회 또한 무척 컸다. 싸부는 중국 유학 시절에도 틈만 나면 비행기를 타고 이곳 연변으로 훌쩍훌쩍 날아오곤 했었다. 다름 아닌 ‘수월’스님의 발자취에 관한 연구가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까닭이다.
 
 수월(水月) 스님, 그는 누구인가? 사실 한국 불교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일천한 나로서는 수월스님에 관한 단 한권의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학고재)>을 싸부의 서재에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음에도 그때까진 관심 밖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했었다. 싸부는 말하자면 수월 스님의 법손(法孫)이었던 것이다.

수월선사 2.jpg » 수월스님
 조선 말기의 선승, 경허(1849-1912) 스님은 한국 근대 선(禪)의 중흥조(中興祖)라 불리는 대가였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선의 맥이 끊겼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선을 회복시킨 장본인이다. 중국의 고승들에게 법맥을 갖다 붙이기에 급급했던 옛 고승들보다 평지돌출한 경허는 오히려 원효 이후 최고의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허 스님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다. 여기 ‘수월’ 스님이 그의 맏 상좌였다. 이들 세 제자는 ‘경허 스님의 세 달’이라고 불렸다. 법명에 모두 ‘달 월’자가 들어간다. 세 달은 수월, 혜월, 만공(법명은 월면), 이렇게 세 스님을 가리킨다.(불교사전, 김승동 편저, 민족사)   

경허스님.jpg » 경허스님
 
 만공 스님과 혜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많다. 하지만 ‘세 달’ 가운데 맏 상좌인 수월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는 게 거의 없다. 유일하게 수월의 자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희한한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이다. 그리고 수월의 자취를 추적하여 기록해놓은 유일한 다큐소설인 이 책이 있기까지, 그 배경에 두 사람의 결정적 공헌이 있었다. 바로 싸부와 그의 동문 사형인 지한 법사였다. 그러니까 싸부는 만주 벌판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수월 법조(法祖)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유학생활의 긴한 일정을 쪼개고 쪼개어서 수시로 이곳을 출입하였던 것이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과객으로 묵어가는 스님에게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는 수월 스님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출가 후 경허 스승으로부터 ‘천수대비주’로 공부를 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자나깨나 밭에서 일할 때나 소를 먹일 때나 오로지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다른 잡념 없이 일념으로 대비주를 외고, 대비주와 하나가 되고, 그 깊이 안에 녹아들어, 스님은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리고 깨달음 이후에 그에겐 세 가지 특별한 힘이 생겼다. 한번 보고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잠이 없어졌으며, 아픈 사람의 병을 대번에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은 깨친 뒤에도 불목하니(절에서 땔나무를 하고 불을 때는 사람)와 같은 삶을 살았다. 여러 사찰에서 그를 조실로 모셨지만 나무 하고 짚신 삼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은둔했다. 다음은 수월 스님이 있던 화엄사에 몸을 다쳐 머물던 한 독립군 연설단원에게 했다는 가르침이다.
 
 “도를 닦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던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 반메 훔’을 혀서라도 마음 모으기를, 워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 겨.”
 
 1915년경에는 러시아 국경 부근 만주의 ‘수분하’라는 곳까지 갔다. 거기서 수월 스님이 대도인인 줄 모르는 한 젊은 주지 밑에서 모진 대우를 받았으나, 역시 아무 내색 없이 묵묵히 일하고,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월 스님은 그 젊은 주지의 고약한 행패를 스승 삼았노라고 말했다.
 
 “열심히 수행혀라. 공부하는 데는 다 쓸데없다. 오직 이 마음 하나 비우면 그만인 겨. 세상에서 마음 비우는 일 보담 더 어려운 게 없어. 또 참는 일 보담 더 어려운 일도 없어.....그때 나는 내 도를 다 이루기 위해 여섯 해 동안 어떤 젊은 스님 밑에 있었던 겨. 그 젊은 스님이 내게 무신 행패를 부리고 무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나는 한 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어. 나는 그런 내 보림(保任, 깨달음 이후의 수행) 생활이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던 겨. 그러니 그 젊은 스님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단 말여.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보림을 이룬 셈이여.”(<물속을 걸어가는 달> 중에서)
 
 동북지방의 연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싸부와 그의 사형인 지한 법사가 낯설고 물 설은 이국의 만주벌에서 어렵게 일구어낸 ‘수월’의 자취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아, 이곳이 만주 벌판, 고구려와 발해의 웅혼한 기상이 서려있는 곳, 청산리 전투에 빛나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항일 유격 독립전쟁이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곳, 헤이그 밀사 3인중 한 사람인 이상설이 설립한 항일교육의 선구역 북간도 서전서숙이 세워졌던 곳, 윤동주와 장준하와 문익환을 함께 배출한 대성중학교가 민족혼을 숨 쉬고 있는 곳, 그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뒤에서 수발하며, 조국을 떠나 서럽게 만주벌을 헤매는 동포들의 애환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선승 수월의 발자취가 선연한 곳, 바로 그곳인 것이다.

연길시 2.jpg » 연길시
 
 싸부와 나는 밤이 늦도록 그간의 수행과정을 묻고 답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금부터 해나갈 수련 과정과 세부 일정을 점검하였다. 무엇보다 싸부의 안배로 내일이면 꿈의 백두산 기행을 가기로 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 곳인가. 그리고 또 하나, 반가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한 법사가 오신다고 했다. 아직 뵌 적이 없었으나 싸부로부터 수없이 소문만 들어왔던 지한 법사님 만날 일도 나를 설레게 하는 또 하나의 기쁨이 되고 있었다.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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