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無門)의 길이 빠른 길이다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기 4/나의 길을 홀로 간다

 

한국 사람들은 참 묘하다. 본산지 인도에서 직수입한 요가보단 미국의 뉴욕에서 편집된 미국 버전의 요가에 더 환장한단 말이야, 인도산 요가는 누천년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본연을 지극한 깊이로 탐구해 들어간 정통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참 이상해, 오리지널한 인도산보단, 바디 스트레칭 수준으로 얄팍하게 개조한 미국산 요가에 홀딱 빠지지. 마음의 깊이는커녕 육체의 정미함에도 이르지 못할 것에다 장삿속마저 그럴 듯하니.
 
 사내는 요가의 종류 여하를 떠나서, 요가의 국적을 떠나서, 진정으로 요가를 좋아하고 사랑했다. 몸동작에 전념하던지, 호흡과 감각에 초점을 맞추든지, 몸동작을 잊고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든지 간에, 요가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들고 나는 숨 속에서 하나였다. 밖의 감각의 다채로움도 안의 마음과 한가지로 통했다.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분노와 무지의 상들을 형상화한 요가 아사나를 수행하면서, 그에 상응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심상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몸으로부터 마음에 이르는 자기규율’의 한 가지로서 요가의 효용성을 뼛속깊이 체화한 사내에게, 요가는 앞으로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었다. 육체, 즉 ‘신이 거하는 집’을 떠받쳐줄 단단한 들보의 하나가 되었다.

위빠사나 명상.jpg
 길은 다님으로써만 길이 된다. 남들이 다니는 길이 곧바로 나의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사내는 길 가운데서 길의 뜻을 되새긴다. 길은 뭍으로도 나있고, 강이나 바다로도 나있고, 그리고 하늘로도 나있다. 많은 이의 눈에 띄어 뭇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로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로도 있다.
 
 길을 간다. 길을 가는 데 수레를 탄다. 작은 수레를 타고서 쉼 없이 가는 이도 있다. 여럿이 동시에 타고 달리는 열차나 고속버스 같은 것도 있다. 강이나 바닷길을 유유히 떠다니는 돛단배가 있는가하면, 하늘길을 타고 단박에 날아 목적지에 도달하는 비행기도 있다.
 
 멀고 높은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길은 많다. 길의 인연은 사람마다 같지 않을 거야, 사내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하늘이 품부한 각각의 재능 여부에 따라서, 오랜 업의 인과에 따라서, 금생의 복록의 여하에 따라서, 자신의 실천 행에 따라서, 길의 인연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어. 나의 삶, 나의 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과 헌신에의 길이 있다. 박띠 요가라고 한다. 지혜의 길이 있다. 즈나나 요가라고 한다. 실천의 요가가 있다. 까르마 요가라고 한다.
 각기 다른 인연으로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 그 길이 우리 앞에 있다. 길을 인도하는 스승도 우리 앞에 있다. 스승은 눈앞에 있으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과에 좋은 원인을 충분히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승은 때론 볼품없는 거지의 꼴로 나타나기도 한다. 경전 속에서 손짓하며 미소 짓는 스승도 있다. 거대한 산 한가지로 우뚝 서서 말없이 삶을 이끌어주는 스승도 있다.
 스승상은 바가지 긁는 마누라의 잔소리 속에서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정다운 친구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며, 화사한 한 떨기 들꽃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청천 하늘에 한 조각 뜬구름으로 나투어 우주적 무상성을 희언으로 일별하기도 한다, 사내는 공부 길의 인연을 찬찬히 살펴가며 명상을 이어나간다.
 
 오쇼 라즈니쉬(1931-1990년, 인도)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다만 지구라는 행성을 다녀갔을 뿐이다.”

라즈니쉬.jpg » 오쇼 라즈니쉬
 장자(기원전 369-289년, 중국)의 아내가 죽자 그의 친구가 문상을 왔다. 문상을 와서 보니, 곡을 하고 있어야할 장자가 곡은 하지 않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장자의 친구가 말했다. “자네는 아내가 죽었는데, 곡은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네 그려”
 장자가 말했다.
 “아내가 죽자 나도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내는 태어난 적도 없었네, 태어난 적이 없으니 죽은 적도 없지 않는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한가지(死生存亡一體者也)”에 불과함을 일찍이 간파했던 우리의 위대한 스승 장자의 말씀 파편의 한 대목이 그로부터 2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사이 인도와 세계의 구루로서 명성을 날렸던 현대의 큰 스승 라즈니쉬의 묘비명의 구절 한 대목과 구구절절 그 뜻이 겹쳐있다. 이 어찌 의미심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자.jpg

 라즈니쉬는 그의 강연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빠사나를 수련하는 사람은 그 길이 쉽다. 바로 앞만 보고 걸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계단 한 계단,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그뿐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걸어온 만큼 확신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길의 목적지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 목적지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너무 많이 갖는 것도 때론 병이 될 수가 있다.
 
 그렇게 단계적인 상승의 길을 걷던 위빠사나 수행자도 어느 지점에선가는 눈앞에 심연을 마주한다. 심연이란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건너가야 할 강 같은 것이다. 그것을 피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또한 위빠사나 수행자가 넘어야할 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위빠사나 수행자의 특징 중 하나는 심연을 맞닥뜨린 상태에서도 결코 놀라워하거나 두려워 떨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길 가는 자는 지금껏 길을 걷는 내내 어떤 ‘즐거움’과 자기가 걷는 길에 대한 ‘확신’을 자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길 가는 자는 두려움 없이, 희열과 평화의 마음으로, 마치 지칠 줄 모르는 한 마리의 소처럼 저 피안을 향해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길은 범용한 이들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있다. 개방성이 장점이 된다. 출발선에서 길 떠난 이들이 심연을 마주하기까지는, 그 길이 지난하다할지라도 크게 이탈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게 된다.
 
 라즈니쉬는 계속해서 말한다. 선불교는 다르다. 선불교는 출발선상에서 심연을 마주한다. 처음부터 심연을 마주한 수행자는 크게 호흡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길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승의 안내지도는 그런 까닭에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수행자는 목적지에 대한 철학적 견지를 바르고 확철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확고한 선이해가 없으면 어느 순간 절벽을 마주하여 절망감에 치를 떨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불교 수행자는 처음부터 ‘문 없는 문(無門關)’ 앞에 선다. 문이 없다는 것만큼 난망한 일도 없다. 들어갈 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왜, 들어가야 하는지 모른다. 한편, 문이 없으므로 그 문을 통과해야할 어떠한 과정과 절차도, 이유도 없게 된다. 여기, 지독한 역설(paradox)이 존재한다. 문이 없다는 것, 문을 열 빗장 자체가 없다는 건 문을 통과해서 목적지로 가야될 사연 있는 수행자의 입장에선 참으로 막막한 일이 된다. 반면에 소수의 수승한 수행자에게 무문관 수행은 이미 우리 안에 구족된 하늘을 보는 눈만 있으면 어렵지 않다. 내 안에 온전히 모셔진 신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까닭에 들어가야 할 문이 필요 없다. 내가 그 하늘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무문의 길은 빠른 길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몸체의 길이다. 단계도 과정도 자상한 안내도 없다. 길의 이정표가 없이 심연을 앞에 둔 채 떨고 있는 길가는 이여!
 그 길은 수승한 자, 전생에 복록을 도탑게 지은 자, 용감무쌍한 자에겐 활짝 열려 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상(我相)’도, 모든 ‘만물에 대한 상(他者相)’도, 지켜야할 ‘계율과 도리와 이정표에 관한 어떠한 분별상(法相)’도 모두 철저히 무화(無化)시키도록 요청된다.
 
 ‘내려놓아라(放下着)’, ‘조주의 無자 화두’, ‘백척간두에서 일보 전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뭐꼬? 등의 화두를 붙들고 사유를 계속한다. 논리적 사유를 넘어서 ‘直知(직지)’한다. 피할 데 없이 극한의 지경으로 자신의 사유를 몰고 가서, 오로지 ‘화두’ 하나에 의식을 고정시킨다.
 
 숭산 스님(1927-2004년, 한국) 은 소승과 대승과 선불교의 비유를 이렇게 말했다.
 소승(위빠사나)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누구나 자전거를 타고 갈 수는 있다. 그러나 너무 느리다. 그뿐 아니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자도 매우 드물다. 대승은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것에 비유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더 빠른 속도로 간다. 그러나 비행기만큼은 못 된다. 선불교의 ‘선(禪)’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산을 오르는 것에 비견된다. 불과 며칠 만에도 산정에 도착할 수 있다.

숭산.jpg » 숭산 스님
 길과 길의 종착지와 수레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견해도 있다. 길가는 이의 성격과 이상과 재능만큼이나 다양한 길의 노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다양해서 ‘차이’를 노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길은 길 가는 과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그 목적과 과정이 서로를 먹이로 삼는다. 마치 머리가 꼬리를 따르고 꼬리가 머리를 따르듯, 머리와 꼬리는 서로를 원인과 결과로 삼아 돌고 돈다.
 
 그러므로 말한다. 나의 길을 간다. 그 길을 나 홀로 간다, 라고.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