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 모았다 뿌리며 경혈을 자극하니 고수를 찾아서

선비춤의 달인 권오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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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돈다. 화려한 색의 한복보다 흰색의 두루마기에 정감이 가는 이유는 백의민족 유전자 탓일게다. 한손에 든 적당한 크기의 합죽선엔 어떤 그림이나 글자도 쓰여 있지 않다. 펴고 접는 순간 묵직하고 위엄있는 소리만이 허공을 가른다.

 ‘선비’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 흰머리가 적당해 보기 좋은 선비가 춤을 춘다.

조용하게 울려퍼지는 굿거리 장단에 맞춰 손과 발, 어깨와 무릎의 근육과 관절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작지만 부드럽고, 소박하다. 살짝 옆으로 튼 얼굴의 형형한 눈동자는 땅을 보고 있다. 발은 살짝 살짝 딛는다. 발뒷꿈치부터 들어 버선코가 가장 늦게 하늘을 향한다. 발을 땅에 닿은 순간도 발뒷꿈치부터 사뿐 사뿐이다. 점차 빨라진다. 중모리와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 장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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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은 빨라졌지만 선비의 도포자락은 여유있고 품위있게 공간을 휘젓는다. 흥겨움 속에서 기품이 뿜어져 나온다. 학이 날갯짓 하는 것일까? 공중에서 한바퀴를 ‘휙’하니 돌고 내려온다. 가벼운 듯하지만 무거운 춤사위이다. 선비와 하나가 된 휘몰이 장단은 이미 천지를 압도하며 거세게 휘몰아친다. 선비의 표정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굳게 닫은 입술과 짙고 검은 눈썹은 우리 것을 지키는 선비의 고집을 그대로 보여준다.

움직임은 다시 작아졌다. 선비가 숨을 고른다. 덩실덩실 움직였던 어깨는 어느덧 평소의 위엄을 되찾는다. 표정은 부드러워진다. 평상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접었던 합죽선을 크게 피며 얼굴을 부친다. 천천히, 그리고 가볍게 풀밭 위를 걷는다. 하늘을 향해 요염하게 콧대를 세우고 있는 한옥의 처마 끝에 석양의 부드러운 햇살이 살짝 부딪친다. 석양은 선비를 보며 수줍게 작별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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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선비는 권오춘(64) 국어고전연구소 이사장이다. 그는 45살에 ‘무려’ 8가지를 하루아침에 무자르듯 잘라버렸다. 속세의 쾌락과 즐거움을 모두 버렸다. 그것은 술, 담배, 바둑, 골프, 포커, 고스톱, 여자, 텔레비전이었다. 독했다. 그리고 너무도 복잡하고 힘들었던 일상에서 탈출을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사에 들어갔다. 주식투자 붐이 불며 잘나갔다.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토요일 오후 그는 사무실에 남아 밤늦게까지 금고에 뒤죽박죽 정리 안 된 고객원장을 정리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다. 우연히 사무실에 들른 지점장은 그에게 감동했다. 그는 30대에 증권사 지점장이 됐다. 하지만 살얼음판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경북 안동권씨 부정공파 35대손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익혔다.

특전사 공수부대에서 군복무했다. 그러나 ‘스멀스멀’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우리 것’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증권사를 떠났다. 그는 사표를 우편으로 보냈다, 직접 내보니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세와 담을 쌓은 그는 고전의 넓은 바다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공부에 심취하니 건강이 나빠졌다. “하루종일 구부리고 앉아 사서와 경서에 몰두하자 허리가 굳어갔고, 기가 약해졌어요.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지난 2007년부터 선비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량춤’으로도 불리는 선비춤은 옛 선비들이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추던 춤이다. 스승은 영남춤의 명인 운파 박경랑이다. 그는 자신이 2004년 인수해 완성한 30칸짜리 한옥 초은당으로 스승을 불러 춤을 배웠다. 스승의 춤은 경남 교방춤의 맥을 잇고 있다. 선비춤을 추는 남자 선비를 못 찾아 여성 명인에게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엔 이매방류의 춤꾼 최상목에게 배우며 선비춤의 깊이를 더했다. 권 이사장은 2년전 박경랑의 춤 공연에서 기녀들 사이에 정통 한복차림의 의관을 갖추고 선비로 출연해 갈고 닦은 선비춤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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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춤은 건강에 어떤 효과가 있을까? 권 이사장은 우선 체형의 변화를 든다. 선비춤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온몸의 근육과 관절을 좌우로 고루 쓰기에 구부러졌던 몸이 똑바로 펴진다고 한다.

또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춤사위는 단전에서 시작되는 깊은 호흡이 바탕이 되어, 강한 에너지를 온몸에 전달해 준다. 또 끊고 맺음 없이 부드럽고 강하게 이어지는 모든 동작은 기를 모았다가 뿌려주며 온몸의 경혈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백이 있는 상태가 지속되며, 정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이 권 이사장의 설명이다.

권 이사장은 자신의 호를 초은(招隱)으로 짓고, 한옥도 초은당이라고 이름붙였다. 천하의 은자를 불러 그들의 덕과 인품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란다.

중국 요임금 시절 나라를 맡아 운영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허유라는 선비가 이를 거절하고 “뱁새가 숲 속에 지내기는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목을 축이기엔 한 모금의 물이면 족하다”고 말하며 황하 강물에 귀를 씻고 은둔했다는 고사에서 등장하는, 그런 은자를 권 이사장은 그리워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보입니다. 책을 읽다가 선비춤을 추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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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은당을 ‘명품 한옥’으로 가꾸었다. 인간문화재 74호인 최기영 대목장이 박물관 용도로 지은 한옥을 인수한 권 이사장은 칠장 중요무형문화재 11호인 정수화씨에게 부탁해 옻칠을 했다. 마룻바닥은 9번, 기둥은 5번을 칠했고 벽, 문, 외벽에까지 옻칠을 했다. 우리 한옥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다.

 “한옥은 사통팔달의 구조입니다. 마루는 방과 외부 공간을 이어주며 온도와 습도를 조정하는 기막힌 공간입니다. 처마는 비와 눈, 햇빛을 조절해 줍니다. 서양식 아파트는 밀폐된 시멘트 공간입니다.”

다시 권 이사장은 합죽선을 들었다. 두 어깨에 힘이 빠지며 눈이 감긴다. 흰 벚꽃 이파리가 흩날린다. 꽃비다. 그 가운데 선비가 서 있다.

 

 글 이길우 선임기자

동영상 박종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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