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 활동이 지구의 토양과 바다, 대기에 큰 영향을 끼쳐 새로운 지질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지난 15년간 다양한 연구와 조사, 논쟁을 거친 끝에 최근 국제지질학연합이 인류세를 채택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지만, 학계에선 여전히 현대 문명의 이면을 상징하는 용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제지질학연합 집행이사회도 성명에서 “인류세가 공식 지질 명칭으로는 사용되지 않을 것이지만 지구·환경 과학자는 물론 정치·경제계와 대중 사이에선 여전히 인류가 지구 시스템에 가한 충격을 묘사하는 유력한 표현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류세의 지표 화석 후보를 꼽으라면 20세기에 급증한 핵실험에 의한 방사성 낙진, 플라스틱, 닭뼈이지만 이와 함께 전자폐기물도 빼놓을 수 없다. 고소득 국가의 경우 1인당 전기전자제품 장치가 평균 100개가 넘는다. 인류세 주창자들은 방대한 전자폐기물의 대다수가 매립되고 있는 점을 들어, 전자폐기물을 기술화석(Technofossil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최근 발표한 네번째 세계 전자폐기물 실태 보고서(GEM)를 통해 전자제품 폐기물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이 정한 전자폐기물 기준은 플러그나 배터리가 있는 제품이다.

폐기물 증가 속도가 재활용의 5배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전자폐기물 발생량이 6200만톤으로 사상 처음 6000만톤을 넘어섰다. 세계 인구 1인당 7.8kg의 전자제품을 버리고 있는 셈이다.
이는 2010년보다 82% 늘어난 것으로 40톤 트럭 155만대를 채울 분량이다. 보고서는 전자폐기물을 담은 트럭을 지구 적도상에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라고 밝혔다.
태양광 패널처럼 친환경 에너지 소비 목적의 제품도 전자폐기물 발생에 크게 기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에 약 60만톤의 태양광 패널이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전자폐기물은 연 평균 260만톤씩 늘어 2030년에는 전자폐기물이 지금보다 30% 이상 더 늘어난 8200만톤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보고서는 특히 재활용률이 낮은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2022년 전자폐기물의 수거 및 재활용률은 질량 기준으로 4분의 1(22.3%)인 1400만톤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폐기물에 포함된 상당한 가치의 금속이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사장되고 있다. 보고서는 2022년 전자폐기물에 포함된 금속의 가치를 구리 190억달러, 금 150억달러, 철 160억달러를 포함해 모두 910억달러로 추정했다.
보고서는 게다가 현재 전자제품 폐기물의 증가 속도는 수거 및 재활용보다 5배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2010~2022년 폐기물은 연 평균 260만톤, 수거 및 재활용은 연 평균 50만톤씩 증가했다. 이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져 2030년엔 수거 및 재활용 비율이 20%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서는 내다봤다.
보고서는 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요인으로 빠른 기술 발전 속도, 짧아진 제품 수명 주기, 사회의 전자화, 제품 수리 인프라나 문화 미흡, 폐기물 관리 시스템 부재 등을 꼽았다.
보고서 주요 저자인 유엔 교육및조사연구소(UNITAR)의 수석 과학자 키스 발데는 “우리는 값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빨리 처분하며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구입한다”고 말했다.

전자폐기물 회수의 효과는?
보고서는 세계 각국이 2020년까지 전자폐기물 수집 및 재활용 비율을 60%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380억달러(50조5천억원)를 넘어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자폐기물은 인체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은과 같은 독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방치할 경우 건강과 환경에도 위험 요인이다. 전자폐기물에서 방출되는 수은만 해도 한 해 50톤이 넘는다.
보고서는 전자폐기물을 적절하게 수집,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경우 냉매 회수, 금속 채굴량 감소 등을 통해 2022년 기준 9300만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전자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발데 박사는 와이어드에 “기업이 전자폐기물을 수집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사례는 아직 없다”며 이를 보상해주는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또 전자폐기물이 덜 나오게 하는 제품 설계 기준의 중요성도 지적했다. 예컨대 배터리는 일정 횟수의 충전 주기가 지나면 저장 용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이럴 경우 새 휴대폰을 사지 않고 배터리만 교체해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