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임스 마틴, 인류 구원을 자처한 미래학자 미래학자

 jm640.jpg » 제임스 마틴 개인 사이트에 떠 있는 그의 사진. 강연을 즐겨하면서도 수줍은 성격이었던 그의 생전 모습을 함께 보여주려는 듯 반쯤 돌아서서 강연하는 모습을 올려놓았다. jamesmartin.com

 

제임스 마틴 (James Martin, 1933.10.19~2013.6.24)
영국 미래학자

 
인류 위기 해법 모색한 기술예측대가

2045년 새 르네상스 아니면 붕괴 온다

기술을 관리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

 


“숱한 영감, 비범한 지성, 폭넓은 관심, 무한한 에너지, 인류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춘 인물.”
영국의 옥스퍼드마틴스쿨이 지난 6월24일 만 79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미래학자 제임스 마틴 박사의 타계 직후 낸 애도성명의 일부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해외 언론들은 그를 영국 대표 미래학자로 꼽는다. 빌 게이츠는 생전에 그를 영향력 있는 기술 리더라고 칭했다.

그는 컴퓨터 기술 혁명의 전도사였다. IBM의 잘 나가는 컴퓨터 과학자 출신인 그는 자신의 깊고 넓은 컴퓨터 식견을 바탕으로 기술 발전이 펼쳐나갈 미래를 예측해 왔다. 그는 1970년대에 네트워크사회의 도래를 정확히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컴퓨터 전문가로서 그의 별칭은 ‘CASE(컴퓨터지원 시스템 공학)의 아버지’였다. CASE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자동화를 돕는 도구를 말한다. 컴퓨터과학전문지 <컴퓨터 월드>는 창간 25주년 기념호에서 그를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 중 네 번째 인물로 선정했다.

미래학자로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다. "인류가 처한 위험의 원인도 기술에 있지만 해결방안도 기술에 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해갈 기술을 적절히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거나 아니면 붕괴에 직면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미래학자들이 그렇듯 그는 위기보다 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그는 21세기를 좁고 긴 협곡에, 인류를 협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 협곡은 갈수록 좁아진다. 그에 따라 강물의 속도도 빨라진다. 이 강물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이다. 그런데 인류가 협곡의 가장 좁은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경이로운 기술들이 계속 등장해 인류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속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옥스퍼드대학에 1억5천만달러를 기부하고 개인 섬을 사들일 만큼 학자로서는 보기드문 억만장자였다. 이 큰 돈이 어디서 나왔을지에 대한 세간의 관심에 대해, 그는 1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과 수십년에 걸친 세계 순회 강연, 수백개의 교육용 비디오 등을 통해 벌어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연을 하면 책이 팔리고, 책이 팔리면 비디오가 팔리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말년에 미래전문연구대학원인 옥스포드마틴스쿨을 세웠다.

1682519-inline-20130707jamesmartin.jpg » 마틴이 참석한 마지막 행사 `글로벌 미래 2045'.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그가 생전에 참석한 마지막 행사는 지난 6월 뉴욕에서 열린 포럼 ‘글로벌 미래 2045’이었다. 사회변화에서 기술의 역할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참석한 이 포럼에서 발표자로 나선 그는 ‘디지털 진화론’에 대해 강연했다. 진화의 주체가 자연에서 인간, 아니 컴퓨터과학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

“2045년 안팎으로 글로벌 르네상스 또는 붕괴가 있을 것이며 미래에는 테크노크라시(기술에 의한 지배)가 아리스토크라시(귀족정치)를 대체할 것이다.” 그가 생전에 공개석상에서 내놓은 마지막 미래예측이다.

 

 컴퓨터과학 대가의 컴퓨터기술 발전 예측
실리콘칩은 2020년 한계, 이후엔 나노테크로 넘어가 2035년 뇌의 100만배 성능 갖춘다


-컴퓨터 성능의 발전은 계속될 것이다. 18개월마다 컴퓨터 트랜지스터 집적도(성능)이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계속 유효하다. 이를 적용하면 15년마다 1000배씩 증가한다. 실제로 1945년 진공관 컴퓨터는 초당 100회의 연산(플롭스)을 했다. 1960년 아이비엠이 만든 트랜지스터 컴퓨터는 초당 10만플롭스, 1975년엔 1억 플롭스, 1990년 1000억플롭스, 2005년 100조 플롭스에 이르렀으며, 2020년엔 100페타플롭스에 이를 것이다.
-실리콘 칩의 기술 발전 속도는 2020년 무렵 임계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 이후엔 탄소 나노튜브 등의 기술을 보유한 나노테크놀로지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2035년 이후 나노테크놀로지는 3차원 구조를 갖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뇌보다 100만배 강력한 성능의 장비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같지 않은 지능(NHL), 즉 인간의 지능과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한 지능을 갖게 될 것이다. 미래의 로봇은 오늘날 영화에서 보는 인간형 로봇이 아니라 무수한 나노테크놀로지 트랜스폰더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너무 작아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선, 원격 조종될 것이다.

-이 무렵, 즉 21세기 중반에 세계 인구는 89억명까지 늘어날 것이다. 컴퓨터모델을 동원해 예측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이후 서서히 감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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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의 개인사와 경력

숫기없는 소년에서 컴퓨터 기술혁명 전도사로

 

그의 원래 이름은 제임스 토마스 마틴(James Thomas Martin). 영국 버밍엄 북동쪽 ‘애쉬 비 드 라 주크’(Ashby-de-la-Zouch)라는 소도시에서 1933년 10월19일 사무직 노동자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던 그는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 케블 칼리지를 졸업했다. 전공은 물리학이었으나 작문과 철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키프로스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1959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IBM에 취업했다. 그리고 얼마 후 IBM 내부의 싱크탱크인 시스템스 리서치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 복잡한 문제에 대해 신속한 해결책을 내놓는 컴퓨터시스템을 설계하는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비엠에서 그는 세계 최초로 국제 항공 예약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21세기의 의미> 서문에서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 나를 포함한 미국 컴퓨터 과학자 12명과 소련 컴퓨터 과학자 12명은 상호간 연구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비밀 모임을 가졌으나, 두나라 정보기관의 방해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4반세기에 걸친 세계 순회 강연

 

1977년 그는 안식년 휴가중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혁명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이걸로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첫해에만 1백만달러를 벌었다. 그는 곧바로 아이비엠을 뛰쳐나와 회사를 세웠다. 이 때부터 시작한 그의 ‘5일 월드 세미나’는  주제를 글로벌 이슈로 넓혀가며 2001년까지 이어졌다. 컴퓨터과학 실력으로 뒷받침된 그의 세미나는 참가비가 수천달러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의 리더들과 친분을 쌓은 그는 자연스레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비엠을 그만둔 뒤 1981년 런던에 세운 DMW(나중에 JMA로 명칭 변경)를 시작으로 1980년대 이후 몇 개의 IT 컨설팅회사를 세웠다. JMA는 1991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소프트웨어에 주식을 일부 매각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 디자인 기술을 공표하고 실행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DDI를 공동설립하기도 했다. 정보공학 소프트웨어의 업계 리더가 된 이후 DDI는 날리지웨어로 이름이 다시 바뀌었다.
그는 시스템 설계,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 정보공학, 컴퓨터지원 소프트웨어 공학(CASE)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4세대 프로그래밍 언어를 탄생시킨 최초의 멤버중 하나였으며, 고속 응용시스템 개발(RAD) 방법론의 주요 개발자였다. 정보공학(IE)은 정보 시스템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학문이다. 문헌상으로는 1981년 제임스 마틴과 클라이브 핀켈스타인이 쓴 사반트연구소의 <출판정보공학>에 처음 등장한다.

cimage_aada5a9839-thumbb.jpg » 그의 소유인 버뮤다 에이거섬. 앞쪽 큰 건물이 그의 대저택이다. 이 섬은 그가 숨진 뒤 매물로 나왔다. privateislandsonline.com

 

버뮤다군도 외딴 섬으로 홀연히

 

1990년대 이후, 그는 오랜 거주지 맨해튼을 떠나 영국령 버뮤다군도의 에이거섬(17세기 영국 탐험가 겸 투자자 앤서니 에이거 경의 이름을 땀)에 거주해왔다. 그러던 중 1997년 이 섬을 아예 매입했다. 19세기 영국군 기지로 사용됐던 7.5에이커(약 9200평) 크기의 이 작은 섬은 이후 수족관과 어린이 여름캠프로 쓰여 왔다. 마틴은 수년에 걸쳐 수백만달러를 들여 이 섬을 복원하고 새로 단장했다. 그의 대저택은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가져온 300년 된 사원을 사용해 지었다. 이밖에 손님용 숙박시설, 별채, 보트하우스, 회의실도 만들었다. 그는 정원에도 관심이 많아 중국식, 일본식, 이탈리아식 정원과 장미정원을 조성했다. 마틴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섬을 구입하자 사람들이 은둔자가 되려느냐고 물었지만, 과학자 정치인 작가 등 방문객들이 많아 도저히 은둔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마틴은 비교적 조용히 살았지만 이곳에서도 정기적으로 강연 활동을 했다고 한다.

 

마을로 내려가는 대신 마을 위에서


그는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성격도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 그를 인터뷰한 <인디펜던트> 기자는 그의 첫 인상을 “그의 강연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기라성같은 기업 경영자들을 호령했던 사람치고는 놀랍도록 수줍어하는(surprisingly shy) 키 큰 남자였다”고 전했다. 원래 숫기가 없었던 그는 IBM에 있는 동안 대중강연법을 배운 뒤로 무대에서 만큼은 매우 활동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대중과 함께 하기보다는 대중을 가르치려 했던 유형이었다. 그의 아내  릴리안은 그가 숨진 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는 높은 곳에서 영향을 끼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마틴의 전기 '변화의 매개자'

 

51Rmu+fSClL._SY445_.jpg » 마틴 전기 <변화의 매개자> 강연 말고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던 그는 2010년 급작스레 유명 대필작가 앤드류 크로프츠를 섬으로 불러 자신의 전기를 집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크로프츠가 마틴과 나눴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전기는 <체인지 에이전트(변화의 매개자) : 어떻게 멋진 세계를 만들 것인가>(The Change Agent : How to create a wonderful world)라는 제목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로프츠는 마틴 박사가 자신의 전기를 통해 두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첫째는 21세기 중반까지 사회, 경제, 문화적 흐름이 기술 진보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올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마틴 자신과 자신의 독특한 버뮤다 안식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사망 소식은 느닷없이 날아왔다. 2013년 6월24일 에이거섬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 바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 유족으로는 수양딸 라리자니,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난 딸, 다른 세 입양아, 두 손자가 있다. 그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다. 그의 세 번째 아내 릴리안 케이시는 1980년대에 만나 2004년 결혼했다.
그는 생전에 모두 6개 대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왕립연구소 명예종신회원, 세계과학기술아카데미 회원을 지냈다. 1990년대엔 미 국방부 과학자문위원회 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영원한 유산 옥스퍼드마틴스쿨
1억5천만달러 쾌척...학제간 연구로 지구 생존 해법 모색

  
oxfordmartinschool.jpg » 옥스퍼드마틴스쿨 전경. 300여명의 연구원들이 몸담고 있다. jamesmartin.com

억만장자 제임스 마틴이 2005년에 세운 옥스퍼드마틴스쿨은 일종의 미래연구전문대학원이다. 설립 목적은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한 거대 도전과제들을 살피고 이를 해결해 나갈 혁신적 방법을 연구할 과학자와 연구자들을 모으고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옥스퍼드대에 이 학교 설립을 제안하고, 2004년 1억달러를 기부했다. 이후에도 그는 다른 기부자의 기부금액과 1대1 매칭하는 방식을 통해 2010년 5천만달러를 추가 기부했다.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등이 그의 제안에 동참했다. 이로써 그는 900년 역사의 옥스퍼드대에서 개인으로서는 최대 후원자가 됐다.
그는 세계의 문제는 점점 더 복합화해가는데 학계나 정책결정자의 반응은 점점 더 고립화해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분야를 벗어나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왜 하필 옥스퍼드대였을까. 단지 모교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진짜 이유는 학제간, 인문과 과학기술 간 협력연구 풍토가 잘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하버드나 예일, 스탠포드 같은 미국 대학도 생각해 봤으나 미국 대학엔 이런 학제간 연구 풍토가 없었다고 했다.
옥스퍼드마틴스쿨에는 30개의 연구소가 있다. 이들 분야는 크게 보아 건강과 의학, 에너지와 환경, 기술과 사회, 윤리와 거버넌스, 이 네가지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교의 원래 이름은 ‘제임스마틴21세기스쿨’이었으나 2010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2001년 9/11 테러 보고 미래연구학교 설립 결심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마틴은 2001년 뉴욕 9/11 테러를 보고 미래를 연구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나는 갈수록 지구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학교 설립 아이디어의 배경은 이 주제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그리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일반 대학에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그는 결심의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9/11이 발생한 다음날 아침이었죠. 나는 홍콩에서 컴퓨터 관련 회의에 참석한 수천명의 기업 임원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원고를 고쳐쓰고 뉴욕 사건을 설명할 슬라이드쇼를 집어넣었습니다. 강연을 마친 뒤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죠. 나는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는 강연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재차 물었습니다. 마침내 한 청중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죠. IBM이 최근 내놓은 64비트 z/OS 작동 시스템은 라이선스 관리기술을 지원하는데, 이게 중요한 건가요라고 말이죠. 이건 내가 듣고 싶었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세세한 기술산업에서 벗어나 인류 생존이라는 좀더 큰 그림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학교 학장인 이안 골딘 교수는 “옥스퍼드마틴스쿨은 마틴의 인류에 대한 관심, 창의성, 호기심, 낙관주의를 구현하는 곳”이라며 “그의 목표는 21세기의 기회를 수확하고 위험이 현실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옥스퍼드마틴스쿨 설립은 그의 방대한 저작보다도 큰 그의 업적이자 유산일지도 모른다. 그 학교를 통해 인류가 부닥친 거대한 도전과 과제들에 대한 연구결과가 계속해서 나올 것이고. 그 때마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마틴스쿨은 그가 단순한 미래 예측 또는 미래 연구가가 아니라, 해법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미래 행동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요 연구 성과들

인터넷, 모바일폰 시대 도래 예측

1961년부터 104권의 방대한 저작

기술 넘어 지구촌 모든 문제 천착


bookjackets_white.jpg 그는 컴퓨터와 기술이 사회·경제에 미치는 변화와 영향을 주로 연구해 왔다.  1961년부터 시작된 그의 저술 활동은 2007년까지 104권에 걸쳐 이뤄졌다. 방대한 컴퓨터 과학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기술 예측은 매우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던 네트워크 사회 예측서 <선으로 연결된 사회(The Wired Society)>(1977)는 그에게 미래학자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안겨다주었다. 그는 이 책에서 25년 후의 컴퓨터 네트워크(인터넷) 사회를 정확히 예측했다. 또 미래의 전화기는 모바일폰이 될 것이며, 모바일폰은 지금과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호스트로서, 복잡하고 광범위한 정보 네트워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3년 앞서 출판한  <미래의 통신 발전(Future Developments in Telelcomunications)>(1974)에서는 온라인 쇼핑과 24시간 뉴스의 출현을 예상했다.
1987년 출간한 <기술의 도가니(Technology‘s Crucible)>에서는 아랍 테러리스트들과 1998년의 뉴욕 테러공격을 묘사하는 시나리오가 들어 있다.
그는 세계 순회 강연을 펼치면서 미래 연구의 범위를 기후변화에서 인구문제, 식량문제, 하이테크 전쟁, 전염병 등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릴 광범위한 문제들로 점차 폭을 넓혔다.

 

미래 고민의 결정판 '21세기의 의미'

 

06082383.jpg 그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 <21세기의 의미(The Meaning of the 21st Century)>(2006)다. 이 책은 과학적 진보와 급진적 이데올로기가 초래할 ‘극한의 시대’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그는 이 시기를 '21세기 이행'으로 명명하고,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사회는 젊은 세대를 잘 길러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류는 지구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기 전에 이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강조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은 이미 사용 가능하거나 개발 중에 있지만, 폭 넓은 교육과 정치적 의지가 실종된 게 문제라는 것이다. 기후 변화, 인구 과잉, 환경 파괴 같은 세계적인 문제들은 과거의 기술에 의해 악화되었지만 새로운 기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업혁명에 이어 이제 또 다른 혁명, 즉 21세기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산업혁명이 인류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아듯, 21세기 혁명도 인류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이 혁명이 제대로 이뤄지면 지구근 지속가능하고, 잘못된다면 문명은 서서히 도는 갑자기 몰락할 것이다. 미래를 위한 적절한 교통법규를 마련한다면 21세기와 그 다음 세기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굉장한 시기가 될 것이다. 지금 학교에 다니는 세대가 이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대를 이행기 세대라 부른다." 

그는 이 책에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중요한 청사진>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수십년 연구 끝에 낸 자신의 미래 전망과 해법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내용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쉽고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의 주요 내용을 1시간짜리 다큐영화로 만들었다. 그리곤 버뮤다 이웃주민이었던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내레이션을 부탁했다. 아래 영상물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 영상물은 그의 개인 홈페이지(jamesmartin.com)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다.

 

 

 '핵 시대의 전쟁과 평화' 유작으로 남겨

 

그의 마지막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사망 직전에 대량 살상 무기의 가능성과 위험에 관한 책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책의 제목은 <핵 시대의 전쟁과 평화>. 그의 아내 릴리안은 이 책을 조만간 인터넷에 게시하고 무료로 볼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책은 국내에 두권 번역 출판됐다. 첫번째는 사이버기업(원제 cybercorp, 대교출판, 1998)이다. 그의 100번째 저작인 <사이버기업>은 사이버 혁명의 물결 속에 기업의 특성과 역할을 조명한 책이다. 두 번째는 그의 대표저작 <21세기의 의미>인데 한국판에서는 <제임스 마틴의 미래학 강의>(김영사, 2009)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마틴이 제시한 ‘21세기 인류의 도전 과제 17’
인류 진화의 주체는 이제 기술..더 늦기 전에 통제 능력 갖춰야

 
그는 21세기를 깊은 강의 협곡에 비유한다. 인류는 그 강을 뗏목을 타고 내려간다. 협곡은 갈수록 물살은 더욱 빨라지고 이리저리 요동친다. 바로 그때 인류가 발명한 기술은 경이적인 속도로로 이를 가속화한다. 그는 인류가 21세기 협곡의 병목지점에 도달하게 될 향후 수십년 동안 경이로운 기술들이 새롭게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노테크놀로지, 바이오테크놀로지, 초광대역 네트워크, 로봇 공장, 재생의학, 상상을 초월하는 컴퓨터지능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술의 발전을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과거엔 자연에 기반을 둔 진화가 느리게 진행됐지만, 이제는 인간에 기반을 둔 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것. 인간 스스로 진화를 콘트롤할 수 있게 됐다고 본 것이다. 그는 우리 수중에 들어온 진화를 책임감 있게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21세기 이행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술이 더 위험해지기 전에 통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행동을 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행동이란 상황을 관리하는 행동이다. 규칙, 의정서, 행동규범, 문화시설, 통치수단, 조약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는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한 도전과 과제를 17가지로 정리했다. 이 17가지의 도전과 과제는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21세기 이행’을 이뤄간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지구 환경(생태계) 구하기다.

21세기 이행은 지구 파괴 단계에서 치료 단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파괴된 오존층을 복구하고, 물 사용을 지속가능하게 하고, 산림 훼손을 중단하고, 토양을 되살리고, 식량안보를 달성해야 한다. 그런 변화는 21세기 초에, 지구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인류는 슈퍼컴퓨터와 연결된 정보를 통해 지구를 더 잘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 
2번째는 빈곤 해소 문제다.

부유한 나라는 더 부유해지고, 수십억 인구는 극단적 빈곤에 허덕인다. 극단적 빈곤의 제거는 우리 시대의 도덕적 과제다. 21세기 끝날 즈음엔 모든 사람이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꾸준히 바꿔나가야 한다. 모든 국가가 일정 수준의 문해율과 고용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제프리 삭스는 <빈곤의 종말>(2005)에서 세계 빈곤을 해소하는 9단계를 제시했다. 그 9단계는 과제의 다짐, 행동계획 수립, 빈곤층 목소리 경청, 미국의 역할 복원,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구제, 유엔 강화, 글로벌 과학 활용, 지속가능한 개발 촉진, 개인적 노력이다.

3번째는 인구 증가세의 완화다.

지구상의 극단적 빈곤은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관련이 있다. 세계 인구는 머지 않아 25억명가량 늘어날 것이다. 그 대부분은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없는 나라들에서 일어난다.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출생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모든 여성이 글을 읽을 줄 알고 여성해방이 이뤄진 나라들에서는 확실히 출생률이 떨어진다. 생활방식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는 인구증가를 낮추겠다는 목표와 같다.

4번째는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의 달성이다.

21세기에는 거의 90억에 가까운 대다수 인구가 풍요를 누리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생활방식으로는 곤란하다.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 질높은 생활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5번째는 전면 전쟁의 예방이다.

21세기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경제적, 정치적 이익이 전면전의 위험을 정당화할 수 없다. 21세기는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거나 아니면 전면전으로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6번째는 세계화의 효과적인 관리다. 세계화는 한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이 번성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7번째는 생물권 보호 문제다. 많은 생물종이 놀라운 속도로 멸종해가고 있다. 이는 이들의 유전자 정보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멸종 위기종들의 서식지를 보존해야 한다. 오늘날 식용 가능한 물고기의 90%가 이미 잡혔다. 파괴된 바다 생태계를 회복시켜야 한다. 생산성 증대를 위한 녹색혁명, 그리고 유전자 재조합 작물은 생물권에 또다른 위협이다. 녹색혁명은 식량 증산엔 기여했지만 생물 다양성을 파괴했다. 생물권에 대한 지구적 관리가 필요하다.

8번째는 테러 방지 문제다.

테러 시대의 서막은 점차 비용이 저렴해질 대량파괴 무기의 확산과 때를 같이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해야 한다. 핵물질의 보관과 관리를 철저히 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테러리스가 되는 근본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문화권 사이의 존중과 협력을 이뤄내 적대적인 감정이 발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상대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9번째는 창조성의 증진이다.

기술은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창조성 시대를 열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화간 개방이 이뤄지고, 특히 부유한 나라들이 지구상의 젊은이들이 유능한 기업가가 될 수 있도록 지도하고 받아주고 인정해줘야 한다.

10번째는 질병 정복이다.

유행병이 창궐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그러한 질병은 테러 수단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준비는 되지 않았다. 일반 실험실에서도 유전자 재조합을 통해 새로운 병원균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문제는 인류가 거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것. 자연의 보호 메카니즘으로는 그러한 새로운 병원균에 대응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적절한 방어책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11번째는 인간의 잠재력 증진이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의 학습 능력은 디지털 미디어에 으해, 그 다음은 컴퓨터화한 도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개조를 통해 가속화할 것이다.

12번째는 특이점(singularity)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뒤 인간의 지능과는 완전히 다른 컴퓨터 지능이 개발돼 엄청난 속도로 스스로 지능화해 갈 것이다. 이 컴퓨터 지능의 연쇄 반응이 바로 특이점이다. 인류는 완전히 통제 불가능하고 해로울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피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 인간의 통제 범위 내에서 작동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컴퓨터 하드웨어에 대한 기술적 통제가 필요하다.

13번째는 실존 위험의 직면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를 멸종시킬 사건들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 존재의 위험이다. 21세기는 그 최초의 세기다. 마틴 리즈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2004)이란 책에서 그런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금세기에 인류의 50%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위험에서 살아남는다면 금세기말쯤 인류가 성취할 것들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다.

14번째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추구다.

21세기 안에 인간은 자신을 급진적으로 개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인공 기관을 장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놀라울 정도로 바꿀 것이다. 이는 윤리적 논쟁을 야기할 것이다.

15번째는 발전된 문명의 설계다.

조만간 기계가 인간이 하던 대부분의 일을 대신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가 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연극 미술 엔터테인먼트를 꽃피울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말에 들장할 거대한 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트랜스휴머니즘과 특이점으로 인해 그것은 생각보다 극단적인 형태를 띨 것이다.

16번째는 지구 시스템(가이아) 모델 만들기다.

지구 메카니즘을 측정하고 모델화할 수 있는 지구시스템과학이 연구돼야 한다. 인류는 가이아에 문제가 생길 경우 그것이 초래할 가공할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가이아와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인간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과학을 정립해야 한다.

17번째 과제는 기술과 지혜의 간극 메우기다.

과학과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현명하지 못하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합해야 한다. 지금 기술과 지혜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 기술이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들이 성찰하기보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다.

 

##딸과 춤추는 마틴.
결혼식서 딸과춤.jpeg » 2004년 그의 세번째 부인 릴리안과의 결혼식에서 딸과 함께 춤을 추는 제임스 마틴. 그는 자신의 딸이 재산을 학교설립에 쓰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indepedent.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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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한겨레신문 선임기자. 미래의 창을 여는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 곳간. 오늘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찾고, 선호하는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광고, 비속어, 욕설 등이 포함된 댓글 등은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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