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같은 아이, 아이 닮은 인형 생생육아
2015.09.12 10:33 Edit
“아이구, 꼭 인형 같이 생겼네! 예뻐라!” 흔히 예쁜 아이들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얼굴로 보나, 어릴 적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나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나는 아기 때에도 ‘예쁘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좀 큰 뒤에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작은 눈, 낮은 코, 특징 없는 입, 어디 하나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데가 없는 생김의 소유자로서 외모가 예쁘단 말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특별히 예뻐 보이고 싶단 생각은 해 본적 없다. 웬 근거 없는 자신감인진 몰라도, 나는 그저 내 모습 그대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 요즘 흔하게들 하는 쌍꺼풀 수술은커녕 남들 다 하는 화장도 한 번 제대로 배워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예뻐지기 위해’ 애쓴다는 사람들의 그 욕구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자존감이 너무 낮은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신체 외양이 좀 다른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직간접적으로 느끼면서 새삼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예쁜’ 것들에 둘러싸여 자라는 아이들이라면, 늘씬하고 눈이 큰 인형을 갖고 놀며 그 인형에 비유되고 인형과 비교 당하며 자라는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예쁜 외모를 더 원할 것이다. 선명하고 화려한 색깔로 포장된, 커다란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장난감에 둘러싸여 자라는 아이들일수록 덜 선명하고 덜 화려한,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떨어지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가치관, 그런 문화가 아이들 세계에 깊숙이 뿌리내릴수록 아이들은 사람의 외모를 ‘예쁨’과 ‘안 예쁨’으로 구분하고, 예쁜 것은 좋은 것이고 예쁘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라는 잘못된 가치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장애나 질병으로 인해 좀 다른 외모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이런 잘못된 가치판단에 근거해 자기 자신을 평가하게 되어 큰 문제가 된다. 사람의 외모는 사람마다 다르며, 그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손쉽게 쥐어주게 되는 장난감, 책, 영상물에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지 않을까.
몇몇 나라에서는 이제라도 조금씩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예전 글에 쓴 것처럼, 이곳 미국에서는 아이 그림책과 영상물에 휠체어를 타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꼭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배려해서 혹은 배려하기 위해서 그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 넣는다기 보다는, 겉모습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느낌이 강하다. 부모들이 보는 잡지에 장애 아동들이 표지모델로 나오고, 엄마 모임에 장애아동 지원센터 사람들이 나와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의아해하는 내게 주변의 여러 미국인들이 “이삼십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거다”라고 하는 걸 보면, 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건 비교적 최근인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에 <미의 신화>(Beauty Myth)라는 책에서 나오미 울프(Naomi Wolf)가 지적한 ‘외모지상주의’ 미국 사회의 여러 단면들이 현재 한국 사회와 거의 같은 수준인 걸 보면, 미국 사회도 2,30년 전엔 크게 다르지 않았고, 또 그렇기에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다. 제도와 문화가 함께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영국의 한 인형 제작업체가 내놓은 인형들이 특히 우리 미국 KT 서포트그룹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회사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아이, 청각장애로 인공와우(cochlear)를 장착한 아이, 그리고 얼굴에 붉은 얼룩을 갖고 있는 아이를 인형으로 구현했다. 이 인형들은 “나 같은 인형”(Toy Like Me)이라는 한 민간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는데,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철저히 비장애인 세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예쁘고 화려한 인물로만 구성된 장난감만이 제공되는 지금과 같은 구도의 장난감 산업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간혹 다리가 부러진 남자 아이를 나타낸 인형이나 휠체어를 탄 노인 남성을 나타낸 인형이 있긴 하지만 그런 구성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성차와 연령에 따른 편견을 조장하기도 하고, 선천성 장애와 질병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장난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 이 프로젝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mymakie.com/campaign/toylikeme/>
이 인형들 중에서 특히 세 번째, 얼굴에 붉은 얼룩을 갖고 있는 인형이 우리 KT 서포트 그룹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클리펠 트리나니 증후군의 세 가지 특징 중 하나가 ‘포트와인스테인’이라고 불리는 포도주빛 얼룩이기 때문이다. KT 환자들 중에서도 상체, 특히 얼굴에 이 포도주빛 얼룩이 있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지만 대부분의 환자가 몸 어딘가에 반드시 이 얼룩을 갖고 있다. 우리 아이처럼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 무릎, 발등에 있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팔과 어깨, 손등에 갖고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온 몸 군데군데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특히 이런 인형이 우리 KT 아이들에겐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인형을 보며, 나는 J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J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태어난 지 몇 개월만에 미국으로 입양되어 왔다. 아이는 KT를 가지고 태어났고, KT 중에서도 드문, 전신에 걸쳐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였다. J는 얼굴 일부에도 포도주빛 얼룩이 선명하게 져 있었는데, 얼굴 부위의 얼룩은 다리와 다르게 레이저 시술로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한지라 지금은 얼굴의 얼룩이 많이 사라졌다. 얼룩이 있을 때나, 많이 옅어진 지금이나 J는 부모와 형제, 이웃들로부터 듬뿍 사랑 받고 예쁨 받으며 환한 웃음을 안고 자라고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때마다 J가 이곳으로 온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얼굴에 얼룩을 갖고 태어난 여자 아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비록 친부모, 친형제는 아니지만 이 곳에서 좀 더 존중 받고 사랑 받으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한국 땅에 남겨져 힘들게 사는 것보다 나았으리라. 장애와 질병으로 인해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열등한 존재로 낙인 찍히고, ‘끼리끼리 살라’거나 ‘몸이 불편하면 나다니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으라’는 폭언을 수시로 들어야 하는 곳에서는 J도 케이티도 분명 이만큼 웃으며 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다른 생김을 갖고 태어난, 모두 다른 능력을 갖고 살아가게 될 아이들에게 예쁘고 늘씬한 인형, 멋진 체격과 용모를 갖춘 인형만을 쥐어주는 건 어떤 아이들을 배제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아이들을 특정하게 구획지어진 세계 속에 가두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 갖고 노는 장난감에서부터 그런 구획과 경계가 뚜렷한 세계를 경험하는 아이들이 과연 자라서 그 바깥의 다른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될까? 아니, 지금까지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이들 역시 비장애인 중심의,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스스로를 압박하고 비교하느라 고통 받는 동시에 주류 바깥의 다른 이들의 세계에는 무관심해질 것이다. 다문화가정이 늘고, 여러 가지 불가해한 이유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는 한, 우리 아이들도 어릴 적부터 다양한 삶의 모습, 다양한 조건,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보는 책,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에 대해 한번쯤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 보아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은 ‘인형 같이 예쁜 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닮은 인형’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