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마더링’에서 소셜의 의미 생생육아

남편이 한국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참담한 뉴스 한 토막을 접했다. 혼자 아이를 출산한 한 여성이 아이의 시신을 택배로 친정에 보낸 일이었다. 이 여성은 지방에서 혼자 서울에 올라와 포장마차 일을 하며 고시원에서 머물면서 혼자 출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저러한 개인적인 사정을 다 떠나서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여성이 출산 당일 밤에도 포장마차에서 일을 했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죽은 뒤 며칠까지도 일을 하다 결국 포장마차로 찾아 온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임신과 출산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여성이 임신 초기, 중기, 후기를 겪으며 얼마나 많은 신체적/정서적 변화를 감내해야 하는지를. 그런 이유로 아이를 태내에서 건강히 키워내려면 엄마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때 적절한 검사도 이뤄져야 하고, 출산 이후 아이를 키울 물리적, 정신적 준비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남편도 다른 가족도 없이 홀로 생계를 감당하며 임신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엄마와 아이 모두 건강하기 어려울 것이 당연하다. 설혹 아이가 건강히 태어난다 하더라도 매일 벌이를 위해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엄마가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워낼 수 있을까. 일하느라, 돈이 없어서 병원 한 번 못 가보았을 이 엄마가 임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키울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임신을 피했어야 한다는 말은, 이 상황에선 완전히 가당찮은 말이다. 우리는 이 여성이 어떤 연유로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굳이 그걸 캐낼 필요도 그럴 권리도 없다. 게다가 세상에 언제나 100% 확실한 피임법이란 건 없고, 키울 능력이 없으면, 즉 신체적, 경제적, 정신적 능력이 제한적이면 임신해선 안 된다는 말만큼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말도 없다. 분명한 건, 이 엄마에겐 (많은 경우 불법임에도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임신 종결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선택이란 대부분 의 문제이고, 이것은 임신/출산과 관련된 모든 선택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시원 월세도, 통신비도 낼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임신 종결은, 임신 유지보다도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일이다.

 

이번 경우와 비슷한 사례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매해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기되는 아이들의 수는 줄지 않고 있고, 그런 아이들의 다수가 여전히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최근 몇 해 사이에 많이 알려진 서울 모처의 베이비박스도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건 무책임한 개인의 패륜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버거운 현실 속에서 피치 못하게 임신/출산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런 일들에 대해 개인의 책임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특히 여성 당사자들에게 그 짐을 떠넘기고 있고, 이런 문제를 조금이나마 사회적으로 해소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조차도 시장 논리, 개인 윤리 문제를 구실로 발목 잡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성남시의 무상공공산후조리원 설치 움직임에 대한 반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선택권이란 것을 가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조리원 뿐 아니라 의료기관과 보육시설 등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무상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서 없는 형편에 아이를 낳아 비교적 수월하게 키워내고 있는 데는 지난 번 글에 쓴 것처럼 이웃/친구들의 도움이 크지만, 그보다 더 큰 도움은 사실 정부/지역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보조 프로그램들로부터 받고 있다. 피임을 한다고 했는데도 덜컥 임신이 되었을 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무료 임신 검사/상담실이 지척에 있었기에 겁내지 않고 문을 두드릴 수 있었고, 저소득 가정에 대해 의료비를 대폭 삭감해주는 병원 내 재정지원 프로그램 덕분에 출산 비용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대학병원 정기검진을 줄줄이 다녀도 돈 걱정 전혀 없이 필요한 만큼 병원엘 다닐 수 있는 것도 저소득 가정에 제공해주는 특수 보험 프로그램 덕분이다. 먼 거리에 있는 병원에 다녀야 하는 우리에게 정부에서 보조해 주는 교통편 무상 지원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우리의 발이 되어주고 있고, 아이가 먹을 우유와 과일을 살 수 있도록 쿠폰을 발행해 주는 프로그램 역시 우리 아이를 먹여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종교 단체, 시민 사회 단체 등 동네 각종 단체에서 수시로 제공하는 아기용품 바자회, 무료 교육 프로그램, 동네 엄마들 모임에서 제공하는 밥 한끼까지, 나는 이 모든 게 소셜 마더링의 일부라고 본다.    

 

소셜 마더링, 이라고 했을 때 마더링은 생물학적 엄마로서의 역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이를 정성껏 돌보고 보살피고 먹여 살리는 엄마처럼, 사회/경제적 취약계층, 특히 그 안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보살피고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마더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개인 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 정부 정책을 통해서 다 함께 제공해야 하는 무엇이다. 선택권이라는, 형평성이라는 그럴싸한 말로는 다 따질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층위가 얽혀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엄마역할은 따뜻하고 선한 이웃이나 좋은 친구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관심이나 노력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 ‘사회적인이라는 말과 양육이라는 말, 언뜻 보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단어가 결합되었을 때 이것이 진정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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