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생육아

지난 연말, 행정자치부가 전국의 가임기 여성수를 표시해 순위를 매긴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발표했다가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해당 웹사이트를 닫았다. 행자부 측에서는 지자체별 출산 관련 통계와 출산지원 서비스 내역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정보도 함께 담았고 출산 지도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고 항변했지만, 이 사태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적 성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어째서 특정 나이대의 모든 여성들을 가임기 여성즉 잠재적/의무적 임신/출산 기계(도구)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그 대목만 놓고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어째서 여성 혐오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가임기 여성일 필요는 없다. 한 자리까지 꼼꼼히 세어 놓은 전국 가임기 여성 숫자 뒤에는 숫자가 말해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철저히 가려져 있다.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 많은 여성들 중 누군가는 결혼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결혼하지 않기를 원한다. 결혼을 했지만 임신은 거부하는 여성도 있고, 결혼은 원치 않지만 아이를 갖기 원하는 여성도 있으며, 원치 않은 임신/출산을 겪는 여성들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는 결혼, 임신, 출산, 육아, 그 모든 것을 원해도 여성 본인이나 가족의 장애나 질병 여부, 직장 상황, 가계 경제, 그 외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들이 있다. 그 뿐인가,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마음으로는 둘째, 셋째를 원해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포기하는 여성들도 있고, 비혼/미혼과 이혼의 결과로 혼자 아이를 기르는 여성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 여성들을 가임기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내놓음으로써 국가는 그 많은 사정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들에게 무조건 임신/출산을 강요하고, 이 나라의 출산률 저하 원인은 결국 여성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저출산 추세 때문에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면, 아이를 갖기 원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혹은 주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지 모든 여성을 임신/출산 기계로 간주하고 동네마다 경쟁을 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행자부에서 변명으로 삼은, ‘지자체별 출산지원 서비스 정보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찾아보니 현재 지자체별 임신/출산/육아 관련 지원 내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단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런 지원들이 아이를 낳은 여성에 대한 한시적인 금전적, 물질적 보상으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임신을 하면, 출산을 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해 주겠다, 하는 식으로 짜여진 현재의 지원 체계 속에는 여성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고민, 여성에 대한 존중,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배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철학 그 어느 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전국 가임기 여성의 숫자를 세어 지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이뤄져야 할 것은 임신/출산을 원하는 여성들이 임신 준비 단계에서부터 직면하는 다양한 어려움을 함께 짊어질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여성 노동자의 임신/출산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특정 직군의 과도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 휴직 시 수반되는 가계 소득의 문제, 경력 단절 문제에 대한 고민은 물론이고, 여성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임신, 출산, 산후조리를 준비할 수 있는 의료 시설과 사회적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출산/육아 휴직을 장려하고 낙태를 금지하고 버스와 지하철에 분홍색 의자 하나 마련하는 걸로 그런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하고 남녀 소득격차를 줄이려는 국가적 노력이 있어야 하고, 출산/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재취업 지원 역시 필요하다. 또한 고심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려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미혼/비혼모/이혼 여성들에 대한 안전하고 편견 없는 지원 대책 없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사는 여성과 아이만을 위해 제공되는 지원은 또 다른 배제와 차별, 무관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총체적이고 세심한 배려 역시 필요하다. 전국의 국공립어린이집 / 직장 어린이집 분포를 파악해 어느 지역, 어느 기업이 저렴하고 편리하며 질 높은 양육보조를 제공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가임기 여성 숫자를 세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전국의 어린이집 운영 현황과 이용 실태를 파악해 양질의 보육교사들이 투입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교사 처우 개선과 교육을 보장하면서 여성들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또 역시 여성인 보육교사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보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친정/시댁 어머니의 보조로 겨우 아이들 등/하원 시간을 맞춰내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죄책감 덜어주기, 아픈 아이들의 치료/재활을 위한 아동 전문병원 현황을 파악하고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합의 이뤄내기, 장애가 있는 아이들, 저소득 가정 아이들, 한부모 아이들, 조손가정 아이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보육환경 만들기. 이런 것들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 태어날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아이들이 자라 아동, 청소년, 성인기를 거치며 무탈하게 건강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우리 사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OECD 국가 중 아동 행복지수가 30위인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아이들에게 큰 죄를 짓는 일 아닐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 나라는 이번 생엔 망한 것 같다. 보건복지부에서 만들고 관리한다는 임신육아종합 포털아이사랑(http://www.childcare.go.kr/)을 탈탈 털어보았더니 여성, 아이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물론이고 그렇게 중요하다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철학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 웹사이트를 가만히 따라 읽어보면 임신/출산/육아는 여성만의 일이고, 소중한 건 태아이지 여성도 아이도 아니다. 임신/출산/육아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성스러운 일이어서, 국가는 대한민국의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열 달 동안 태교 계획을 세우고’ ‘예쁜 아기 사진으로 집안을 장식해 아침마다 명상을 하고’ ‘허브차를 마시며 태담을 나누면서 출산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임신한 10대 여성에게 지원금을 줄 테니 부모님께 말하고 출산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출산 이후의 일은 아몰랑이지만 출생아 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니 일단 낳기나 하라고 돈을 쥐어주며 종용하는 국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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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순산을 위한 D-30이라는 항목에는 아내가 없어도 (남편이) 당황하지 않도록 주요 생필품이 있는 자리에 메모를 해서 붙여놓으라, 아주 구체적이고 친절한 내조법도 들어 있다. ‘산후관리항목에는 출산 직후 여성들에게 불어 닥치는 육아전쟁 따위는 모른다는 듯 끼니를 거르지 말고, 혼자 먹을 때도 예쁜 그릇에 담아 분위기 있는 식탁에서 천천히 먹어야 몸매관리를 할 수 있다고 알려주기도 한다. 육아항목에는 아빠 육아라는 소항목을 따로 달아 육아는 여성의 일이고 남성은 거들 뿐이라는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임신/출산/육아에 대한 현실감도 존중도 배려도 철학도 없는 상황이니 가임기 여성지도같은 것이 탄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1 20, 혐오와 차별, 배제를 바탕으로 미국 리더십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 트럼프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미국 전역에서는 물론이고 그에 연대하는 세계 각지 여성들의 행진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문제, 그러나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이 여성 차별과 혐오와 배제의 국가적 수사에 대응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이 일에 여성인 우리가,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우리 엄마들이 나서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특히 우리 딸들에게 미래는 없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숫자만을 따지는 세상 속에, 여성의 임신 가능 여부만을 따지는 세상 속에,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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