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책] 한 아이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제일 처음 발 들이기 시작한 곳은 동네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지하에 있는 서고에 들어가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증품들을 분류하는 자원활동을 했지요. 웬만해선 물건을 버리지 않는 습성이 단체로 들기라도 한 것인지, 이곳 사람들은 오래된 책, 잡지, 비디오 테이프, 퍼즐 등 먼지 잔뜩 앉은 오래된 물건들을 도서관에 기증합니다. 그러면 사서들과 도서관 자원활동가들이 그 물건들을 받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귀한 책은 도서관 서가로 올려보내고, 비교적 깨끗한 신간이지만 복본이 있는 경우는 계절마다 여는 도서관 책 장터에 내보낼 준비를 하지요. 이렇게 저렇게 섞여 들어온 책갈피, 엽서, 뱃지 같은 소소한 물품들도 한데 묶어 둡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우연히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한 아이>라는 책은 지하서고에서 만난, 제 마음에 쏙 드는 첫 그림책이었습니다. 아직 아이를 갖기 전이던 그때, 처음 이 책을 집어 들고 넘겨다 보게 된 건 책 표지에 그려진 기린의 얼굴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동물 중에서 기린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내용이 진지합니다. 한 아이가 조금씩 혼자 해 나가는 일이 어느새 세상을 바꾸는 물결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책이거든요. 어쩌면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활동가로 살고 싶다는, 조금은 모호한 꿈이 제게 생기기 시작한 것이.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이 책을 한 번 읽고, 다시 한번 천천히 읽고, 세 번째 읽었을 때, 이 책은 제게 인생의 그림책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하서고에서 함께 일하던 베테랑 자원활동가 할머니께 슬쩍 부탁했지요. 할머니는 흔쾌히 그래, 가져가.” 하고 허락해주었고, 그때부터 이 책은 때로는 아이 책꽂이에, 때로는 저의 책꽂이에 섞여 들며 우리 세 식구의 공간에 자리 잡았습니다.

 

책을 직접 읽으실 수 있게 소개하려고 했는데, 찾아보니 이 책,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원서로도 책이 거의 남아 있지 않네요. 출판된 지 제법 시일이 지난 책인데다 덜 알려진 호주 작가의 책이어서 그런가봐요. ..그렇다고 쓰던 글을 지울 순 없고... 그냥 제가, 간단히 요약을 해야겠군요.

 

한 아이가 망가져가는 주변 세계를 보며 고민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 아이는 고민 끝에 혼잣말을 읊조립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것 같아.”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조금씩 해 나가는 일이란 처음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걸어서 학교에 가기, 공터에 묘목심기, 거리에 떨어진 쓰레기 줍기 같은 사소한 것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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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가 그린 당근 텃밭함께 나누는 모두의 텃밭이라면 더 좋겠죠?>


이 아이가 하는 사소한 행위를 그려 보이는 작은 퍼즐 조각 주변엔 먼지 자욱한 도시의 모습, 갖가지 폐기물이 넘쳐나는 거리의 모습이 온통 시커멓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망가져 가는 바다를 살리기 위해 글을 쓰고, 파란 하늘을 되찾기 위해 노래합니다. 죽어가는 동물들을 위해 행진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도 하지요. 한 사람이, 그것도 몸집도 발자국도 작기만 한 아이, 걸어서 학교에 간다고, 쓰레기를 줍는다고, 글을 쓰고 연설을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요?

 

아닐거라고요?

 

그럼, 세상 모든 아이가 함께 한다면, 어떨까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세상 모든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학교에 가고, 나무를 심고, 쓰레기를 줍고, 거리에 나와 행진을 하고, 글을 쓰고, 말하는 장면을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그 연대의 행진을요. 책 속에서, 아이는 눈을 감고, 턱을 괴고, 상상합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그 모든 일들을 함께 해 나가는 모습을 말이죠.

 

그 아이들이 자라 다음 세대 아이들을 기를 때쯤엔, 세상이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모두가 파란 하늘과 보드라운 흙이 맞닿는 곳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책 맨 마지막 장, 아이가 눈을 감고 그런 세상을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존 레논도 그랬잖아요. “사람들은 내게 몽상가라 말할 지 모르지만, 난 혼자가 아니야(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라고요. “언젠가 당신도 나와 함께 했으면, 그래서 세상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고요.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일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쩐지 미안해집니다.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중요하고 안타까운 일들 투성이인데, 우리는 각자 먹고 살기에도 바쁜 나날들을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하루쯤, 한 두 시간쯤 내 일 제쳐두고 나와 피켓을 들고 홀로 거리에 설 수 있는 용기. 그렇게 거리에 나와 선 누군가를 알아보고, 그의 이야기를 청해 듣고, 그의 곁에 잠시라도 설 수 있는 용기. 그런 걸 가진 사람이고 싶습니다. 언젠가 아이 손을 잡고 나설 그 거리에서, 같은 상상을 하며 거리에 나선 다른 이들을 하나, 둘 더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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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에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 그래서 인생의 책이라 할 만한 그림책이 있나요?

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무심결에 들었다가 푹 빠져버린, 그런 책 혹시 없나요?

있다면, 함께 나눠요. 제목과 작가 이름, 간단한 사연을 댓글로 써 주세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 그림책 하나씩 꺼내어 놓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조금 더 환하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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