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걸고 들어가나, ‘문 없는 문’으로 나온다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의 수련일기/안거(安居)

 
 부시시 덜 깬 눈을 비비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개울로 향했다. 아직 이른 새벽 시간인가, 사위를 분간키 어렵다. 여린 솜털 같은 안개비가 얼굴과 어깨의 살갗에 내려앉는다. 흐린 어둠을 뚫고 찾아든 새벽의 미명이 아직 힘에 겨운가, 사내의 기침이 예정된 시간보다 이른 속내라 더 그런가. 덜 뜨인 두 눈에 지각되지 못한 촉촉한 느낌이 눈꺼풀에 와 닿는다. 습지군, 습지의 느낌이 이럴 것이다. 습지가 무너지면 생태계도 없어. 개울가에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다. 웬일이야, 새벽부터 이 친구가, 이른 시각 사내의 발길을 맞아들이는 바위들도 영문을 모른 채 제 미끈한 허벅지를 내민다. 조심혀, 미끄러지지 않도록. 사내는 머리끈을 풀어 손목에 감고서 대뜸 목을 늘어뜨려 물속을 가늠해본다. 상고시대의 청동의 거울에 얼굴을 들이미는 느낌이 이랬을까. 보일 듯 말 듯 미명에 비추인 개여울의 물속을 한손으로 짚어본다. 깊이가..... 이 정도면 되겠지. 이른 새벽의 시냇물에 첨벙. 머리카락이 먼저인지 머리가 먼저인지. 됐다. 긴 머리카락을 박박 비벼 감는다. 하아, 얼마만인가. 청량한 숲의 기운이 머릿속까지 파고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문득, 귓전에 날아든 벌레들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깨운다.
 
 안거의 시간은 이렇듯 산정으로부터 골짜기의 인연을 타고 흘러온 시냇물에 몸을 씻고, 새들의 쾌쾌청청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시작한다. 개여울에 머리감고 미역 감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린 다음엔, 밤새 새 소식을 들고 달려온 시냇물을 한주전자 길어와 찻주전자에 붓고 끓인다. 주전자에 물 끓는 소리가 그새 몇 평 남짓한 방안 공기를 데운다. 유리창 밖으론 성하를 맞은 청록의 가지와 잎사귀들이 제 생명의 빛깔로 반짝인다. 앞쪽 벽면에 시선이 머물고... 거기 써 붙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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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훈완에 찻잎을 적당히 넣고, 익숙한 솜씨로 펄펄 끓는 주전자의 물을 기울여 붓는 사내의 입가엔 득의의 미소가 번진다. 그릇이 차지 않도록 붓는 게 요령이지. 십몇 년을 한결같이 해온 이력이 묻어나는 듯, 끓는 물을 그릇에 붓자 찻잎이 그 안에서 동동 뜨며 풀어진다. 제 몸 가득 품어온 향기를 뜨거운 물속에 다 내어놓으려는 듯, 찻잎은 끓는 물속에서 두둥실 자맥질을 하며 어지러이 몇 바퀴를 돈다. 그예 정신을 잃고 바닥에 가라앉는다. 가만히 물빛을 응시하던 눈길이 걷힌다. 이제 되었다는 듯 사내는 그릇에 얼굴을 묻고 너른 수건으로 감싸 안는다.
 
  차향은 뜨거운 훈증을 타고 그릇에 묻힌 낯바닥의 모공들을 건드린다. 차훈완으로부터 올라온 훈증이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감에 따라, 안면에 거미줄처럼 박혀있는 경혈락맥(經穴絡脈)들이 열리고, 열과 습과 향이 한데 어울린 차의 훈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내가 드러낸 민낯의 열린 숨구멍들을 타고 안팎을 출입하기 시작한다. 한편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훈증과 낯바닥의 경혈 마디마디를 통해 들어온 열기, 그리고 목구멍을 통해 위장에 흡수해들어온 찻물은 제각각의 숨길과 물길과 핏길을 타고 돌면서 전신을 훑어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양생의 문으로 손짓하는 도인(導引)의 숨결을 타고 안팎과 상하좌우를 빈틈없이 오르내린다.    
  
  고요한 가운데 세미한 각성의 기운을 타고 놀다 보면 알 수 없는 희열감에 젖어들 때가 있다. 나아가 그 희열감조차 한발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주시의 눈길에 이르러선, ‘참나’란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주시를 주시하는, 이 평온한 눈길은 누구의 것인가?
 
  안거(安居). 집중 수행을 이르는 뜻으로 절집에서 주로 쓰는 말이다. 절집의 스님들이 여름과 겨울, 두 차례 ‘편안히 거한다’는 의미로 쓰니, 하안거와 동안거가 그런 의미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 경우엔 ‘안심(安心)’이 귀의처가 될 것이다.
 
  도가에선 ‘폐관(閉關)’이라는 말을 쓴다. 오관(五官), 즉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다섯 감각의 문을 닫고 소기의 집중 수련에 오로지한다. 노자의 말로 하면, ‘그 감각의 구멍을 막고(塞其兌), 그 욕망의 문을 닫는다(閉其門)’. 모든 외부의 것과 접촉을 끊고, 자신만의 거처에서 홀로 거하며, 혼연(渾然)한 상태에서 기를 오로지하여(專氣), 득공(得功), 득력(得力), 득심(得心)한다. 득일(得一)한다.
 
  사실 사내가 좋아했던 말은 도가 전통에서 나온 ‘득공’이나 ‘폐관’이란 말이겠다. 기한을 정해놓고 몰두해서 수련하는 일에는 집중력이 관건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밖의 일과 관계들을 단절해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폐관이고 안거다. 처음엔 자신의 의지로 들어가기 때문에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나, 결정적인 지점에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맡기니 무위법(無爲法)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거의 조건
 
 고기를 먹고 안 먹고는 중요치 않다. 필요하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명상을 위주로 하는 안거의 경우라면 당연하게도 채식을 본위로 하면서, 하루 세끼를 다 챙겨먹을 이유가 없게 된다(1식이나 2식이 이 경우엔 제격일 것이다). 물리적 활동량이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성의 소통을 위해선 채식이 그만큼 더 좋은 것도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그런데 태극권과 같은 육체적 노력을 요하는 수련에 이르러선 사정이 달라진다. 중국의 종남산과 아미산 등지에서 살 때는 음식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당연 음식에 관한 철학이나 신념을 넘어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식단 위주로 먹었다. 입맛에 맞는 중국 음식도 그닥 흔치는 않은지라, 운 좋게 맛난 음식을 만나면 그것으로 족하였다. 모처럼 기회가 되면, 태극권 수련에 좋다는 싸부의 당부가 있기도 해서, 양고기를 즐겨 먹었다. 육식을 즐겨 하지 않는 평소의 식 습관에도 양꼬치구이엔 은근히 구미가 당겼다. 양꼬치구이는 시안과 연변 등지에서는 흔하게 맛볼 수 있었던 까닭에,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다음 무등산 옥녀봉 기슭에 터를 잡고 나서, 그 이듬해 가을 백일 득공을 했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밖을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하우스 안의 텐트와 마당에서 태극권 득공과 노자 심득에 열을 내고 있었다. 중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라, 아직 성성하고 단단한 정신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서였을까. 장공108식 태극권을 하루 예닐곱 번씩을 돌았고 참장공도 1시간씩 2회는 기본으로 했다. 차훈과 명상, 노자 심득에 드는 노력까지 포함해서 온종일 수련에만 집중했다. 그랬으니 육체적 고단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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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주 쯤 지났을까, 피로가 누적되었나 보다. 허리 통증이 심했다. 그대로 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만히 되짚어보았다. 하루 두 끼 식사에 채식만을 고집한 데 원인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침 식사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려고 1일2식에 집착했고, 순 곡채식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다행히 몇 가지 처방으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때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는 사내에게 매우 유익하였고, 그 기억은 오래 갔다. 태극권 득력의 때엔 먹는 걸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계기가 된 것이다. 
        
  안거를 할 때 꼭 지켜야할 것이 있지, 하고 사내는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가장 철저하게 지켜야할 건 역시,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야. 이점에 관한 한 사내는 비교적 엄격하고 철저한 편이었다. 그가 평소에 내방객들을 맞아 단골로 풀어먹는 ‘오지론’이 어쩌면 이 같은 조건에 잘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즘 오지가 사라졌지. 오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은자들의 안식처가 없어졌다는 뜻이야. 불행한 일이고말고. 오지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교통의 단절이고. 그런데 요즘 대중교통뿐만 아니라 승용차로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나. 도로망이 촘촘히 발달되어있는데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 어떻고 야단들 해서 가보면, 아니나 다를까, 마을 구석구석까지 승용차가 쑥쑥 들어가지. 그런 걸 어떻게 오지라 할 수 있냐고. 오지란 말을 들을 수 있으려면, 최소한 집으로부터 십리쯤, 아니 좀 더 양보해서 오리 이상은 비포장도로가 끼어있어야 해. 밖으로의 출입이 불편해야 오지란 말이 성립되지.
  그뿐 아니라, 오지가 되기 위해선 통신이 끊기지 않으면 안 돼. 휴대폰, 이게 문제야. 끄떡하면 휴대폰에 대고 전화질이나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페북이니 카톡 같은 걸로 세상의 소음들을 다 끌어들이니, 어찌 오지가 되겠느냐고.
  오지만 생각하면 열불이 난다는 사내의 오기도 이만저만하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안거의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핸드폰을 정지하는 일이다. 통신사에 연락해서 두 달 간 정지를 요청하고 나면, 갑자기 세상이 다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든다고 사내는 토로하곤 했다.
  문득, 일도 사람들도 따 떠나버린 듯 공허한 느낌이지. 고독한 존재를 자청한 마당에 누구한테 대고 원망이야 하겠는가. 가만히 토굴에 혼자 앉아서 생각해보지. 세상살이 그것 참 허망한 일이더군. 그래 그런 걸 좀 느껴보라고 폐관하는 것 아니겠냐고.
  밀려드는 일 속에 빠져서, 물론 그 일이라는 것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만, 어쨌든 혹시라도 일을 손에서 놓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거.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속을 핑계 대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 한편으론, 휴식이 있는 저녁을 간절히 원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대놓고 이런 식의 논리를 펴는 건 용납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는 응당 그렇게 사회경제적 논리로 풀어나가야 하는 거고.
  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는 역시 마음 법에 의거해서 풀지 않으면 안 돼. 마음의 근본 문제를 직시하는 순간, 문제의 본질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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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심리적 요인 중의 하나가 아마 ‘관계 중독’ 일지도 몰라. 그 관계라는 것에 매여 살다 보면, 내 생명과 삶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를 때가 많아. 그러다 문득, ‘고독하게 홀로 선’ 나 자신과 마주칠 때가 있지. 그 고독한 존재는 어느 날 내게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질 거야. 관계라는 것이 실상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질곡(桎梏)이 되기도 하니까.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간적(間的) 존재’를 뜻해, 자고로 인간은 사람 사이에서 처하는 게 맞고, 그게 당연하지. 그러게 사람이라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정도 문제야. 자기 자신을 잃고서 관계에만 집착하니 도리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암, 이것 또한 병통이야. 안거란 그래서, 밖으로 난 감각의 구멍을 틀어막고, 밖을 향한 욕망의 문을 닫는 일이지. 마음을 안으로 돌림으로써(內斂) 나 자신의 내면에서 우주를 찾는 일이지. 하여, 자기 자신의 참모습, 참 존재를 찾는 몸부림이지.    
 
  그리하여 안거는
 
  그리하여 안거는 무위(無爲)에 은적해 들어감이다. 나의 의지적 선택과 결단을 내려놓고, 스스로 그러하도록 나를 내맡기는 일이다. 휘황한 가로등과 전깃불을 끄고 나서, 달빛 그윽한 밤에 내 무의식의 심연을 탐사하는 일이다. 별빛 찬란한 하늘 저편으로 달려가, 나를 춤추게 하는 일이다. 전도된 망상을 되비추어, 한 점 바람에 까불려버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안거는 환(幻)으로써 환(幻)을 수행하는 일이다(以幻修幻). 반짝반짝 나를 유혹하는 세간의 모든 것들이란, 전도된 망상이 지어낸 가유(假有)요, 환(幻)임을 아는 수행이다. 그리고 그 수행조차 급기야 환(幻)이게 됨을 어찌 알랴. 내가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법과 스승과 길조차 환(幻)임을 수행을 통해서 알게 되는 바, 지금 여기 그 수행이라는 것조차 방편에 불과함을 어찌 알랴.
 
  그리하여 안거는 빗장을 걸고 밖을 단절하는 오지를 자청하는 일이나, 불통의 오지가 존재한다는 그 신념조차 근거 없는 것임을 밝게 아는 일이다. 안거는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어서, 안의 깊숙이 편안하게 거함으로써, 밖의 사정을 잊고 내면의 진실을 탐조해 들어가는 진실 게임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하여 안거는 들어갈 땐 문을 걸고 들어가나, 나올 땐 ‘문 없는 문’으로 나온다. 궁극의 세계에선 들어감도 없고 나옴도 없다. 들어가는 자도 없고 나오는 자도 없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깨달음도 없고 깨달은 자도 없다.
 
  안거 중 중얼거리는 것은 묵언의 금기를 깨트리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중얼 댄다. 습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나 보아줄 구경꾼도 여기엔 없다. 좋다. 이래서 안거를 하는 거다. 옷을 벗어던지고 전라의 몸으로 태극선의 투로를 몇 바퀴 돌아도 시비를 걸거나 박수를 치어줄 관객 한명 없다. 밖의 기운과 안의 기운이 회오리를 돌고 돌아, 안의 기운이 밖의 기운을 업고 돌며, 밖의 기운이 안의 기운을 타고 돌아, 태극의 일기(一氣)로 화한다. 다시 일기는 수천의 형상과 몸짓으로 바뀌어 팔만사천 가지가지의 우주 법계를 나툰다.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오니,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우주 만법이 안겨있구나(一微塵中含十方).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형상과 색깔과 향기와 맛을 나투던 만물은, 64궤로, 8궤로, 사상으로, 음양으로, 태극으로 접혀 들어오고, 태극조차 종국에는 무극으로 복귀해 들어간다(復歸於無極). 길은 이름 없음으로 숨어들어서 보이지 않게 된다(道隱無名).
 민웅기(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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