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6개' 시대는 불가능하다 시민을 위한 에너지 정책

지난 9월 15일, 오후 3시 11분부터 5시간가량 예고 없이 순환정전이 시작됐다. 전력 수요가 급증해 ‘블랙아웃’을 막기 위해 실시한 비상조처였다. 갑작스런 정전에 전국이 혼돈에 빠졌다. 신호등이 멈춰 교통 대란이 일어나고, 656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승강기에 갇힌 사람들의 긴급구조 요청만 1900여 건이 들어왔다. 최전방 초소, 레이더 기지 등 군사시설의 전력 공급도 중단됐다. 사상 초유의 정전 사고로 지식경제부 장관, 전력거래소 이사장, 한국전력 부사장이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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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아파트 전국적으로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난 9월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일대 아파트 단지에 일제히 불이 꺼져 주변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불빛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블랙아웃, 상상하기 힘든 재앙

이번 사고를 통해, 전력망이 모두 연결된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전기 공급이 한꺼번에 중단되는 블랙아웃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대규모 핵발전과 화력발전에 의존하는 중앙집중형 전력 공급 시스템의 한계를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그것도 블랙아웃 직전까지 경험한 것이다. 공룡 같은 거대 전력 시스템이 한꺼번에 멈추는 상황은 수요 급증도 원인이겠지만, 대용량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핵발전소 2~3기가 한꺼번에 고장을 일으키거나 765kV 초고압 송전망이 무너져 전력 공급이 급격히 줄어도 발생할 수 있다.

이번 사고는 공룡이 죽기 전에 순환정전으로 인공호흡을 한 셈인데, 실제로 블랙아웃까지 가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예비전력이 바닥나는 순간 전압과 주파수가 떨어지고, 발전소 전력이 바로 차단된다. 공장이 멈추고, 통신이 두절된다. KTX를 비롯한 기차와 전철이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신호등이 꺼지면서 교통이 혼란에 빠진다. 수돗물 공급은 물론 난방, 취사, 자동차 운행도 불가능해진다. 취수장과 정수장도, 가스 공급을 위한 압력장치도, 주유소의 주유기도 모두 전기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고층빌딩과 주상복합건물의 비상용 발전기는 채 5시간을 못 버틴다. 전기 공급이 끊긴 63빌딩과 타워팰리스는 어떻게 될까? 전기 없는 도시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더구나 블랙아웃이 발생하면 이런 상태가 일주일 이상 계속될 수 있다. 발전소를 정상 가동하는 데도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정전을 계기로 우리가 얼마나 전기에 의존해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이 쓰는지, 전기 생산과 소비 방식이 지속 가능한지 돌아봐야 한다. 그런 통찰의 시간과 과정을 거친다면 수요 예측 실패나 낙하산 인사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수요관리 정책의 중요성과 소형 열병합 발전 등 분산형 전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대안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서울같이 전력자립도가 1%도 채 안 되는 대도시에서는 전력 소비를 줄이고, 생산 여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원전 확대’로 기수를 돌리다

최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고를 통해 핵발전 확대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니, 발전소를 더 짓거나 전기요금을 올려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요금 인상은 국민의 반대로 쉽지 않기에 값싼 전력을 공급하는 핵발전밖에 답이 없다는 것이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도 유엔에서 “전세계적인 에너지 수요 증가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 활용은 불가피하다”는 연설을 했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자세를 낮췄던 핵발전 옹호자들이 정전을 계기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95년 모기업에서 대형 기름 유출 사고를 내자 해당 기업의 환경담당자가 화장실에서 웃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먼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발전소를 추가로 짓자는 것은 체질이 허약한 공룡의 크기만 더 키울 뿐이다. 늘어나는 소비를 얼마나,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1인당 전력소비량은 8423kWh(2008년)로 국민소득이 훨씬 높은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을 능가한다. 1998∼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전력소비량이 10% 이내로 증가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124% 증가했다. 지식경제부는 앞으로도 전력소비량이 매년 1.9%씩 증가해 2010년 4238억kWh에서 2024년 5516억kWh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공급 늘릴수록 정전 위험은 커져

전력 과소비는 핵발전에 과도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수요관리 대책이 전기요금 현실화다. 전기요금이 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도 안 되기 때문에 전기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낮은 전기요금은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중반 핵발전소가 잇따라 완공되면서 전력생산량이 남아돌자 정부는 전기요금을 10차례나 인하했다. 산업계에 가정용보다 싼 전기를 공급한 것도, 심야전기를 공급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짓는 데 10년이나 걸리는 핵발전소에 맞춰 전력 공급과 가격정책을 끼워 맞추다 보니 초과 공급과 저가정책, 전력 소비 급증이 되풀이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핵발전소를 더 짓자고? 당장 이번 겨울에 정전 대란이 걱정이라면서, 7~8년 뒤에나 완공될 핵발전소가 대안이라는 것은 한가한 소리다.

핵발전소 전력생산 단가가 싸다는 주장도 의도적인 왜곡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핵에너지에 감춰진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보여준다. 사고 보상과 폐쇄,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에 드는 비용 말고도 방사성 오염으로 농업과 수산업이 무너지고, 국민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굳이 사고가 아니어도 발전소 해체와 폐기물 처리 비용에 1조원 이상이 드는데, 이 비용이 다 빚으로 남는 셈이다. 전력 수급 효율화 측면에서도 핵발전은 24시간 출력 변동 없이 가동해야 하고, 휴지 상태에서 재가동하는 데 24시간이 걸린다. 핵발전에 의존할수록 비상시에 기동성 있는 전력 공급 대응이 어렵다. 핵발전은 정전 사태 대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력 중 핵발전 비중이 75%를 차지하는 프랑스는 겨울마다 전력이 부족해 독일과 이탈리아 등 이웃 나라에서 수입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력 소비 양상이 프랑스를 닮아가고 있다. 핵발전 비중이 높아지면서 24시간 전력을 생산하는 특성상 심야전기 소비를 촉진하고, 전기난방 비중이 높아져 전력 피크가 겨울에 발생하고 있다. 정부의 잘못된 과세와 요금정책도 전기 수요를 부추기고 있다. 2002년과 비교해 2008년 등유는 123.6%, 도시가스는 28% 오른 반면 전기요금은 5.8% 인상에 그쳤다. 산업계가 발빠르게 에너지원을 전기로 전환했다. 항만의 컨테이너 크레인이나 주물공장의 동력도 석탄·경유에서 전기로 바뀌었다. 산업계로서는 가격이 저렴한 에너지를 쓰는 것이지만 국가 전체적으로는 에너지 효율이 떨어진다. 가정에서도 특별소비세가 부과되는 등유 대신 전기로 난방하고, 전국적으로 시스템 에어컨과 전기장판, 전열기기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겨울 정전 대란을 걱정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덜 쓰는 것이다. 전기 절약 캠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기 공급 제한까지 동원하는 제대로 된 수요관리 정책을 하자. 2008년 말 기준으로 가정용 전기 사용량은 전체 사용량 대비 14.9%, 공공기관은 4.4%, 상업용과 전철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모두 포함하면 29.2%다. 결국 수요관리 정책을 위해서는 전력의 절반(51.5%)을 소비하는 산업계의 동참이 꼭 필요하다. 산업계의 전력 소비 감축이 수요 관리에서 핵심이라는 것은 일본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하는 도쿄전력이 올해 전력 수급을 분석한 결과, 여름 최대 전력사용량(4922만kWh)이 지난해(5999만kWh)보다 18% 줄었다. 500kW 이상 대규모 사용자가 전년 대비 29%, 500kW 미만 사용자가 19%, 가정에서 6%를 줄였다.

 

요금 덤핑에 콧노래 부르는 대기업

기업의 절전 기여도가 높은 것은 일본 정부가 7월 1일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력 소비를 전년 대비 15% 줄이도록 강제하는 전력사용제한령을 발동했기 때문이다. 도요타 등 자동차 업계를 비롯한 일부 대기업들은 목·금요일에 쉬고, 토·일요일에 공장을 가동하거나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등 근무형태도 바꾸었다. 일본에서는 제1차 석유파동인 1974년 이래 37년 만에 실시한 제한령이었다. 핵발전 사고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전력 수요 관리가 단시간에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덕분에 핵발전소 54기 중에서 43기가 멈춰섰는데도 일본은 우리 같은 대정전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강력한 전력 수요 관리정책으로 인해 일본 산업계의 경쟁력이 약화됐다거나 일본 경제가 휘청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마 한국에서 전력사용제한령을 거론하면 당장 사상 검증부터 들먹거릴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그동안 값싼 전기요금의 수혜자였다. 시민들이 kWh당 평균 130.72원을 낼 때 산업계는 평균 76원을 냈다. 총괄원가 96원보다 20원이나 싸고, 한전이 입는 손실은 국민 세금으로 충당한다. 철강과 정유 산업이 주축을 이룬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10개 업체는 평균 67원을 냈다. 단가가 싼 심야전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정부가 산업계 전기요금을 인상이라도 할라치면 이를 막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벌인다.

혜택을 받은 기업들이 한전의 긴급한 직접부하제어 요청에는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한전은 순환정전을 하기 전에 비상자율절전(190만kW)과 직접부하제어(138만kW) 약정 소비자를 대상으로 단전을 실시해 전력사용량을 조절한다. 그런데 정작 9월 15일 한전의 긴급요청에 직접부하제어 대상업체 10곳 중 7곳이 응하지 않았다. 수백만 원의 지원금을 받는 S전자를 비롯해 H반도체, L호텔, L쇼핑(주) 잠실점(1) 등의 실적 제어전력량이 ‘0’이었다. 직접부하제어 대상 업체들은 매년 7~8월, 두 달 동안 kW당 500원의 지원금을 받기에 수요 조정이 필요할 때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 만약 이번에 블랙아웃 사태까지 갔다면 산업계가 입었을 경제적 손실은 전기요금 몇 푼 아끼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소탐대실을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이번 겨울도 안심할 수 없기에 산업계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오히려 정부에 강력한 수요관리 정책 시행을 요구해야 할 판이다.

 

에너지 문제에 눈을뜨자

9월 15일의 일을 경험하고도 우리는 블랙아웃의 심각성과 일상에서의 전력 소비, 핵발전 중심의 전력정책 사이에 놓인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024년까지 핵발전소 13기 추가 건설을 목표로, 전력의 절반을 핵발전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우리는 더 많은 전기를 쓸 수 있겠지만 핵발전소 34기의 사고 위험을 떠안아야 하고, 늘 블랙아웃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전력 소비의 욕망을 계속 키워가는 한 정전의 가능성은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핵전기 사용량에 비례해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짐을 지게 된다.

우리 스스로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 지금 전기가 만들어내는 더 편한 세상을 갈구하는 ‘우리의 욕망’과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해 파는 ‘자본의 욕망’이 만나 냉장고 6개 시대를 열었다. 일반 냉장고, 김치냉장고, 쌀냉장고, 와인냉장고, 화장품냉장고, 의류냉장고 등. 지난 3월 11일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와 9월15일 순환정전 사고는 우리에게 6개의 냉장고 시대는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한다.

우리처럼 에너지를 쓸 줄만 알지 에너지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돼 쓰이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에너지맹’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에너지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겨울부터 전력 피크를 막기 위해 정부·산업계·시민이 함께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긴급 전력 수요관리 체제로 돌입해야 한다. 일본이 성공했듯이 우리 스스로 목에 방울을 달아보면, 정전에 대한 대안이 핵발전소 확대라는 헛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글 / 이유진 [르  디플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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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이고, 녹색당 당원 이유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