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는 아들 며느리, 도시 사는 시부모님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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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공놀이를 하는 아이

 

"무슨 연고가 있으셨어요?"

 

귀촌을 했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하고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 여기 화순, 그 중에서도 작디 작은 이 마을로 오게 됐냐는 것이다.

 

질문을 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그럴듯한 준비 과정이나 납득할 만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텐데, 사실 우리가 지금 사는 곳으로 온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던 중 '텃밭이 있고, 시골집이지만 적당히 깔끔하며, 저렴한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결정하고 보니 시댁인 광주, 친정인 전주와 한 시간 이내 거리여서, 아무리 이러이러해서 왔다고 설명을 해도 "부모님 가까이 왔구만"하고 단정짓는 표정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반신반의 했다.

시댁이 가까우면 좋을 게 없다고들, 결혼한 선배들은 한 입으로 말해 왔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순으로 온 것이 운명처럼 느껴지는 건 정말, 부모님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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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뒷마당에서 '백숙' 삶을 불을 지피는 남편과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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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순으로 이사를 온 통에 젤로 바빠진 건 시어머니다.

 

자영업자인 아버님을 도와 같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쉬는 날이란 개념이 없는데도 꽃게가 철일 때는 한 망을 사와 북북 문질러 손질해 삶아서 냉장고에 쟁여두고 가시고, 준영이가 이유식을 할 때, 지나가는 얘기로 밤을 잘 먹는다고 했더니 산에서 직접 밤을 주워와 속껍질 까지 까서 갖다 주실 만큼 정이 많으신 분이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15분만 나가면 먹을거리가 넘치는 마트가 있건만.  마치 오지산간에서 군복무 하는 아들 면회라도 오는 것처럼 과일에, 고기에, 오실 때마다 음식 보따리가 하나다.

게다가 일하는 며느리, 임신한 며느리라고 혹시 힘들진 않을까 전전긍긍.

 

말 나온김에 더 보태자면 난 명절증후군이란 것도 겪어보지 못한 운 좋은 케이스다.

당연히 제사상도 차리고 여기저기 성묘도 다닌다.  남자들은 뒷짐지고 앉아 있는 것도 다른 집 풍경과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는 건 시어머니 덕분이다.

'나도 이제 시어머니다' 하면서 이것저것 시키고, 잔소리를 하고, 눈치를 줄 법도 한데. 딸도 안 키워본 어머니, 손주들에게조차 사랑을 품지 못할 만큼 야박한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한 어머니가 어쩜 이리 며느리에게 관대하신지...

그래서 난 시댁에 가는 일이, 어머니가 우리집에 자주 오시는 일이 반갑고 편하다. "시댁은 멀수록 좋다"고 했던 선배들의 처지가 안타깝고.

 

시어머니와 동갑내기인 친정 엄마도 인정하셨다.

"나는 내 딸이라도 그렇게 못하는데..."

맞는 말씀이다.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래선지 난 가끔 친정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시어머니에게 투영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가 다녀가고 난 뒤 주방에 서서 남겨진 흔적을 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진다거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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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나랑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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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마음에 드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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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시아버지는 아주 맘 먹고 '일'을 하러 오셨다.

일단 원활한 백숙 삶기를 위해 차양막을 쳐 주신 다음, 용달차 위에 사다리까지 연결해야 닿을 수 있을 만큼 높이 달린 실외 전등을 교체해 주셨다.

이사오던 날, "천장에 높아서 언제 사다리를 가져와서 해야겠다" 하셨었는데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셨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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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훌쩍 넘기다 못해 이제 곧 두 아이의 부모가 되건만 아버지 눈에 우린 여전히 아이 같은지, 집에 오실 때마다 가만 계시는 법이 없다.

 

동물 우리를 손 보고, 잔디를 돌보고, 가스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그때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버지 등을 바라보며 어쩌면 아버지는 지금 무척 행복하시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을 해본다.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 아이에게 내가 전부라는 것을 자각할 때만큼 벅찬 순간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만날 땐 기꺼이 불완전한 아이처럼 군다.

별것 아닌 일에도 의견을 여쭈어 보고, 지금 이러이러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설명도 해 드리고, 가끔 남편 흉도 본다.

어쩌면 아버지는 지금 무척 행복하시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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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하는 일은 뭐든 함께 하고 싶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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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드디어 맛있는 백숙 대령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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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고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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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8년째. 두분을 처음 뵌 시간부터 계산하면 13년.

 

처음부터 다 수월했던 건 아니다.

물론 지금도 때때로 고민에 휩싸인다.

 

자유롭게 사고하며 내 의지대로 자란 나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아들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머니의 관계가  무척 생소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식장을 고르는 일에 왜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아들 며느리에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두분은 오히려 매번, 더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신다.

맘껏 살아보겠다며 시골로 내려온 아들 며느리, 벌이가 시원찮으니 어른들께 늘 걱정거리인 아들 며느리는 그것이 죄송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하도 고생하고 아끼는 것이 몸과 마음에 배어서 이젠 쉬고, 놀기만 해도 되는데도 그럴 수 없게 되어버린 분들.

그러나 내 아이와 함께 동요를 부르고, 춤을 추고, 맘껏 웃으시는 두분을 보며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은 두 분이 쉬시는 날.

 

주말 내내 같이 있다 "별 일 없으면 태희 태어나고 뵐게요" 하고 돌아섰는데 어머님의 정성어린 요리가, 아버님의 따뜻한 말들이 그새 그립다.

지금은 뭘 하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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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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