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해, 내 딸들을 더 사랑해서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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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또 왔다. “다음엔 재희(셋째 아이 이름)와 같이 봅시다.” 하고 헤어진 지 일주일 만이었다. 여섯 살 큰딸의 첫 재롱잔치 공연 응원 차, 이사하고 석 달 만에 친정 식구들을 초대했던 지난 주말, 그리고 백김치를 들고 나타난 이번까지. 어쩌다 보니 11월은 거의 매주 상봉이다.


“나흘 뒤로 (김장) 날을 잡아뒀는데 어제 갑작스레 첫눈이 왔잖아. 부랴부랴 뽑아서 집안에 들여놨더니 하루가 남겠더라고. 이러나저러나 며칠은 씻고 다듬고 갈고 썰고 치울 일들 천진데. 하루 여유가 있다손 쳐도 맘껏 놀기를 하겠어, 가만히 앉아 쉴 수가 있겠어. 그럴 바엔 광주나 다녀오자 했지.”


딸네 집에 훌쩍 다녀가는 게 어떻다고. 엄만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상사에게 업무 보고하듯 타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이지만 나는 안다.
텃밭에서 손수 땀과 정성으로 길러낸 소담한 배추 더미를 보고 있자니 유난히 김치를 좋아하는 딸이 어른거렸다는 걸. 곧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릴 딸에게 새 배추로 담근 새 김치를 먹이고픈 마음.

아니, 그 전에, 출산을 앞둔 자식을 그저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을까.
뭐든 좋다 좋아. 엄마가 내 옆에 있으니까.


“허리도 안 좋은 사람이. 시간 남으면 그냥 쉬지, 또 뭐 하러 와.”


거친 피부에 쾡한 눈으로 운전하는 엄마 옆에 앉아 인사치레하는 중에도 내 얼굴은 계속 싱글거렸을 것이다. 번갈아 감기를 치르는 두 아이와 근 한 달 동안 집에 묶여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휴가라도 얻은 것 같이 붕 떠 있었다.
애들 봐줄 사람이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차도 있겠다. 전에 봐둔 서랍장을 사 올까. 무작정 나가서 두세 시간 책이나 읽다 올까. 당분간 미용실도 못 가니 파마나 할까.


하고 싶은 건 그대론데 보건소에서 산후도우미를 신청하고 생협에 들러 주문해둔 피자와 통닭을 가져왔더니 벌써 7시다. 먼저 도착한 남편이 안쳐둔 밥을 푸고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덥혔다. 엄마가 가져온 김치, 고수, 쌈채소를 담고 피자랑 통닭은 상자 째로 올렸다.

지난번 집들이 때도 나 힘들까봐 굳이 외식을 하자고 했던 부모님께 차려드린 밥상이란 게 고작 이렇다.


식사 후 남편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두루치기에 소주 몇 잔을 마신 아빠마저 방으로 들어가시자 거실과 주방엔 여자들만 남았다.

고무장갑을 끼려는 엄마를 아이들 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책 읽어주는 걸 좋아한다. 안경을 끼고도 크루엘라니 클로에니 하는 외국 이름을 헷갈리며 쩔쩔매는 할머니가 늘 재밌고 편하다. 이건 할머니가 민재에게 선물 했던 건데, 하며 사촌들이 물려준 책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책을 읽고, 동영상을 찍고, 찍은 걸 돌려보는 틈틈이 엄만 빨래를 개고 거실 정리까지 끝냈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야 엄마와 다시 식탁에 앉았다.
지난번 큰딸 유치원 공연 때 엄마가 만들어온 생강차를 냈다. 따뜻하게 해서 자주 마시라는 말에 그러고 있다고 했지만 실은 그날 저녁 처음 마시는 거였다.


- 정서방은 맨날 늦고?
- 응, 연말까진 계속 그럴 거야.
- 피곤해서 어쩐 다냐. 너도 정서방도.
-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글이고, 출판사고 다 제쳐두고 애들만 생각해야지 하면 마음은 편해. 두려움보다 설렘이 크고.


엄마는 얼마 전에 다녀온 향진회 모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유년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전북 진안의 산골 마을. 사람들 성씨는 거의 다 ‘안’ 씨고 대부분이 친척이었던 마을은 20여 년 전 댐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물속에 잠겨버렸다. 일흔 살 전후 안 씨 남자들이 주축이 돼서 향진회란 이름으로 일 년에 서너 번 어울리는데, 6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온 뒤 전혀 왕래가 없는 내 또래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하다.


- S 네는 우울증이 와서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잔다는 고만.
- 그 아주머니 참 밝고 호방한 스타일이었는데.
- 그러게 말이여. 그런데 지금까지도 남편은 전혀 모른단다. 이번에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청소할 일이 없다고 좋다길래, 그래 얼마나 작아서 좋냐 했더니 32평이래(웃음). 그 전에는 60평이 넘는 집에서 살았다네.
- 아따 그 아저씨네 부자였던 갑네. 땅이 많았던가?
- 소가 많았지.


- H 엄마는 잘 계시지? H(내 동기다)랑 하는 두부집이 엄청 잘 된다며.
- 어, 억대로 번다니까. 사람이 참 착하잖아. 근데 이번에 만났을 때는 울면서 그러더라. 애들 아빠 죽고 나서 왜 그 동네를(시가를) 벗어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친구 아버지는 우리가 3살 때 돌아가셨다)


엄마 눈이 가장 아련해지는 건 나와 동갑내기인 H와 W, 두 친구 엄마들에 관한 추억을 떠올릴 때다.
H는 4월생, W는 6월생, 나는 8월생. 홀몸이든 만삭이든 빨래가 가득 담긴 빨간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다니던 엄마들은 빨랫방망이를 휘두르며 고약하고 매정한 시어른과 무뚝뚝한 남편, 가난의 설움, 친정의 그리움을 삭혔다고 했다. 빨래터에서 돌아오다 넘어져서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나는 예정일보다 한 달 정도 일찍 태어났다. 
“힘들었지만 힘들 줄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기억되는 건 그 시간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서로를 보듬었던 빨래터 동지들 덕분일까.


밤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엄만 10시도 안 돼서 곯아 떨어졌다.
하긴, 얼마나 피곤했을까. 전날, 눈 맞으며 배추 뽑고, 다듬고, 옮기는 일만으로도 무리였을 텐데 자정이 넘어서야 백김치 작업이 끝났다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한 오징어무국을 끓이고, 역시 생협에 들러 내가 주문한 생필품을 사고. 바삐 점심을 해먹고 치운 다음 한 시간 반 국도를 달려 도착해서 좀 쉬려나 했더니 만삭의 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던 거다. 그렇게 다시 시내를 돌며 두어 시간. 해치우듯 겨우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엔 치우고, 닦고, 정리하며 아이들이랑 엎치락뒤치락.
이달처럼 어쩌다 자주 만날 일이 생겨도, 이번만은 맘껏 시간을 보내자 해도 서로의 가사와 육아를 나눠 짊어지다 보면 어느새 돌아서야 할 시간이다.


엄마가 더 필요해진 건 내가 엄마가 되고 난 뒤였다.
서울서 첫째를 낳고 살 때도 엄만 새로 담은 김치와 신선한 채소꾸러미를 들고 자주 올라왔다. 둘째는 아예 엄마가 사는 도시에서 낳았다. 자연에서, 텃밭을 가꾸며 살아보겠다고 무작정 화순으로 이사 갔을 때. 철마다 풀 뽑고, 밭매고, 거둬들인 것으로 밑반찬을 만들었던 이도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일하느라 내 새끼 보살필 여력이 없다면 언제고 기꺼이 안고 갔던 엄마. 이번에도 병원과 조리원에 있는 동안 엄마가 두 아이를 봐주기로 했다.


- 진통 오면 연락할게.
- 그래 절대 무리하지 말고.
- 엄마나 무리하지 마. 고마워. 맨날 엄마에게 거절 못 할 부탁만 한다.


갑자기 머리끝이 싸늘해졌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아 서둘러 뒤돌아섰다.
필요할 때마다 늘 내 옆에 있는 엄마가 고마워서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결혼해서 엄마 없이 엄마로 살아온 내 엄마의 날들이 새삼 가여워서도 아니었다.

출산 뒤 보름 남짓, 나랑 떨어져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낼 내 딸들이 밟혀서, 아파서였다.


드라마 ‘고백(Go Back) 부부’에서 과거로 돌아가 다시 만난 엄마가 딸에게 말한다.
“부모 없인 살아도 자식 없인 못 사는 법이야. 이제 그만 니 자식이 있는 곳으로 가.”
그 장면을 보며 그제야 펑펑 눈물을 쏟았다.
엄마 미안해, 엄마보다 내 딸들을 더 사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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