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姜南求)와 강남구(江南區)

  밥을 차릴 때엔 일부러 시간을 보지 않았다. 밥을 차리는 시간과 밥을 먹는 시간이 비례하지 않으니 차라리 시간을 재지 않는 게 편했다. 서툰 습관으로 밥을 정성스레 오래 차리지만, 차린 시간에 비해 식사 시간은 빨리 끝났다. 시계를 보지 않는 건 허무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나를보호하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긍정적인 습관도 하나 얻었다. 집에서 밥을 차린 뒤부터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더라도 곧잘 주인에게 “잘먹었다”라고 말을 건넸다. 밥을 차린다른 건 정성뿐만 아니라 체력도 적잖이 필요하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에 느긋하게 음식을 먹는다면 식사를 준비한 사람에게 일종의 심리적 보상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았다. 이제 논문도 써야 하는데 ‘식사를 끝내고 난 뒤 엄마의 만족감’을 주제로 잡으면 가설을 이렇게 세울 것 같았다. 밥을 천천히 먹는 프랑스 엄마들이 밥을 빨리 먹는 문화에 있는 한국 엄마들보다 식사를 끝내고 난 뒤 만족감이 높다라고. 서툰 솜씨로 저녁 내내 음식을 차렸을 때 아이가 반찬 투정을 하면 밥을 치운다는 말은 교육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도 살림을 하며 깨달았다. 겉으론 밥상머리 교육을 내세우겠지만 반찬투정하는 아이에게 밥을 먹지마라는 건 일종의 분노의 표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맛있다 란 말이라도 한 마디 듣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아이가 크면 밥을 먹는 시간은 더 빨라졌지만 밥을 차려야 할 시간도 함께 길어졌다. 아이는 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도 많아져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아빠의 음식을 평가했다. 아홉 살은 음식에 대해서도 알만한 그런 나이라고, 적어도 아이 자신은 스스로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차려준 음식만 받았는데 이제 주부가 되어보니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은 누군가 차려준 음식이었다. 누군가 차려준 음식보다 더 맛이 있는 음식은 누군가 사준 음식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이제는 안다. 외식을 하는 건 외식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밥을 차리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사람이 밥 차리는 게 힘드냐는 망말을 하는 남편은 적어도 칼질을 할 때에 손가락 마디마디의 움직임과 손목과 팔에 들어가는 힘의 크기를 모르는 무지의 소유자일 테다. 그래도 그 남편이 기다리는 미래는 찬밥이나 라면이라는 걸 생각하면 망말을 하는 사람조차 안쓰럽다. 나이드신 어머님들 가운데 허리가 굽고 손가락이 휜 분들은 간혹 보아도 허리가 굽고 손가락이 휜 아버님을 뵌 적은 거의 없었다.

 밥을 차린 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회사에선 나이가 많으면 상전이었는데 집안에서는 나이가 어릴수록 상전이었다. 밥을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으니까. 다른 남성들과는 달리 나이가 들어도 난 내 밥과 내 반찬과 내 국을 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나를 다독였다.

 순간 조용한 집안 분위기가 감지됐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소리지르기 바쁜 아홉 살 아이가 있는 집에 정적이 흐르면 불안이 엄습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뒤를 봤더니 아이는 소파에 두 다리를 쭉 피고 엎드린 채로 책을 읽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발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배도 부르고 음악도 흐르고 보고 싶은 책도 앞에 있고. 아홉 살은 참 괜찮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팔자 좋은 주인을 모시는 하인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아이가 얄미웠다. 
“너만 혼자서 책 보니까 좋니?”
 

 네 팔자가 좋지만 아빠 팔자도 한번쯤 살펴봐달라는 투정이었다. 그 투정 속에선 고생하는 아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섞였다. 현실이 바뀌기를 원할 때 무언가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은 채 소망만 그대로 현실에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기대와 다른 질문으로 아빠의 바람을 외면했다.
“아빠, 심심해?”

 아빠는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아이는 심심하냐고 물었다. 가끔씩 아이에게 살림 투정을 하면 아이는 정확하게 자신은 어린이이며 아빠는 어른이라고 설명했다. 어른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아이였지만 집안 일을 부탁하면 아홉 살 아이는 명확히 어른이 해야 할 일과 아이가 해야 할 일을 구분했다. 아이는 어리고 약해서 휴식을 취하고 노는 게 중요한 반면에, 어른은 그런 아이를 보호하고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아이는 아빠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이 잔소리가 싫어 심심하냐 는 질문에 그냥 아닌 척 했다.

 아홉 살 아이는 상대의 마음을 공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슬퍼하는 감정은 자신이 슬픔을 경험했을 때에 상대를 깊이 공감할 수 있고, 상대를 괴롭히면 안된다는 감정도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 경험 속에서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넌 왜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니 라는 말이나 넌 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냐고 어린 아이에게 말을 하는 건, 그거야 말로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의 어린 아이 같은 질문이었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공감은 머리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많은 경험과 시간 속에서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수업 내용이 떠올라 그냥 아이에게 하고 싶었던 투정을 접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조용히 혼자서 책을 봤던 게 미안했던지 아이가 질문을 했다.
“뭔데?”
“북한산은 왜 한국에 있어?”
 응? 북한산이 왜 한국에 있느냐고? 북한산은 북한에 있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을 했나 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하다가 웃으며 아이에게 되물었다.
“그럼, 강남구(姜南求)인 아빠는 강남구(江南區)에 살아야  하니?”
 아빠의 농담에 아이는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고개도 아빠에게 돌리지도 않은 채, 바로 대답을 했다.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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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의 침묵. 찰나의 고요. 잠시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참새 세 마리.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등뒤를 뛰어다니는 펭귄들. 아이는 아빠 말을 즉시 수긍했는데, 난 가슴이 턱하니 막혔다. 한양 북쪽에 있어 북한산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아이는 마치 이름이 강남구인 아빠가 과천에 살고 있는 사실에서 북한산이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은 듯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북한산과 아빠 이름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지역의 이름은 그 지역의 역사나 특성을 담고 있고 사람의 이름엔 부모님의 마음이 담겼다고 전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줄임말이고,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의 줄임말이며,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라는 도시의 줄임말이라고도 덧붙였다. 지명에 관심을 보인 아이였지만 아빠 이름 뜻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1년 전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대치동에 간 어느 날이었다. 차 뒷좌석에서 아이의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혼자 내지른 탄성이 귀여웠다.
 “민호야 왜?”
 “아빠, 저기 아빠 이름이 다 붙어 있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더니 건물이나 표지판엔 아이 말대로 내 이름이 걸려 있었다. 강남구 대치동에 갔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이는 처음 보는 광경에 무척 신기해 했다. 약국도 강남 약국이었고 학원 이름도 강남 학원이었다. 도로 표지판이며 건물이며 곳곳에 ‘강남’ 또는 ‘강남구’가 붙어 있었다. 아빠 이름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던 게 아이에겐 신기했다. 그 때 민호가 아빠에게 물었다.
 “이게 다 아빠 거야?”
 

 아빠 거? 여기 있는 게 다? 아이의 질문의 속도는 아빠의 생각의 속도보다 항상 빨랐다. 질문의도를 파악하는 길은 아이의 경험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민호는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물건마다 이름 스티커를 붙였다. 저학년 초등학생들은 물건을 잘 잃어버려 크레마스 하나하나까지 자기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이름이 붙어있다는 건 내 것이란 영역의 표시였다. 민호는 자신의 물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창밖에 보이는 건물과 도로에 아빠 이름 스티커가 붙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이의 생각 과정을 하나씩 찾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재밌다. 다만 아이가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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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빤 엄청 부잔가보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색연필에 이름 스티커를 붙였지만 아빠는 도로 위에 이름 스티커를 붙였고, 자신은 기껏해야 책가방에 이름 스티커를 붙이지만 아빠는 커다란 건물 겉면에 이름 스티커를 붙이니 아이는 아빠를 엄청 부자라고 생각할 만했다. 평소에 자신의 친구처럼 만만하게 아빠를 보던 아이는 자기가 모르는 아빠를 발견한 것인양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지?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그렇다고 거짓말까지 할 수는 없잖아. 침묵이나 노코멘트는 상대방 상상에 기대어 내가 대답을 해야 할 책임을 상대에게 넘긴다. 그렇게 거짓말도 하지 않고 아이에게 실망을 주지 않고 나는 그 상황에서 나를 지켰다. 미안하지만 모든 책임을 아이의 상상력에 맡긴 채로.
 

 강남구 란 이름은 어렸을 때부터 숱한 일화를 남겼다. 우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특별한 별명이 없었다. 그냥 아이들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무척 즐거워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강남을 비롯해 부동산 값을 잡겠다고 전국이 들썩이던 때, 국토해양부 막내 출입기자로 발령을 받은 난 선배들로부터 열렬히? 환영을 받았다. 강남 부동산 기사는 이제 강남구에게 맡기자며 선배들은 내 이름을 둘러싸고 즐거워했다. 아침 뉴스 앵커를 할 당시 선배 아나운서는 생방송 도중 대본에 없었던 인사말을 건네 당황했다. “강남구 앵커, 요즈음 강남 스타일이 유튜브에서 뜨거운 화제라는데 오늘 첫 소식으로 들어왔다고요?”

 KBS 인간극장에 <사랑은 아직도>란 제목으로 아이와 아빠의 삶이 공개되었을 때에도 이름때문에 오해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는 장면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집에 돈이 많아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했다. 강남구이니까 회사를 그만 둘 수 있는 거라고. 오죽했으면 이름을 강남구라고 지었을까 란 상상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이름은 상황에 따라 그렇게 가끔 껴 맞춰졌다. 대한민국에서 강남이 상징하고 의미하는 게 사람들마다 다 달라 내 이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역 강남의 이미지에 덧붙여지거나 아니면 정 반대로 비교되기도 했다. 실상을 알고 친한 사람들은 나를 ‘이름만 강남구’라는 농도 건넸으니까. 

 이름 때문에 인터넷에서 내 기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치나 경제에 관심을 받는 강남구지역과 관련한 기사가 내가 쓴 기사보다 앞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쌍둥이 언니를 둔 어머니께서는 당신이름 한 가운데 ‘雙’(쌍)자가 들어가 촌스럽다고 가끔 이름에 불평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어머니께 말없이 반박을 했다. ‘어머님, 아시잖아요. 아들 이름은 강남구라는 걸요.’ 라고. 
 

 그런 내 이름이 아빠가 되어 보니 그리웠다. 놀이터에서 또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민호 아빠’라고 불렀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기자 앞에라도 내 이름을 넣어 ‘강남구 기자’라고 불리거나 또는 ‘강 기자’라는 호칭을 들었는데 가정으로 들어와보니 난 아이의 아빠였다. 내 이름 석자는 아이 이름에 자리를 내주었고 나를 수식하는 말은 이제 기자 대신 ‘아빠’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보니 부모로서 존재가 컸고 ‘강남구’로서 나는 작았다. 詩를 좋아하는 ‘강남구’도 있지만 밥을 차려야 하는 아빠로 사람들은 바라봤고, 수영을 좋아하는 ‘강남구’대신 아이와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아빠가 더 크게 보였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는 ‘강남구’도 있었지만 집 안에서는 아이 옷을 빨고 빨래를 개야 하는 아빠였다. 
 

 작가일 수도 있겠고 아빠일 수도 있겠고 부모님의 아들일 수도 있겠고 후배들의 선배일 수도 있을 것이며 동생의 형일 수도 있는 나도 모두가 나일 테다. 다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내가 바라보는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아빠이며 그게 현실이지만 나의 마음 한 가운데에 아빠라는 단어 옆에 더 크고 분명해 내 이름 석자를 새기기로 했다. 그러면서 아이도 아빠의 아들로 살기보다는, 아빠의 생각에 자신을 껴 맞추기보다는, ‘강민호’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홀로 서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 ‘강남구’와 ‘강민호’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랑하는 모습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기보다 각자가 삶을 존중하며 가까이서 공존하는 모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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