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잘 자라고 있는거야..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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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글을 오래 읽어 온 독자들은 둘째 윤정이에 대해 애틋한 감정들을 고백하곤 한다.
첫째와 막내 사이에 끼인 둘째로 자라면서 늘 위와 아래를 먼저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아이이기 때문이다.
힘과 나이로 누르는 첫째와 유난히 자기 주장이 강한 막내 때문에 집안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세 아이와의 갈등으로 힘들 때, 누구 하나가 이해하고 양보해야 상황이 끝날 때 그럴때 마다 나는
그 몫을 윤정이에게 기대하곤 했다. 윤정이는 착하니까, 윤정이는 이해를 잘 하니까, 윤정이는
엄마 마음을 잘 알아주니까...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오빠 말을 들어주고, 동생을 달래며 엄마까지 다독이는 둘째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선물 같은 딸, 기특하고 대견한 딸이라고 여기며 미숙한 엄마의 숙제를
어린 딸에게 미루기도 했었을 텐데 그렇게 크는 동안 그 어린 마음에도 그늘이 들고 힘들었다는
것을 적지않은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챘다.
그 다음부터는 언제나 윤정이에게 확인한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지, 그게 정말 네 마음인지..
네 감정, 네 기분이 기준이라고, 다른 사람 마음 살피기 전에 네 마음부터 살펴주라고 얘기하곤
했다. 집안은 더 시끄러워졌지만 윤정이 표정은 한결 환해졌다.
그렇게 열살 열한 살이 지나고 윤정이는 지금 열두살 가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어릴때 양보 잘하고 제일 많이 참던 모습은 진즉에 사라졌다. 열두살 큰 딸은 조금이라도
옳지 않거나, 제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일엔 조목조목 따지고 제 주장을 편다.
2차 성징이 뚜렷해지면서 키도, 몸도 부쩍 자란 큰 딸은 요즘 나와 제일 많이 부딛치는 사람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언니를 따라 발육도, 감정도 발달이 빠른 막내까지 가세해서 집안은 종종
세 여자가 질러대는 고성으로 들썩거린다.
쉰을 앞두고 슬슬 갱년기가 다가오느라 나도 내 감정에 대한 숙제를 풀어야 할 시기에 폭풍성장중인
두 딸과의 동행은 자주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 해 진다. 한바탕 소리 질러가며 싸우고, 그리고는
다시 부벼대며 뒹구는 날들이다. 아들의 열두살을 다시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러는 윤정이가 얼마전 지난 내 생일날 사랑스럽고 깜찍한 이벤트로 나를 감동시겼다.
생일 전날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엄마'라는 그림책이 필요하다며 찾길래 서가를 뒤져 찾아 주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생일날 윤정이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다가와 내 책상위를 가보라는 것이다.
책 상 위에는 '엄마, 윤정이예요. 피아노 뚜껑위를 보세요'라고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아하.. 오늘은 무슨 날 시리즈구나... 짐작이 되었다.

'하야시 아키코'가 그림을 그린 '오늘은 무슨 날?'이라는 그림책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 아이는
엄마 아빠의 결혼 기념일을 맞아 엄마에게 집안 여기 저기에 쪽지를 숨겨두고 찾게 한다. 엄마는 딸의
쪽지가 이끄는대로 거실에서 계단으로, 2층으로, 딸들 방으로, 현관으로, 심지어 마당의 연못 안에 떠
있던 봉지까지 건져내어 그 안의 쪽지를 찾아 가며 확인하는데..
그 쪽지의 끝은 우체통 안에서 끝나고 그 안엔 작은 선물 상자가 들어있다.
 이 책을 읽은 후로 윤정이는 내 생일때마다 온 집안에 쪽지를 숨겨두고 나로 하여금 그 쪽지를 따라
집안을 누비게 한다. 물론 쪽지의 끝엔 윤정이다운 깜찍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도 나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춤을 추며 딸이 숨겨 놓은 쪽지를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윤정이와 이룸이도 웃으며 함께 했다.
책상에서 컴퓨터 앞으로, 다시 현관 신발주머니 안에 이어, 책꽃이 사이와 우편함과 피아노 뚜껑과
부엌 정수기 뒷편으로 이어지던 쪽지는 윤정이 책상 서랍에서 끝났고 그곳을 열었을때
윤정이가 만든 '우리 엄마'라는 그림책과 언니가 하는대로 고대로 따라 만든 이룸이의 그림책까지
들어 있었다.

A4지를 스테플러로 찍어 만든 그림책 제목은 '우리 엄마'였다.
한장씩 넘기면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이쁜 엄마죠'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여자죠'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 엄마는 훌륭한 일꾼이고'라고 적힌 글 아래에는 방충모자를 쓰고 풀을 뽑는 내 모습이 그려져있고
'우리 엄마는 착한 요정! 내가 슬플때면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죠'라는 그림 아래엔 울고 있는 저를
내가 안아 다시 웃게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뒷쪽에는 '우리 엄만 개그맨이 되거나  가수가 될 수 있죠! 어쩌면 방송작가나? 사장이 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우리 엄마가 되었죠!
우리 엄마는 최고 엄마! 나를 자주 웃게 해요. 아주 많이~!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사랑한답니다.~ (영원히~)' 라고 써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아마도 나인 그림을 가운데로 아빠, 이룸, 윤정, 필규가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많이 웃었고, 정말 행복했다. 언니를 따라 열심히 만든 이룸이 그림책도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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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캘리그래피에 재미를 붙인 윤정이는 멋들어진 글씨로 가족들이 내게 쓴 편지의 봉투를

일일이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 쓴 제 편지를 내게 읽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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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우리 엄마
엄마! 저 윤댕이 예요(데헷~) 와, 엄마가 벌써 4....40....49.... 살 이예요.
벌써 반 백년을 살으셨어요. 요즘따라 너무 힘들어 보이시네요. 그래서 제가 쿠폰도
만들었는데... 잘 사용해 지키셨음(?) 좋겠어요. 엄마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고 때리고 난리 칠 거예요. (죄송 ㅎㅎ) 이제 내 후년이면
중학교도 가구요 (으흠~)이제 앞으로 많~은 변화가 천천히
찾아올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엄 . 빠가 이애해 주시면 좋겠어요.
뭐, 물론 엄마와 멀어지겠다는 건 아니예요. 그러니 우리 계속 친하게
지내요! 아직 변한건 아니지만 ㅎㅎ 엄마! 49번째 생일을
온 힘을 다해 축하드려요. 사랑해요~ ㅎㅎ'

이 글을 읽으면서 윤정이는 본격적으로 변할거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눈물이 고였다.
나도 울컥했다. 윤정이는 제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예전의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날들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앞으로 더많이
엄마와 싸우고,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다.

그런 앞날을 생각하며 윤정이도 나도 새삼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천천히

변해온 것들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견하고, 애틋하고, 먹먹한 마음이었다.
나는 윤정이를 꼭 안아 주었다. 서로 끌어안은채 우린 훌쩍였다.

"그러면 어때. 그게 다 자라는 일인데.. 더 많이 싸우고, 대들고, 난리치면서 자라도 돼.
그러면서 너도 더 많이 알아가고, 엄마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될꺼야. 좋은 일이야. 괜찮아.
그게 자라는 일이야. 다 그렇게 자라는거야. 엄마도 그랬어. 그래도 우린 계속 사랑할꺼잖아.
아무리 싸우고 미워해도 다시 안을 수 있잖아. "

어리고, 착하고, 순하던 딸이 이렇게나 자랐다.
그리고 내게 앞으로 저 답게 더 많이 변하고 커 갈것임을 분명하게 예고했다.
언제까지나 착한 딸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딸은 없다. 늘 착하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다.
윤정이는 열두살 답게 잘 자라고 있다. 갈등을 각오하고서라도 제 주장을 굽히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고, 납득이 되면 사과할 줄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감정을 조절하는데 서툰 엄마라서 자꾸 자라느라 목소리가 커지는 딸과 자주

부딛치겠지만 그렇게 지나는 시간들이 나 또한 자라게 할 것이다.

괜찮다. 윤정, 잘 싸우고, 멋지게 난리치고, 잘 풀어가며 지내보자.

단 때리는 건 좀 고쳐보고..ㅋ

순둥이, 착한 딸은 잊어버렸다. 명랑하고, 목소리 크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물러서지 않는 씩씩한 딸과 동행하는 날들을 더 많이 고대하고 있다.
멋지다. 잘 하고 있다.
늘 응원한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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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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