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버렸다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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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감기로 시들시들하고, 읽어야 하는 책들은 쌓여가고, 겨울짐 정리며 집안일도 넘치는데

어쩌자고 봄은 무르익어 사방에 푸른것들이 쑤욱 쑤욱 자라난다.

냉이는 여러번 캐 먹었고, 쑥도 뜯을만하게 돋았는데다 돌나물도 슬금슬금 벋어가는데

언덕배기엔 애기 파인애플 잎사귀같이 생긴 원추리가 도도독 고개를 내밀었다.

"봄에는 역시 원추리를 먹어야지"

오래전 직장 다닐때 이른봄에 찾아갔던 용문사 근처 산채나물 식당에서 원추리 나물을 발견한

직장 선배가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그분 덕에 나도 원추리 나물을 처음 먹어 보았다.

달큰하기도 하고, 살캉거리기도 하는 봄맛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선배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비슷했다.

원추리 맛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백년쯤 살아야 하는 가 보다.

윗밭 가장자리에는 대추나무, 모과나무, 자두나무같은 과실수가 자라는데 그 밑 비탈길은 온통 원추리밭이다.

봄에 새싹처럼 얼굴을 내미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나물이란것도 모르고 몇 해를 살기도 했다.

한 여름에 주홍빛 꽃을 피워서 꽃나무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원추리라니, 내가 오래전에 맛나게 먹었던

원추리라니..

때를 놓치면 너무 자라나서 금방 질겨진다. 봄 나물은 마악 돋기 시작할때 뜯어 먹는 것이 제일 보드랍고 맛있다.

할 일이 많아서 모른척 하려다가 금방 때가 지날것 같아서 찬바람 맞으며 원추리 싹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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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파는 것은 이미 한뼘도 넘게 웃자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손가락 한마디쯤 자란 것만 먹는다.

이때의 원추리는 살짝 데치기만 해도 연하고 부드럽다.

소금 넣고 끓는 물에 데쳐서 꼭 짠 다음 들기름, 고추장, 소금, 파, 마늘, 오미자 청 약간 넣고 통깨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원추리는 냉이보다 더 부드럽다. 된장국에 넣어도 되고, 기름하고 소금으로만 깔끔하게 무쳐도 맛나고

집간장을 넣으면 깊은 맛이 나고,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무쳐도 된다. 봄나물은 어떤 양념으로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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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조금씩 먹어보더니 "맛있네요. 괜찮네요" 한다. 그래도 덥석 덥석 젓가락이 오지는 않는다.

머위도 처음에는 질색을 했었지. 냉이도 아주 조심스럽게 맛을 보고 쑥국도 신중하게 숟가락을 넣었다.

익숙하지 않은 맛, 그 계절에만 살짝 느껴볼 수 있는 맛에 아이들이 처음부터 환대를 할 리는 없다.

그래도 여러번 먹다 보니 이젠 머위맛도 알고, 쑥으로 부친 부침개를 그리워 하기도 하고, 튀김으로 먹었던

뽕잎과 아카시아꽃을 찾기도 한다. 원추리 맛도 봄마다 그렇게 조금씩 스며들어서 이윽고는 그립고 찾게 되는

잊을 수 없는 맛이 될 것이다.

봄에 돋아나는 푸른것들은 어느것이나 모두 먹을 수 있다고, 질경이도 개망초도, 소리쟁이와 꽃다지도 모두

나물이라고 하지만 마당있는 집에 내려와 9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모르는 맛이 많다. 대부분은

캐서 궁리를 해 가며 해 먹기가 귀찮아서 모른척 하는 맛들이다.

그래도 원추리맛은 알아버렸다.

4월초에 맛볼 수 있는 이 보드랍고 살캉거리고 달큰한 맛을 알아버렸다. 알고나면 귀찮아도 몸이 움직여진다.

게으르면 맛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알기에, 한 번 지나가면 꼬박 1년을 다시 기다려야 맛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굼뜬 몸을 움직이다.

원추리는 매일 쑥쑥 자랄테니 부지런해야 한 일주일 맛을 볼 것이다.

손 바닥 크기가 넘어버리면 미련을 버리고 쑥이나 돌나물을 캐러 다녀야지.

곧 머위도 얼굴을 내밀것이다. 쑥부쟁이 싹들도 솟아날 것이다. 지난 봄에는 긴가민가해서 제대로 못 챙겨 먹은

아스파라거스도 올해는 새 순이 나올때마다 부지런히 잘라서 먹어야지.

이제 이런 맛을 알아버렸으니 몸은 더 고달프게 생겼다.

계절이 듬뿍 담겨있는 맛, 마트에서는 절대 돈 주고 살 수 없는 맛, 살아 있는 맛..

그 맛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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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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