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시가 나와 생생육아

두 딸들.jpg


오랜만에 딸들과 걸어서 등교를 했다.
집에서 나올땐 춥다고 웅크리더니 가을볕을 쬐며 걷다보니 몸이 후끈 더워졌다.
맑고 화창한 가을날이다.
노랗게 익은 벼들로 가득한 논들을 지나 수확한 깻단을 묶어 놓은 밭을 지나갈땐 고소한
들깨 냄새가 났다.
밭에선 한창 김장무와 배추가 자라고 있다. 돼지감자 이파리들은 꺼멓게 말라간다.
부추는 여전히 파릇하고 상추도 아직 보이고 성큼 자란 시금치며 새들새들한 쪽파들이며
지나는 길은 사방 익어가는 가을이 가득하다.

한동안 윤동주의 동시들을 외우며 걸었는데 요즘엔 동시를 지으며 걷는다.
궁둥이 큰 무당거미며, 길에서 만난 달팽이며, 동네 강아지나, 밭에서 자라는 푸성귀들,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다 시가 되어 말을 걸기 때문이다.

"아까 길가에서 주워서 풀숲에 놓아준 달팽이로 동시를 지어보자"
"팽이 팽이 달팽이" 이룸이가 시작을 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동시, 있어요"
윤정이가 일러준다.
"그래? 그럼 조금 다르게 해야지. 이미 지은 시랑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
팽이 팽이 달팽이
팽이 팽이 내 팽이..
그 다음에 누가 지어 볼 사람
"느릿 느릿 달팽이"
아이들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한다.
"빠릿 빠릿 내 팽이
히히.. 이렇게 이으면 재밌겠다"

"동시는 쉬운 말로 지어야 해. 어렵지 않고 누가 읽어도 바로 알 수 있어야 좋은 동시지.
의성어, 의태어를 써도 좋고, 쉽고 재미난 말이 반복되어서 리듬처럼 느껴져도 좋고.."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개 '말복이'로 동시를 지어볼 사람?"
"말복이는 말복 지나도 살아있다"
윤정이가 시작한다.
"재밌는데 말복이가 뭔지, 사람인지 개인지 잘 모르잖아.

비닐하우스에 사는 개 말복이
말복 지나도 살아있다
이렇게 시작할까?

오래 오래 복을 누리라고 지은 이름처럼
말복아 내년 복날에도 살아 있어라

이건 어때?"

"그 내년 말복에도 살아 있어야지요"
"물론 그렇지..히히"

"얘들아, '아욱'은 이름이 정말 웃기지 않니?
엄마는 아욱 볼때마다 이름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욱 가지고도 시를 지어볼까?"

"저 김장무 좀 봐. 벌써 이룸이 종아리 만큼 자랐다. 조금 지나면
윤정이 종아리만큼 크겠지? 김장무로도 재미난 시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애."

"이룸아, 우리 지난주 백일장 대회 나갔을때 낙엽 밟으면서 지은 시, 생각 나?"
"와사삭 바사삭
내 입이 과과를 먹느라 와사삭 바사삭" 이룸이가 신이 나서 읊는다.
"맞아 맞아. 그렇게 시작했지"

시는 어려운게 아니야. 특히 동시는 정말 어렵지 않아.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우리가 잘 아는 것들을 오래 오래 살펴보고 느껴지는 대로 툭툭 쓰는 거야.
너희들은 매일 이렇게 좋은 풍경들을 보면서 살잖아. 매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속엔 보고 들은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 있어. 그걸 꺼내봐.
너희는 너희들이 이미 시인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돼.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길가의 미류나무,
구불 구불한 시골길, 흘러가는 냇물, 까치, 까마귀, 박새랑 참새랑, 낙옆같은 것들로
길냥이들과 과수원과 벌레들과 풀들로 얼마든지 좋은 시를 만들 수 있어.

두 딸과 이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학교까지 걷는 동안 나는 세 편의 동시를 완성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어느새 내가 시인이 된 것처럼 동시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생각해내는 참신한 표현들이 시를 더 시답게 해주는 건 물론이다.


아욱

아욱은 이름이 참 웃겨
푸릇푸릇 이쁘게 생긴 채소인데
이름이 아욱이라니
아 - 욱 -
꼭 화 날때 내는 소리 같잖아
하지만 아욱 넣은 된장국 한 입  먹으면
아 - 음 - 하는 소리가 절로 나지
이제부터 아욱을 아음이라고 불러야겠다

김장무

밭에 김장무가 내 종아리만큼 자랐다
조금 더 지나면 언니 종아리만큼 되겠다
나중에는 엄마 종아리만큼 커질까?
그래도 그래도
아빠 종아리만큼은 안돼
그건 너무 굵어!

가을

와사삭 바사삭
 내 입이 과자를 먹느라
와사삭 바사삭

와사삭 바사삭
내 발이 낙엽을 먹느라
와사삭 바사삭

맛있다
가을

걸으면 시가 나온다.
하루 하루 지나는게 아까울 만큼 예쁜 가을날엔 아이들과 천천히 풍경속을 걸어가며
시인이 되보는 거다.
차를 타면 5분만에 휙 지나가는 풍경들속에 이렇게 고운 시들이 숨어 있다.

자연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시인이 되어가고 있다.

나를 일깨우는 꼬마 시인들 덕분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고운 계절 듬뿍 누려가며 올 가을엔 멋진 시를 많이 찾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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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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