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책

20151118_사진.jpg »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던 개 똘이와 앙큼이는 나이가 같은 친구여서 아이스크림을 두고 기싸움도 하고 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도 하며 우정을 다졌다. 똘이는 할아버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떴다. 똘이 뒤로 신발 신은 할아버지 발이 보인다. 사진 권귀순.

 아이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그중 하나다. 같이 지내던 가족이 더 이상 곁에 없단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지?

 “할아버지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할아버지는 그럼 하느님이 됐어?”
 “아니. 이제 하느님이랑 같이 하늘에서 널 지켜볼거야.”
 “할아버지는 하얀 단지 안에 들었잖아. 어떻게 하늘로 올라갔어?”
 “할아버지께서 보고싶을 때 찾아오라고 뼈는 남겨놓고 가셨어.”
 “그런데 뼈를 어떻게 발라냈어?”

이게 아닌데 …. 점점 엽기 대화가 되어갔다. 올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앙큼군의 관심사는 의문의 ‘하얀 단지’에 꽂혔다. 할아버지는 화장으로 납골당에 모셔졌다. 앙큼은 할아버지 유골의 온기가 남아 있는 항아리를 감싸안고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그렇게 느꼈다.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생일 케이크 맛있게 드세요.” 하늘에 대고 엉뚱하게 외친 앙큼이는 할아버지가 뼈만 남겨두고 상어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 장례식날 황사 가신 하늘에는 상어 모양의 흰구름이 바람을 따라 가벼이 헤엄쳐 다녔다. 그날 이후 왜 그 단지에 할아버지 뼈가 남아있는지 시시때때로 물었다. 아빠가 거실에서 빨래를 널다 갑자기 울컥 토해낸 울음도 아이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같이 살진 않았지만, 때늦게 세상에 나온 막둥이 손자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기력이 떨어져 첫손주처럼 자주 업어주진 못해도 잔정 많은 할아버지는 손자가 내려올 때마다 손잡고 학교 운동장에 데려가 놀게 했다. 앙큼과 비슷한 때 태어난 개 똘이를 데리고서. 둘 아니 셋은 운동장의 소란스런 공기 사이로 ‘우정’을 나눴다. 기묘하게도 똘이마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주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우정의 삼각축은 한 꼭짓점만 남기고 한순간 무너졌다. 
 
아이의 가슴속에 상실은 어떤 무늬일까? 
요즘엔 낙엽으로 하트 만들고 놀다가 가끔 소멸을 이야기한다.  

 “낙엽은 흙이 되고, 사람도 흙이 된단다.” 
 “엄마도?” 
 “응.” 
 “엄마는 흙 되지마. 알았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애원하는 앙큼의 간절한 눈빛에 
 “응.”

못지킬 약속을 하고야 만다. 울상이던 얼굴에 방긋 웃음이 피어나는걸 보고는, 생명있는 모든 것은 우주로 돌아가 ‘0’이 된다고 말하려다 그만둔다. 
불쑥 역사적 인물이 살아있냐고 묻는 때도 있다.

 “엄마, 신사임당은 어디 살아?”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
 “마음 속에 살면 어디서 만나?”
 “옛날에 살았던 분이라 돌아가셔서 만날 수는 없어.”
 “아이~.” 
 “저 나무는 신사임당을 만났을지도 몰라. 사람보다 훨씬 오래사는 나무한테 물어볼까?” 

20151118_책표지.jpg » <유령이 된 할아버지> (킴 푸브 오케손 글, 에바 에릭손 그림 김영선 옮김/소년한길(2005))
올들어 유한과 무한의 시간을 돌려 묻던 꼬마 철학자 앙큼군이 얼마 전 유치원에서 <유령이 된 할아버지>라는 책을 골라왔다. 1958년생 덴마크 작가가 쓰고 스웨덴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책이다. 현실을 ‘레알’로 받아들이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판타지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잔잔한 영화장면을 돌리듯 그렸다.(작가는 영화학교를 졸업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육신을 관에 넣어 땅에 묻는다거나 불에 태워 한줌 재로 만드는 장례의 방식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제 나름으로 이별과 부재를 받아들인다.

책은 슬프다. 그러면서도 슬프지 않다. 
에스본의 단짝친구인 할아버지는 심장병으로 길을 가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라곤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기억력도 나빠진 외할머니 한 분뿐이다. 너무나 슬퍼서 펑펑 우는 에스본에게 “할아버지는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셨단다”라고 엄마는 위로한다. 장례식날엔 관 속에 있는 할아버지가 걱정됐지만 아빠는 “땅 속으로 들어가실 거야. 그리고 흙이 되실 거야”라고 말한다. 날개 달린 천사로 변하는 모습도 흙으로 변하는 모습도 에스본은 상상이 안 된다. 이 책의 슬픈 기운은 여기까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밤마다 벽을 뚫고 들어온다. 앙큼이는 이 장면에서 ‘그러면 그렇지’ 굉장한 진실을 알게 된듯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빠, 사람이 죽으면 유령이 되지요? 벽을 뚫고 다닐 수도 있지요?” 앙큼은 책을 빌려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이렇게 물었다 했다. 유치원 친구들과 유령 할아버지를 낄낄낄 돌려봤다 했다. 유령으로 ‘트랜스포메이션’한 할아버지는 장난꾸러기처럼 벽 통과 신기를 보여주고 ‘우후후후’ 유령 소리도 내며 에스본을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엄마아빠한테 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줘도 “그건 꿈이야”라며, 유치원을 가지 않고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유치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앙큼에게도 솔깃한 말. “엄마, 나도 기침나니까 유치원 안가도 되지요?”(앙큼이는 무언가 부탁할 때 예쁘게 높임말을 쓰곤 한다.)  

책은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빠트리고 간 걸 찾아나선다. 뭔가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된다면서. 할아버지 집 거실에 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할아버지의 인생이 불려나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형의 빨간 자전거를 물려받았던 것, 너희 할머니와 사랑에 빠져 입맞춤했던 일, 네 아빠가 간난아기였을 때 내 멋진 양복에 오줌 쌌던 일, 물에 젖은 강아지 냄새가 나던 우리 중고차, 그리고 고양이 짐리가 생각나.”

빠뜨린 걸 찾으러 나선 다음날엔 시내를 둘러보다 할아버지 젊은 시절의 회상이 이어진다. 
 
 “박제한 코끼리가 있던 커다란 박물관, 아주 재미있게 봤던 권투 경기, 내가 일했던 공장, 배를 타고 갔던 북극 여행, 지독히도 맛없던 개구리 요리, 그리고 친구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양동이에 토한 것, 네 할머니와 단둘이서 비행기로 모로코에 가서 낙타를 구경했던 일, 결국 못해봤지만 비행기에서 낙하산 타고 뛰어내리고 싶어했던 것, 메아리 들으려고 계곡에 대고 소리쳤던 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던 일.”

앙큼이는 ‘아빠가 간난아기였을 때 오줌 쌌던 일’과 ‘친구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양동이에 토한’ 대목에서 가장 즐거워한다. 앙큼이 아빠가 네살 때 버스간에서 똥싼 얘기, 엄마 다섯 살때 변소에 꽃신 빠뜨린 얘기까지 덧붙이면 까르르 넘어간다.

20151118_그림.jpg » 저 붉은 기운도 곧 소멸된다. 하지만 어둠과 부재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붉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순환된다. 그림 권귀순.

밤새 할아버지랑 논 에스본은 아침 식탁 위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유치원에는 당연히 가지 못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할아버지는 드디어 빠뜨린 걸 생각해냈다. 

 “할아버지랑 축제에 갔다가 멀미 날 때까지 놀이기구 탄 거랑, 나무 심으려고 할아버지 집 마당에 커다란 구멍을 판 일, 제가 튤립이 있는 화단에 공을 차서 할아버지가 소리친 일도 생각나고요. 자동차 전시회에 가서 스포츠카 구경한 일, 재미 없는 영화를 보다 둘다 잠들어 비린 일도 생각나요. 모래성을 쌓을 때 할아버지가 도와준 것, 할머니가 간 요리를 하자 같이 얼굴을 찌푸리며 할머니 못 듣게 투덜댄 일. 낚시 가서 물고기 한 마리 못잡은 적도 있었지요. 아, 할아버지가 간지럼을 태우는 바람에 사탕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뻔한 일도 생각나요. 할아버지는 또 재미난 방귀 이야기도 많이 해 줬잖아요.”

그건 사랑하는 손자와의 작별 인사. 서로 껴안고 잠깐 같이 울었다. 에스본은 할아버지 사진을 걸어놓기로 하고, 할아버지는 에스본의 귀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 바람이 에스본의 발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할아버지갑 벽을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침대로 갔다. “내일은 유치원에 가야겠지.”
아이는 할아버지를 보냈지만 보내지 않았다. 가슴 속에 늘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나를 본다고 했지요?” 

앙큼군이 죽음을 이해할 순 없지만, 슬픔과 위로, 소멸과 생성의 순리를 조각 맞추듯 깨달아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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