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원_ 구층암에서 진행된 ‘나는 쉬고 싶다’ 후기 함께 꿈꾸는 세상

동짓날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밤이 길고 깊은 날, 동지는 어둠이 빛나는 날이기도 하다. 동짓날은 밑바닥을 친 어둠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밝고 투명함에 자리를 내어주는 날이며, 어둠과 밝음이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날이다.

해마다 동짓날이면 구례 사람들은 동지모임을 한다. 동지모임은 팥죽을 먹으며,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오는 해엔 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보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이다.

2012년 동짓날, 구례 사람들이 구례성당 만나의집(만남의집이 아니라 만나의집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빠져나와 가나안으로 갈 때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여호와로부터 받은 특별한 식량이다.)에서 동지모임을 하는 동안,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맘 편히 쉬고 싶은 여성 11명은 화엄사 구층암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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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구층암

구층암은 화엄사 대웅전에서 지리산을 향해 5분쯤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절집이다. 구층암은 사방이 대나무로 쌓여 있는데다가 계곡이 바로 옆에 있어 여러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구층암의 소리들은 어느 시간, 무중력 상태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게 잠들어 버린다. 소리의 신비, 찰나의 고요는 도량석 전 별빛 아래 서있을 때, 큰 비와 눈이 내리기 직전 세상이 검은 빛으로 변할 때, 천불보전이 달빛으로 가득할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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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이름만으로는 9층 석탑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 이곳엔 그지없이 소박한 3층 석탑과 승방, 천불보전, 그리고 모과나무 기둥이 있다. 우리나라 절집 중 모과나무를 모양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곳은 구층암이 유일하지 않은가 싶다. 모과나무를 몹시 사랑한 어느 스님이 절집 마당에서 자라던 모과나무를 승방과 대중방 기둥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모과나무는 죽어서도 구층암과 함께 하며 구층암을 향기 나게 한다. 행복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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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석

새벽 3시, 이 땅의 절집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목탁과 염불소리로 세상을 깨우고 스스로 깨어 세상 안에 존재함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목탁과 염불소리에 주섬주섬 양말을 신고, 잠바를 걸친 후 마당을 나섰다. 종종 걸음으로 구층암을 나서 각황전까지 오는 동안 침묵과 고요를 뚫고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집안엔 별일 없는지, 식구들은 밥이나 챙겨 먹는지, 집 나간 아이의 잠자리는 따뜻한지, 2박3일 편히 쉬겠다고 집을 나섰으나 우리는 여전히 집안에 있었다. 50년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절, 지심귀명례, 절, 지심귀명례, 절... 오늘 하루, 다들 잘 지내길,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존재들이 평안하길, 나를 존재하게 한 기억의 저편과 내 맘을 불편하게 한 이편의 흔적들이 평화롭게 흩어져버리길, 이렇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니 나는 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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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그리고 차

구층암 공양은 집 밥과 다르지 않다. 맛도 그렇고, 정성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다. 17년째 구층암 공양간을 지키는 보살님의 솜씨는 내 어머니의 솜씨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집을 나선 후 맛보기 힘들던 어머니의 맛과 느낌, 아무래도 구층암에 자주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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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후, 예불 후, 산책 후, 구층암에서는 당연히 차를 마신다. 차에 관심 많던 덕재 스님은 5년 전 구층암에 들어오며 차와 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 아래에서, 자연의 기운을 내면화시킨 차,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 비비고, 덖은 차에선 사람과 자연의 숨결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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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관심을 보이는 우리를 덕재 스님은 구층암 뒤 대나무 밭으로 안내했다. 덕재 스님은 대나무 아래 차나무에서 딴 잎이 최고라고, 어디처럼 반듯한 밭에서 크는 차가 아니니 따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란 차라야 제 맛이 난다고 했다. 구층암 차나무들은 따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아 그렇구나 그래서 입 안에 향기가 오래 머무는 구나, 부드럽구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소중한 마음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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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삶

화엄사 각황전 뒤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상과 함께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전하는 분이 합장한 채 서있는 4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연기조사는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며 무엇을 소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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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어나며, 생명평화 100배 절명상을 하며, 4사자삼층석탑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연기암 관음전에서 눈앞에 펼쳐진 지리산자락을 바라보며, 매순간 놓치지 않고 계속되는 맹세와 기원, 우리의 삶은 서원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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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마무리할 때까지 늘 신세지고, 언제나 주고받으니, 나와 너를 위해서 매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못하다. 내 안은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다. 분노와 성냄이 온 몸에 펴져나가 나를 헤치고 남을 헤칠 때가 많다. 너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원, 서원의 삶이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으로 믿는다.

 

쉼, 모여야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게 쉼인데 그런데 우리는 왜 모일까, 모여서 먹고, 모여서 웃고, 모여서 걸으면 왜 힘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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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황을 말하고, 주변의 공감을 얻고, 비슷한 상황에 대해 듣고, 그러면 마음이 열린다. 나에게 닥친 아픔과 힘듬이, 어떤 건 내 마음을 바꿔야 하고, 또 어떤 건 세상을 바꿔야만 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외면했었는데, 함께 갈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과 손잡게 되니 든든해진다.

한 달에 한번, 위안과 위로, 평화의 시간으로 초대되니 참으로 감사하다. 이 시간은 나보다 더 힘겹게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내 언니와 동생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시간이다. 너의 존재가 나에게, 우리에게 따뜻함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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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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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