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마음도 골고루 울타리없는텃밭

 20081120, 구례로 내려왔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자락으로 내려오던 그날, 세상엔 눈발이 날렸다. 밤재터널을 통과하면서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서운함과 기대가 엉킨 정체가 분명치 않은 눈물이었다.

구례는 따뜻한 곳이었다. 겨울이면 손발이 시려 삶 자체가 움츠러드는 내게 구례는 따뜻함을 선물해줬다. 날도, 사람도, 집도 따뜻했다. 구례에 내려와 맞은 첫 동짓날엔 이웃들과 팥죽을 나눠먹었다. 집들이를 겸한 구례 입성 신고식이었다. 그날 이후 동지팥죽과 동치미는 구례 사람들과 우리 가족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안산과 수원, 서울 중곡동, 낙성대 등을 떠돌다 연신내에 정착한 게 199811월이니 연신내에서 꼬박 십년을 산 셈이다. 연신내에서의 10년을 회상할 때면, 북한산국립공원, 진관사, 물빛공원 등이 떠오른다. 지금보다 젊었던 그때, 나는 연신내에 사는 사람들과 두부를 만들고, 술을 담고, 산에 오르고, 새벽까지 술자리를 떠돌았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가끔씩 의문이 든다. 행복했던 연신내 삶을 정리하고 구례로 내려온 이유가 뭘까? 지리산이 불러서일까, 따뜻함을 찾아서 남쪽으로 온 걸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리되진 않지만 어쨌거나 나는 운 좋게 구례로 내려왔다.

 

구례로 온 나는 맘 동할 때면 지리산에 오르고 싶었고, 사람들과 맘껏 함께 나누며 살고 싶었다. 지리산에 오르는 일이라, 생각해보니 지리산 케이블카 덕분에 노고단을 쉼 없이 오르내렸다. 눈 감으면 노고단의 여러 빛깔이 삼삼히 떠오른다.

구례로 내려와 사람들 속에서 웃고 울고 싶었던 나는 울타리없는텃밭’(이하 울터)을 시작했다. 울터는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지혜와 힘을 빌어서, 즐기면서 하고 싶다는 욕구가 만들어낸 것이다.

울터는 국시모 회원들의 계모임으로 지리산자락에서 이뤄지는 일이니 지리산사람들 회원들의 참여가 높다. 울터는 함께 노동하고 적정하게 분배하며 반드시 기부하겠다고 말하지만 공동노동에 빠지는 사람도 많고, 반드시 기부하지도 못하고 있다. 점차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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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울터는 돋을볕오미자계, 된장계, 김장계 등 3종류였다. 2009년 시작한 돋을볕오미자계는 울터의 장수, 인기 계모임이다. 4기 계가 마무리된 414일에는 계원과 계원 가족, 지인 등 20명이 참석하여 계의 활성화를 위한 제안, 공동 노동, 오미자효소의 효능에 대한 폭발적 간증 등이 이어졌다. 15명이 참석하고 있는 5기 계는 930일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이다. 20144, 맛난 오미자효소와 술을 나눠 갖게 될 것이다.

된장계는 홍현두 회원이 있어 가능한 계모임이다. 남원 산동교당 교무인 그는 과거 원불교에서 장 만드는 일을 했던 노하우를 된장계에 쏟아붓고 있다. 된장계가 만들어낸 된장이 맛난 이유는 그의 손맛에 있다.

2013, 3기를 맞이한 된장계는 1122일부터 24일까지 캠프로 진행되었다. 된장 만드는 일은 캠프로 진행한다? 아마 국내 최초일 것이다. 메주를 만들기 위해 서울, 대구, 전주, 남원, 구례 등에서 모인 16명의 계원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1, 2기 때는 아침 일찍 만나 밤늦게까지 온통 일만 했는데 이번에는 일도 하고,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된장으로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이야기도 하고, 먹을거리에 대한 강의도 듣고, 그렇게 23일을 지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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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계는 구례에 사는 5가족이 모여 박두규 시인 집에서 했다. 첫날엔 박두규 시인 집에 있는 배추를 뽑아 씻어 소금에 절였고, 다음 날엔 속을 넣었다. 계원들은 갓 담근 김치를 먹으며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김치가 만들어졌는지 의아해했다. 김장추진단장 박애숙 회원의 정성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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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터는 엄청나거나 특별한 일을 하진 않는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 누구나 해야 할 일들을 함께 할 뿐이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엔 논과 밭, 야산에서 먹을거리를 찾아다니고, 가을엔 봄과 여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거둬 저장하고, 겨울엔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먹을 뿐이다.

생명을 받았으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혼자가 아니라 내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이웃과 나누며 할 뿐이다. 그래야 신나고, 힘도 나고, 더 따뜻하고, 맛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울터는 아마도 우리가 원한다면 뭐든 하지 않을까 싶다. 논농사도 함께 하고, 고추장도 만들고, 벌꿀도 생산하고, 못할 일이 없다. 그런데 삶을 공유하기 위해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게 먼저이고,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한 사람에 의존된 계모임은 그 사람이 사정이 생기면 거기서 멈출 수 있으니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게 골고루 나눠야 한다. 또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삶의 눈높이를 맞추는 건, 협력과 배려, 신뢰를 위한 기본이니까!

 

글_ 윤주옥 , 사진_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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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