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감춘 보물들 빽빽한 ‘천의 얼굴’ 걷고 싶은 숲길


 [걷고 싶은 숲길] 제주 거문오름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던 ‘자연 그대로’
 곳곳에 동굴…제주 근현대사 상흔 고스란히
 

거문오름 들머리는 억새밭을 지나 빽빽한 삼나무숲으로 이어진다. 삼나무는 1970년대 중반 심은 것이다.  003.jpg

    거문오름 들머리는 억새밭을 지나 빽빽한 삼나무숲으로 이어진다. 삼나무는 1970년대 중반 심은 것이다.

 

 

 제주도는 오름의 나라다. 오름이란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도 말이다. 368개에 이르는 오름들이 한라산 주변에 깔려 있다. 세계 최대 화산섬으로 꼽히는 시칠리아 에트나섬의 기생화산 250여개를 훌쩍 넘어선다. 제주도민들에게 오름은 삶 자체였다. 오름 곁에서 태어나 오름 앞에서 살다가 오름 기슭에 묻혔다. 분화구들엔 도민의 고통스런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라산만 1천여 번 오르며 300여 개 오름 샅샅이 뒤진 김종철씨
 
노박덩굴1.jpg오름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제주도에 언론인이자 산악인 김종철(1927~1995)이 있다. 한라산만 1천회 이상 올랐던 그는 오름에 주목했다. 300여 개의 오름을 샅샅이 뒤져 <제민일보>에 183회에 걸친 탐방기를 연재하며 오름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그의 공들인 탐방작업은 1995년 세 권의 책으로 묶여 정리된다. <오름 나그네>(전3권·높은오름 펴냄)가 그것이다. 각 오름의 실체와 가치를 집대성한 첫 오름 안내서다. 암 투병 중이던 그는 책이 나오고 두 달 뒤 오름 기슭으로 돌아갔다.
 김종철의 오름 사랑은 오름 연구와 ‘대중화’에 불을 댕겼다. 제주도는 각 부문 전문가들을 동원한 종합적인 오름 조사를 시작해 97년 오름의 모든 것을 담은 보고서 <제주의 오름>을 펴낸다. 오름을 찾아다니는 ‘오름족’이 늘면서 직장마다 오름동호회가 만들어지고, 오름 전문 사이트들이 잇따라 개설됐다. 지난해엔 각 오름의 독특한 이름의 어원을 밝힌 <제주도 오롬(오름) 이름의 종합적 연구>(오창명 지음)도 나왔다.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지정(2007년)은 오름과 용암동굴의 지질학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한 결정판이다. 한라산, 거문오름과 용암동굴계(만장굴·김녕사굴·용천굴·당처물동굴·벵뒤굴), 성산 일출봉이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됐다. 이제 오름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됐다.
 비슷하게 생겼어도 오름들을 하나하나 거닐고 들여다 보면, 제각각 또 철마다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말굽형·원추형·원형이 있고 이들의 특성을 함께 보여주는 복합형도 있다. 여기에 물찾오름·물영아리·원당봉처럼 분화구에 물이 고여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오름들도 있다. 오르고 내려올 때 다르고 아침 저녁 다르며, 흐리고 맑을 때 다르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야생화 밭이었다가, 햇살 머금고 일렁이는 억새 언덕이 되고, 어느새 눈보라 치는 설원이 된다. 어느 오름이든 그 배경엔 할아버지 옷자락처럼 서늘한 한라산 봉우리가 솟아 있다. 
 
 철마다 다르고 아침·저녁 달라…예약 받아 제한적 개방
 

거문오름 숲길에선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을 만날 수 있다.  049.jpg

   거문오름 숲길에선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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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숯가마터. 옛 주민들은 종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등으로 숯을 구워냈다. 1940년대 일본 주둔으로 숯가마의 맥이 끊겼다.


 거문오름은 한라산 북동쪽 기슭에 있다. 제주의 오름동호회들에게도 속내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베일 속의 오름이다. 주민들 사이에 옛날부터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이랬던 거문오름이 지난 7~8월 탐방로를 만들고 국제트레킹 행사를 열면서 그 속살을 드러냈다. 두 달간 공개하고 탐방로를 다시 폐쇄할 예정이었으나, 탐방객들이 몰려들면서 예약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거문오름은 오름의 대표적인 특성을 고루 갖췄다. 말굽형 모습에다 분지형 분화구, 알봉, 용암유출로, 자연동굴 등이 함께 있다. 그 사이로 숯가마터, 움막터, 잣담(돌담) 등 주민들이 살던 흔적과 갱도진지·숙영지터 등 일본군 주둔 흔적들이 생생하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식생을 보여주는 자연 그대로의 거대한 숲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거문오름 숲길 탐방은 주민의 삶과 역사, 지질·식생의 가치와 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여정이 된다. 70년대에 심은 삼나무가 이룬 울창한 숲을 시작으로, 잎지는넓은잎나무(낙엽활엽수)·늘푸른넓은잎나무(상록활엽수)·덩굴식물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5㎞에 이르는 숲길이다. 어둡고 축축한 냉기가 지배하는 숲길이다. 숲도 검고 흙과 돌이 깔린 바닥도 검다.
 다소 가파른 삼나무 숲길을 10여분 오르면 전망이 트이는 능선에 닿는다. 능선길 왼쪽은 수많은 오름들이 펼쳐진 평원이, 오른쪽으론 찬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음침한 분화구 숲이다. 동남 사면은 낙엽수림, 서북사면은 상록활엽수림, 오름 바깥사면은 초지와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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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이 뚫은 갱도진지 중 한곳.

 
 일제 때 만신창이…온갖 수종 우거져 앞 잘 안 보여
 
 서늘한 숲길을 오르내리며 거니는 동안 시커멓게 입을 벌린 동굴들을 수시로 만난다. 28만년 전 용암 분출을 시작한 이래 여러 차례 분출이 이어지면서 숱한 용암굴이 생겼다. U자형의 용암 유출로는 바다 쪽으로 7㎞나 이어지면서 땅 밑에 벵뒤굴·만장굴·김녕사굴·당처물동굴 등 용암동굴을 거느리고 있다. 거문오름 안팎엔 일제 강점기 때 다시 무수한 인공 갱도가 뚫려 분화구 주변은 만신창이가 됐다. 거문오름은 일제의 패망 직전인 108여단 사령부 주둔지였다. 6000여명의 병력이 이곳에 머물며 분화구 안팎으로 무수한 갱도진지를 뚫었다. 길이 60m짜리 갱도 등 10개의 갱도진지와 숙영지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곶자왈 탑방 1.jpg 분출된 엄청난 양의 용암이 바다 쪽으로 흘러내려가며 만든 용암 유출로는 곶자왈(숲이 우거진 돌밭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검은 돌무더기 사이로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식나무·붓순나무 무리를 비롯해 붉가시나무·센달나무·개서어나무·때죽나무·덩굴수국·동백나무 등 온갖 수종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우거져 있다. 붓순나무는 탈 때 연기가 적어 4·3 항쟁 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며 땔감으로 썼다는 나무다.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한 자연 그대로의 탐방로라는 점이 거문오름 숲길의 매력이다. 안내를 맡아 돌밭길을 헤쳐나가던 선흘2리 이장 김상수(48)씨가 말했다.
 “탐방객 중엔 돌투성이의 이 험한 숲길을 왜 정비하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돌덩어리들이야말로 제주 특유의 지질·환경 자원인 곶자왈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름엔 찬 공기가, 겨울엔 더운 공기…‘신령스런’ 뜻
 

검은오름 숲길에서 만난 한라돌쩌귀 꽃. 085.jpg

   검은오름 숲길에서 만난 한라돌쩌귀 꽃.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에선 용암 분출 때 날아올라 떨어져 박혔다는 화산탄의 모습도 관찰된다. 분화구 안쪽에 깔린 바위틈에선 끊임없이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온다. 여름엔 찬 공기가, 겨울엔 더운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분화구 안에서 한라산 800m 이상 고도에서 자라는 식생이 관찰되는 건 이런 환경 때문이다.
곶자왈 탑방 1.jpg용암이 흘러간 자리의 지형이 내려앉아 생긴 용암 함몰구의 식생도 특이하다. 유출로를 따라 형성된 수십m 깊이의 함몰구 주위엔 구실잣밥나무·종가시나무들이, 그 아래쪽엔 동백과 사스레피나무·식나무들이 보이고, 그 밑엔 고사리류가 깔려 있다. 바닥엔 이끼류가 번식한다.
 분화구 주변의 식생은 다양하지만 수백 년씩 묵은 고목은 보기 힘들다. 김상수 이장은 “오래된 나무들이 많지 않은 것은 깊이 뿌리 박을 수 없는 지질 특성 때문”이라며 “어느 정도 자라면 쓰러져 흙으로 돌아가 어린 나무들에 영양 공급원이 된다”고 말했다.
  5㎞의 숲길은 볼거리 느낄거리가 무수히 깔린 초록의 보물창고와 같다. 모든 것을 섭취하고 느끼려면 안내인의 발끝을 따라다니는 3시간 산책이 짧기만 하다. 숲길은 되도록이면 천천히 거닐며 보고 즐기는 게 좋다. 발길을 재촉하는 안내인을 설득해 쉬엄쉬엄 오래 거닐며 머물다 나오시길 권하고 싶다.
 거문오름은 한라산 동북쪽 기슭, 조천읍 선흘리와 구좌읍 덕천리 사이에 있다. 선흘2리 노인회관이 탐방의 출발점이다. 거문오름(검은오름)의 ‘거문’은 신(神)을 가리키는 검·굼·곰·감 등에서 기원한 말로, 신령스런 오름을 뜻한다. 여러 곳의 검은오름 중 동쪽의 동거문오름에 비해 서쪽에 있어 서거문오름이라고도 한다. 정상 해발 높이 456m, 지상 높이 112m,  분화구 깊이 108m.
 
 제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여행쪽지

 

더마파크의 기마공연 _칭기즈칸의 검은 깃발_ 한 장면. 397.jpg

   말을 주제로 한 대규모 공원 ‘더마파크’


   
거문오름 숲길 탐방=최소한 2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조천읍 선흘2리 사무소 (064)782-5479. 선흘2리 이장 김상수씨 010-2895-0980. 평일엔 하루 100명, 주말·휴일엔 200명으로 탐방 인원을 제한한다. 주말·휴일엔 예약이 밀려 한달 전에 해야 한다. 선흘2리 노인회관에 마련된 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아 인솔자의 안내로 거문오름을 둘러본다. 5㎞ 거리, 3시간 소요. 평일엔 오전에만 9시·10시·11시 세 차례 출발, 주말·휴일엔 오전에만 5차례 출발. 문화·환경 교육을 받은 선흘2리 주민들 6명이 탐방 인솔자로 활동한다. 능선의 바람이 거세다. 두꺼운 겉옷과 생수 준비 필수. 거친 돌밭길이 많으므로 등산화도 필수다.
 
요트2.jpg먹을거리=거문오름 입구에서 10분 거리의 와산리에 뽕잎전·해물전·보리쌈밥·좁쌀막걸리를 내는 길섶나그네(064-782-5971)가 있다. 대흘교차로(교래·와산 사거리) 모퉁이다. 서귀포시 색달동 중문단지 들머리의 e조은식당(064-738-7123)은 갈치조림·구이와 흑돼지구이 등을 잘한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가시식당(064-787-1035)은 제주 전통 순댓국을 내는 집이다. 갓 잡은 신선한 돼지고기를 쓴다. 잡채 대신 메밀가루와 선지를 섞어 속을 넣은 순대가 독특하다. 걸쭉한 국물 맛이 좋다. 지역민·관광객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때가 많다.
 
즐길거리=제주도는 말의 고장. 11월26일 제주시 한리읍 월림리에 말을 주제로 한 대규모 공원 ‘더마파크’(The 馬 파크)가 문을 연다. 말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체험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상설 야외 기마예술공연장, 승마클럽, 승마체험장, 실내외 마장, 명마 방목장, 제주도 미니어처공원, 뷔페식당 등을 갖췄다. 더마파크의 핵심 볼거리는 50여명의 기마부대가 펼치는 기마공연 ‘칭기즈칸의 검은 깃발’이다.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그린 대서사시다. 매일 2회 공연이 있을 예정이다. (064)795-8080.
 중문의 퍼시픽랜드에서는 고급 요트를 타고 주상절리 앞바다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대형 삼각돛에 거실·침실·노래방 등을 갖춘 요트를 대여해 과일·와인·맥주·컵라면 등을 제공받으며 선탠과 낚시 등을 즐기는 근해 요트 투어다. 다른 승객과 함께 타는 퍼블릭 투어(60분)가 성인 6만원(소인 4만원). 가족, 연인, 친구끼리 타는 프라이빗 투어(2시간)는 5인 기준 50만원(샹그릴라 1·2호는 70만원)이다. www.y-tour.com (064)738-2111.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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