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드’ 포기 일주일만에 찾아온 유혹 생생육아

곤란이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으니 어쩌랴. 그렇게 한순간 우리 부부는 ‘노키드 인생’을 포기했다. 멍하고 얼떨떨한 순간이 지나가자 앞날에 대한 폭풍같은 고민이 밀려왔다.

 

우리는 앞으로 어찌 살게될까. 기자로서의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서른 둘이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이제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나. 평생 빚도 지지 말고 집도 사지 말자던 우리 부부의 신념은 계속 지켜지려나. 순식간에 사방팔방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버렸다.

 

회사 선배의 전화는 내 마음이 약해진 순간을 틈타 기습적으로 걸려왔다. 임신 사실을 확인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저녁이었다. 아직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 정치부에 자리가 하나 나서 너를 추천했어. 2012년에는 총선이랑 대선이 둘 다 있으니 시기도 좋고… 아무튼 좋은 기회가 될테니 전화오거든 무조건 정치부 가겠다고 적극적으로 말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당시 나는 <한겨레> 사회부 24시팀 경찰기자로 1년을 살던 중이었다. 수해 현장부터 살인사건 현장까지 하루하루 허덕이며 현장을 굴러다니다보니 경찰기자 생활이 끝나면 어느 부서로 가야할지 뾰족히 생각해 둔 바도 없었다. 게다가 정치부는 그다지 지망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다 선배의 전화는 "정치부로 오라"는 것도 아닌 "정치부에서 오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배의 전화 한통에 마음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륭에서1.jpg »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내 기자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한순간에 사방팔방 희뿌연 안개가 깔린 듯, 나는 불안해했다. 사진은 기륭전자 장기 투쟁 당시 현장에서 찍은 것.

 

선배 말대로 정말 좋은 기회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아기를 가졌다고 말해버리면 회사에서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같은 부서에 있는 여기자 셋이 모두 서른 둘 동갑인데 나만 일찌감치 결혼한데다가 이제는 임신까지 했잖아? 지금 아기를 낳으면 다시 돌아와서 일할 수 있겠어? 정치부로 자리를 옮기면 총선, 대선 국면에 좋은 기사 많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에 어떤 게 더 이롭겠어? 아이만 없다면, 아이만 없다면!

며칠 뒤 그 선배와 함께 중요한 취재원을 만났다. 여의도의 한 일식집이었다. 잘만 하면 당시 경찰이 한창 수사 중이던 사건의 내막을 취재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마감 때문에 내가 가장 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취재원 두 명과 선배, 나 이렇게 넷이 한 방에 둘러앉았다. 이미 폭탄주가 몇 순배 돈 참이었다. 다들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연기가 자욱했다. 아이 생각에 흡, 숨을 참았다.


술잔이 내 앞으로 왔다. 후래자 삼배라도 해야 할 분위기였다. 그냥 눈 딱 감고 이 술잔을 비워버리고 함께 담배라도 피면서 분위기를 맞춰서 사건 얘기를 좀더 자연스럽게 들을 수만 있다면! 술잔은 날 유혹했고 마음은 마구 흔들렸다.


순간 입에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죄송해요. 제가 임신을 해서요.” 선배와 취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던 담배를 비벼 끄며 “거참… 진작 말을 하지” 무안해한다. 임신 소식에 관해 좀더 묻고 답하다가 이내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거, 임 기자는 화장실도 안가나?” 담배를 참다못해 취재원 한 명이 조용히 물었다. 문 밖에 나가 서성였다. 술자리는 어정쩡하게 끝이났다.

‘노키드’를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여성에게 임신이 쉬운 선택이랴. 은밀하게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밀려날 수도 있고 노골적으로 회사에서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인생 계획을 급변경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꿈을 포기하기도 한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임지선’으로 살고자 했던 나는 '노키드'를 포기한 지 일주일만에 작은 유혹에도 거침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결국 난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렸다. 곤란해도 괜찮다고 말해버렸으니, 우렁차게 심장이 뛰는 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한다. 이제 진짜 노키드 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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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노키드 부부’로 살아가려던 가련한 영혼들이 갑자기 아기를 갖게되면서 겪게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나누고자 한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