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는 부모가 되고 싶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지난 주말 9살이 된 조카 유정이와 손을 맞잡고 쎄쎄쎄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재혼가정에 대한 편견이 담긴 가사는 그대로였지만, 마지막에 붙는 해당연도가 달랐다. 나는 “천구백팔십몇년도”라고 노래를 끝맺는 게 익숙한데, 유정인 “이천십이년도”라고 했다가 “아니, 이천십삼년도”라고 고쳤다. 어머나, 30년 시간 차! 하지만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반달>은 몇십년째 손동작도 똑같았다.

거의 서른살 차이가 나는 첫조카 유정이와 공유할 게 있다는 건 동시대를 사는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 유정이 첫돌 때 선물로 내가 만든 성장앨범엔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는 대목이 있었다. 쎄쎄쎄가 소망을 이뤄준 것만 같았다.

아직 어린 나의 두 아들과는 그런 공유의 기억이 없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 폴리, 타요 등은 나로선 생소한 존재들이다. 10년 넘도록 동심을 사로잡고있는 번개맨도, 내겐 그저 ‘쫄쫄이 옷’이 좀 안쓰러운 아저씨일 뿐이다.
 
그래도 난 최대한 아이들과 코드를 맞추려 한다. 육아휴직 기간에 웬만한 <EBS> 어린이 프로그램 주제곡도 섭렵했다. 아이들과 같이 집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면 확실히 일체감이 조금 생긴다. 다만 이것도 일방적이다 보니, <원탁의 기사>, <은하철도999> 같은 나의 어릴 적 추억도 요즘 감각으로 만들어 아이들과 공유할 순 없나 하는 서운함이 못내 남는다. 어쨌든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노래 몇곡 같이 부를 수 있는 아빠가 돼주겠다는 약속은 꼭 하고 싶다. 더욱 중요한 건, 노래 뿐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에 귀기울이고, 그 생각에 공감하는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아이들과 공감하지 않으면 나도 언젠가는 그냥 ‘꼰대’가 되고 말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나이를 먹어 장년·노년이 됐을 때 “요즘 젊은이들 버릇 없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런 얘기를 한 기록이 있다지만, 지금부터는 너무도 다른 세상인 탓이다.

과거 사회에서 노인이 대접을 받은 건 지식과 지혜 덕분이었다. 경험이 곧 자산이던 시절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엔 이미 너무 많은 지식이 퍼져있다. 책만 해도 그렇다. 1950년대 초엔 전세계의 연간 책 발행부수가 25만권 선이었지만, 요즘은 한해 나오는 종류만 160만종이 넘는다. 그나마 인터넷의 정보는 제외한 통계다. 세상을 오래 살지 않아도, 많이 공부하면 지식과 지혜를 갖출 수 있는 구조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6년 뒤(2029년) 한국은 인구성장률이 0을 기록하고 그때부턴 인구가 감소 국면에 돌입한다. 점점 줄어드는 인구가 나이만 먹어가는 지독한 노령화 사회다. 그렇게 변해가는 사회에서 노인은 더이상 ‘현인’이기보다, 젊은이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일 수 있다. 나는 그때가 되어 아들에게 일방적인 잔소리만 늘어놓다가 ‘말이 통하지 않는 세대’, ‘이해할 수 없는 세대’라는 비판을 듣기는 싫다. 더 먼 미래의 주인공이 돼야 할 아들이 꿈꾸는 세상과 충돌하다가 ‘우리 꿈을 짓밟았다’고 비난받으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과 어떻게든 소통을 하고 싶다. 권위적이지 않기에 반항하지 않고 서로 인격체로 존중하는 가정. 어쩌면 다음 세대의 가정교육은 ‘이해받는 아이들’ 못지않게 ‘이해받는 부모상’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올해 만 3살, 1살이 되는 우리집 녀석들은 확실히 너무 어리다. 그러나 “미래는 이미 와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3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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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