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 사춘기 '나만 미워해 신드롬' 기본 카테고리


"자꾸 이러면, 확 나가버릴거야"


그녀는 코에 잔뜩 주름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통통한 손마디가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모든 동작은 0.8배속으로 느려졌다. 천천히 분홍색 스웨터의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해져 있는 것 치고는 꽤나 정성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아직은 발에 큰 뽀로로 수면양말이 말리면서, 그녀는 잠깐 비틀거렸다. 그러나 타고난 운동신경이 자존심 구겨지는 순간에서 그녀를 구했다. 몸은 이내 바로 섰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무슨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천천히 현관으로 나갔다. 주섬주섬 도라 캐릭터 운동화를 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왼발에는 오른쪽 신발을 오른발에는 왼쪽 신발을 끼고서 결연하게 현관문 앞에 섰다. 약 5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결심한 듯 까치발을 하고 현관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겼다. " 나 정말 간다"


누군가 네 살은 제 1의 사춘기라고 했던가. 네 살의 막바지, 다섯살의 초입에 들어선 요즘. 나의 작은 아이는 첫 질풍노도를 통과하고 있다. 수시로 수가 틀린다. 얼마전에도 사소한 일로 버럭 화를 내더니 이렇게 가출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제는 예사롭게 현관문을 열고 집구석을 박차고 나간다. 가출도 습관이라더니. 그리고 심지어 꽤 멀리 간다. 혼자서. 열네살도 아니라 네살짜리가. 집에서 약 30미터 떨어진 엘레베이터 앞에서 갖은 궁상을 떨며 앉아있는 걸 겨우 달래서 데리고 온 적도 있다. 첫 아이 수민이는 온갖 장난질로 집에서 쫓겨나는 게 걱정인 유아였다. 자기 발로 집을 나간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작은 애의 과감한 반항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특히 가출의 이유가 너무 밴댕이 소갈딱지를 찜쪄먹을 만큼 쪼잔한 것들이라 더욱 기가막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 수연아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줄게 

딸: 치킨

할머니: 치킨 몸에 안좋아. 

딸: 우아아앙. 나만 미워해. 


나: 수연아. 블록 잘 만들었네 

딸: 그렇지?

나: 어? 그런데 노란색이 잘못 끼워졌네 

딸: 우아아앙. 나만 미워해.


아들: 수연아 그림 그리자 

딸: 그래 좋아. 나 여기다 그릴래. 

아들: 그거 내 종이인데 

딸: 우아아앙. 나만 미워해. 


아주 작은 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만 미워해를 외치면서 토라져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달래는 말도, 혼내는 말도 듣지 않고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 길을 떠난다. (도대체 누굴 닮아서...쿨럭...너같은 딸을 낳으라는 친정엄마의 저주가...쿨럭) 사실 딸 수연이는우리  집안의 귀염둥이 서열 1위다. 친정에서는 막내동생의 막내딸이다. 집에서는 밉다라는 말은 커녕 야단조차 맞은 적이 거의 없다. 눈치도 빠르고, 애교도 많아서 아빠는 물론 엄마인 나의 잔소리도 대부분 빗겨가는 평화지대의 소녀였다. 더군다나 장난대마왕 수민이도 여동생 수연이에게만은 더없이 친철하다. 그런데 도대체 원인은 무엇일까? 7살 아들은 얼마전에 나에게 그럴 듯한 추측을 내놓았다. "엄마, 우리가 수연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 같아" 

정말 그런 것일까? 공주처럼 딸래미를 받들었던 것이 '나만 미워해 신드롬'의 원인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치원에서는 더없이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교우관계도 좋다. 집에만 오면 이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수연이의 몹쓸 땡깡짓에도 수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심지어는 토라질 때마다 안고 달래면서 '우리는 너를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다'라는 진정어린 호소도 했다. 그러나 10번 말하면 1번 정도 먹혀들었을까? 그동안 애교로 봐주었던 땡깡이었지만, 이러다가는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전에는 다시 떼를 부리는 수연이를 똑바로 서게 하고 동작 그만 "차렷"을 시켰다. 처음에는 딸은 어리둥절 하다가, 다시 징징대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잡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볼록한 배 옆으로 바짝 손을 붙인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빵 터질뻔 했지만, 혓바닥을 꽉 깨물고 정색을 했다. 그리고 이어진 따끔한 야단. 가끔 서러운 듯 콧물을 훌쩍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이야기가 계속 되는 와중에도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코을 훌쩍이는 모습이 귀여워 얼른 야단을 끝내고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다시 허벅지를 찔렀다.) 


일단은 훈육이 조금은 약발이 먹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얼마나 갈 지 모르겠다. 실제로 아직도 가끔은 방바닦에 대자로 눕거나 애벌레 모양으로 웅크리면서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아, 네 살 사춘기에 잘듣는 약은 무엇일까? 요즘은 연말이라 '산타' 테마로 연명을 하고 있지만, 연초에는 다른 테마를 떠올려봐야겠다. 아니면, 아이와 대화의 시간을 좀더 가지던가. (사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아이와의 교류가 예전에 비해 줄었다. 그랬더니, 예전에 가졌던 워킹맘 컴플렉스가 재취업과 함께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다시 시작된 워킹맘 마음 줄다리기 이야기는 다음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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