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것인가 터질 것인가 기본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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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나날들이었다. 아이가 자라서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나날들. 이가 막 나기 시작해 손수건 위로 침을 질질 흘리는 아이 앞에서, 나는 미래 아이와의 대화를 수없이 꿈꿨다. 얼른 말하자 우리 아가. 엄마가 참 재밌는 사람이에요.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신날 거예요. 허허허. 지금 떠올려도 등짝의 몇몇 부위가 움찔거리는 몹쓸 1인극을 서슴지 않았었다. 


6여년이 지난 지금. 나의 아이들은 이제 나의 말도 꽤 잘 알아듣고, 스스로도 말을 무척 (가끔은 얄밉게 무척) 잘한다. 그러나 풋사과 엄마 시절에 꿈꾸었던 ‘사랑의 대화’는 중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성당오빠의 얼굴만큼이나 희미해졌다. 고백하건데 지금의 나에게 가장 실존적 고민은 이것이지 않나 싶다. 참을 것인가 터질 것인가.


매일 아이 둘을 챙겨서 유치원에 보내는 아침 풍경은 어마어마하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가끔은 안하고), 신발을 신는 작은 일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날은 없다. 그냥 없다. 어떤 날은 우유를 가득 부은 시리얼 그릇이 엎어지고, 어떤 날은 한여름에 아이가 털 잠바를 꺼내입는다. (혹은 배트맨과 인어공주 의상) 그게 아니면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장화를 신는다. 혹은 유치원 통학차가 도착하기 5분전 급박한 시간에 새로 책을 꺼내 읽거나,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일도 안 일어나는 날엔 둘이 싸운다. 저녁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날이 없다. 이것도 그냥 없다. 밥을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드는 일련의 과정은 아침보다 좀더 길고 지난하게 진행된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밥상머리를 뜬 뒤 공룡인형을 잡으러 가거나, 장난감 경찰차와 함께 돌아온다. 집안 곳곳의 위험한 물건을 귀신같이 찾아내  기겁하게도 한다. 욕실서 놀게 방목해 둔 날엔 새로 산 샴푸 두통이 그야말로 거품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겨우 몸을 씻겨 내놓은 뒤에 방으로 돌아왔을 때, 잠옷 윗도리를 다리에 끼고 춤추는 아들을 보는 심경이란.


이처럼 기상천외한 일상과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곧잘 먹어버리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매일 줄타기를 한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체벌과 같은 상처를 남긴다는 말도 들은 바 있어 조심스럽게 줄을 탄다. 제법 아이들을 점잖게 타이르는 날도 있다. 자잘한 짜증만 내고 가볍게 넘어가는 날도 있다. 그러나 어떤 날은 피곤에 찌들어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밥 먹자, 옷 입자, 잠 자자를 반복적으로 내뱉다가 한계에 달한다.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경고를 날려도, 아이의 귓등만이 내 말을 받아칠 때는 마음이 거친 바람 앞의 깃발처럼 펄럭인다. 특히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이나, 개인적인 스트레스나 심한 날엔 어김없다. 사자후가 터진다.


개인적으로 최대 고비는 올해 초였던 것 같다. 혼자 아이 둘을 키운 3년여에 걸친 중국생활에도 지쳐가고 있는 즈음이었다. 7살에 접어든 큰 아이가 이제는 슬슬 엄마 말을 알아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어째 아이는 6살 때보다도 못한 행동이 늘어가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찌 보면 아주 작은 일에 아이를 향해 폭발을 해버렸다. 줄타기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줄에서 추락했다. 그동안 제법 인내심 있는 엄마로 자부하고 있던 나였다. (어쩌면 그런 척 하면서 내 안에 화를 쌓아두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날은 어째서인지 감정이 너무 격해져 아이에게 말을 쏟아 내면서도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상처를 준 말들은 이미 쏟아진 물처럼 흥건히 바닥에 널브러졌다. 갑자기 너무나 초라해졌다. 나는 그날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을 붙잡고 울었다. 우선은 사과를 했다. 이 정도로 화낼 일을 아니었는데 너무 심하게 화를 냈다고. 그리고 또 말했다. 엄마도 사람이라고. 약하고, 실수도 하고, 힘들면 작은 일에 화도 내고 그런다고. 그 날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울먹이면서도 나를 꼭 안아주었다.


물론 나의 감정의 줄타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는 나는 나름대로 줄을 조금 널찍하게 만들려 한다. 아이를 믿는 것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품행방정한 어린이가 되리라는 것을 믿는 게 아니다. 아이가 ‘엄마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준다는 믿음이다. 내 경우엔 실제로 아이에게 좀 더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가자, 아이와의 대화가 조금은 방향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절대선’ 엄마가 아이에게 훈계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평범한’ 엄마가 왜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지 아이가 이해하는 식이다. (물론 조금 이해를 한다는 것이지, 아이가 갑자기 할 일을 스스로 척척해내는 우주 멋쟁이로 거듭났다는 것은 절대 네이버 아니다)


예전에는 ‘화내는 엄마’가 되는 게 무척 무서웠다. 절제를 못하고 화를 내면 자괴감에 스스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화도 낼 수 있는 엄마’ '조금은 못나도 되는 엄마' 라는 것을 인정하자, 마음이 꽤 홀가분해졌다. 지금도 화는 내지만, 적어도 감정의 쓰나미에 실려 아이들과 함께 표류하는 일은 그 이후에는 없었다. 엄마라고 해서 사모곡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갈 수는 없는 노릇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그냥 학이고 선녀고 다 포기하고 내 길을 가기로 한다.  '사람' 엄마의 길을 가려고 한다. (사실, 그 길 밖에 못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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