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가는 육아, 책보다는 아이가 내비 기본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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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나, 두려워요”

 

내년이면 37살이 되는 남자 후배가 내게 고백해왔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세월의 흔적을 업고 진정한 상아저씨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건만, 연신 불안한 듯 눈알을 굴렸다. 내년 3월 그는 아빠가 된다. 바쁜 회사일에 치여 아무것도 알아보지도 준비하지도 못하고 아이를 맞이할 것 같다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는 그래도 아이를 둘이나 낳아본 내가 뭔가는 알고 있겠거니 하고 자문을 구하러 온 듯 했다. (미안, 너 잘못 찾아왔...이라말하려 했지만, 간절한 그의 눈빛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자니 문득, 첫 아기를 낳고 매일 벽에 머리를 박으며 살았던 내모습이 겹치며 괜히 콧날이 새콤매콤해졌다.

 

 

2008년 5월 어느 날. 나는 첫 아기 수민이를 만났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던 분만의 고통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찰나의 착각으로 무통주사의 타이밍을 놓친 나는 36시간의 진통을 겪으며 요단강 기슭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내 품엔 수민이가 안겨있었다. 텔레비전이나 광고에서 흔히 보던 눈물 또르르 감동의 순간을 기대했었건만, 처음 얼굴을 본 아기는 미안하게도 참 낯설었다.

다소 어색한 분만실에서의 첫 만남 뒤 병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수민이는 울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신생아는 많이 운다. 근데 수민이는 좀 더 많이많이 울었다. 24시간 중에 우는 시간이 울지 않는 시간의 열배쯤 되는 듯 했다. 당시 병원에는 성장앨범 홍보를 위해 무료 신생아 사진을 찍어주시는 사진사 분이 계셨다. 다른 산모들 앞에서는 환하게 웃으시던 그 분이, 내 앞에선 유독 쭈뼛거리셨다. 사진사 분께서는 아기가 잠든 사진이 없어서 입 벌리고 우는 사진밖에 못 찍었다며 미안해하셨다. 나에게 미안해하는 분은 또 있었다. 바로 담당 간호사 선생님.

“아기가 자꾸 울어서 다른 아기들까지 깨우네요. 죄송하지만 조금 더 병실에 데리고 계셔주셔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 있는 내내 젖을 물렸지만, 수민이의 울음은 줄지 않았다. 아이 여섯을 키우고 손자손녀를 여덟이나 둔 베테랑 친정 엄마도 병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래도 젖이 모자라는 것 같다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듯 느껴졌던 1박 2일. 나는 당장이라도 피난을 떠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전쟁은 더욱 세를 키웠다. 나는 출산 전 육아서를 통해 이미 모유수유 숭배자로 새롭게 태어나 있는 상황이었다. 내게 완모(완전히 모유로만 아이를 키우는 것)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미션이었다. 분유는 한모금도 주지 않겠다는 엄마와 모유로는 배를 채우지 못하는 아기는 몇날 며칠을 싸웠다. 결과는? 친정 엄마가 손주에게 몰래 분유를 먹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네 고집 때문에 애 성질 버리지 마라”

내 눈길을 피하면서 엄마는 잠든 수민이의 볼록한 배를 괜히 여러 번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적은 모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폭발했고, 엄마와 영혼을 건 푸닥거리를 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내 모유 공급 능력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약도, 마사지도, 돼지족도 모두 다 헛되고도 헛되었다. (모유 핑계로 방목된 식욕에 대용량의 뱃살만 공급되었다)


모유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나는 더욱더 전의를 불태우며 다음 전쟁에 돌입했다. 바로 수면전쟁. 수민의 잠은 치명적일 만큼 극소량이었다. 잠투정을 시작된 순간부터 재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그리고는 정말 야속하게도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당시 수민이에게 그나마 잘 통하던 자장가는 '멍멍개 꼬꼬닭' 노래였는데. 나는 대략 수만번 멍멍개와 꼬꼬닭을 소환해야했다. 그리고 멍멍개와 꼬꼬닭을 양옆구리에 끼고 승천하는 마법적인 시간에 다다라서야 겨우 아이를 재울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다크서클을 무릎에 끼고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나의 멘토로 낙점된 사람은 조디 포스터 아기의 베이비시터까지 맡았었다는 트레이시 호그 언니.  언니의 베스트셀러 ‘베이비 위스퍼’의 책장을 넘기면서 수많은 부모들의 간증을 만났다. 내 마음은 어느새 '내게 강같은 평화 넘치네'를 부르며 손뼉을 쳤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내 동아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강보와 수면의식에 대한 거부가 너무 심했다. 나는 호그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시간표를 짜고, 그 시계 바늘 위에 수민이를 올려놓으려 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분유 밀반입’ 사건 이후 딸과 불구대천의 사이가 된 엄마는 이런 나를 바라보며 정체불명의 쓴웃음만 지었다. 당시 엄마는 나의 자멸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계획표는 너덜너덜 해졌고, 내 몸의 전세포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했다.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와 나는 척을 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눈물에 내가 빠져 죽을 것만 같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친구를 만났다. 학창시절부터 연애건내 공부건 모든 일에 쿨(cool) 향기 심하게 났던 그녀였다. “베이비 위스퍼? 나 그거 보다가 나랑 안맞아서 안 보는데? 그냥 애 상태 따라 되는대로 해. 그게 더 편해”

 

대오각성.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팽팽하던 몸이 갑자기 흐물거렸다. 나의 경전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나와는 안맞는 책일 수 있다니. 친구가 툭하고 뱉은 한마디에, 나는 책에 묻혀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어느새 육아서에 ‘셀프 감금’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육아의 첫발은 살 떨린다. 특히 나의 행동과 말이 곧 이 작은 인간의 인생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고만 아득하다. (나도 아직 인간이 덜 되었는데, 누가 누굴 키우냐 이 말이다) 앞서도 고백했지만, 처음 난 수민이가 참 낯설었고, 당황스러웠다. 그저 어색했기에 아이의 기분과 상황을 읽을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그래서 책들에만 매달렸다. 그들이 네비게이션이 될 줄 알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요즘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네비게이션은 아이 자체라는 것을 점차 깨닫는 중이다. 표정, 습관, 그림, 노래 등등. 아이들의 보내는 신호는 때로는 가장 정확한 길잡이가 될 때가 있다. 물론 '경로를 재탐색 합니다'라는 경고음이 시시때때로 울린다. 그리고 아이를 읽겠다고 해놓고 얇은 인격 밑천을 다 드러내며 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하늘도 우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부분은 다음편 '참을 것인가 터질 것인가'에서 자세히) 그러나 이렇게 경로를 계속 재탐색하다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네비게이션을 능숙히 읽을 날이 오지않을까 하는 기대는 내심하고 있다.

 

그 날 나는 촉촉한 눈망울로 조언을 구하는 후배를 그냥 돌려보내기 뭣해 이런 저런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마지막엔 아빠가 되기 위해 준비하려는 그 마음을 칭찬해 주며 선배답게 훈훈한 마무리를 했다. 그러나 육아야 말로 '길없는 길'이 아니던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 정말 모른다. 아마도 후배는 아빠 등극이후 벼락같은 '깜놀'을 여러번 경험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엄마아빠들처럼 안드로메다를 영혼의 안식처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진하디 진한 사랑도 맛보며 스스로 여러번 경로를 재탐색하며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난 그 길이 정말로 행복한 길이 되길 빈다. 

 


P.S 그 날 부모의 길 앞에선 후배를 보며 묘한 두 감정이 교차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제 신생아를 키울 일이 없다는 안도감70%+이제 빵단계부터 시작해야 하는 후배에 대한 연민30%)  사랑하는 후배야. 어서와, 육아무림은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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