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그림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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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여섯 살, 하늘이가 네 살이 된 올 해 처음으로 결혼기념일을 챙겼다.

작년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정신이 없었는데 올 해는 아이들이 좀 컸으니

같이 케이크도 먹고 결혼식 동영상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결혼기념일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이 케이크를 사와서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는데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고

남편은 얼굴이 벌게져서 부끄러워 못 보겠단다.

 

결혼식 동영상 속의 나는 신부 입장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고

남편의 손을 잡고 다시 남편과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입은 드레스는 친구가 중고로 사서 본인 결혼식 때 입고 나에게 빌려준 드레스였고

내 머리 위 화관과 내 손에 들린 부케는 결혼식 날 이른 아침에

산책길에서 꺾어온 꽃과 들풀로 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화장은 친한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해주었고 머리는 내가 드라이를 했다.

남편의 예복은 집 근처 아울렛 매장에서 산 정장과 나비 넥타이였고

남편과 내가 나누어 낀 반지는 보석같이 생긴 작은 유리알이 박힌

동네 문구점에서 구입한 몇 천 원짜리 은색 반지였다.

 

남편과 내가 만든 예식 순서지에는 우리가 개사한 노래 가사가 적혀있었고

그 노래를 하객들과 함께 불렀다.

신랑 입장 곡은 남편이 평소에 좋아하는 곡, ‘캐논이었으며

신부 입장 곡은 춤추기에 좋은 재즈 버전의 결혼행진곡이었다.

 

결혼식 중에 서로에게 주는 선물로 남편은 마음의 편지를 읊어주었고

나는 남편을 위해 만든 자작곡을 우쿨렐레 연주와 함께 들려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향할 신혼여행지는 지금 살고 있는 제주도였고

배낭매고 실컷 걷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을 자자고 했다.

 

불편하고 무거운 것들을 최대한 다 빼고

남편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산책하고 명상하면서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준비한 결혼식이었다.

 

이렇게 과감하게 우리 식대로 결혼식을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내가 같이 읽은 책의 도움이 컸는데

로버트 풀검<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 라는 책이.

거기에 소개 된 결혼반지의 이야기를 보고 우리도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문구점에서 반지를 구입했다.

 

한편 결혼식 동영상을 보면서 떠오른 또 하나의 기억은 아쉬움이었다.

결혼을 준비할 당시 나는 대전에 있었고 가족들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결혼 준비에 몰입하느라 시간을 내어 서울에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예식 후에는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가야 해서 몇 시간 머물지 못하셨기 때문에

결국 내 결혼식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들과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

 

결혼식 전이나 후에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왜 내가 직접 만든 화관을 쓰고 부케를 들려고 하는지

내가 왜 춤을 추며 입장을 하려고 하는지

반지는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이고

화장과 머리는 어떻게 할 것이고 내가 입을 드레스는 어떤 것인지

대체 왜 이런 결혼식을 하고 싶은 건지

족들에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이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모는 뭐 그런 결혼식이 다 있냐며 한참 웃으셨을 것 같고

아버지는 너답다고 하셨을 것 같고

오빠는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반지는 제대로 맞춰야 되지 않겠냐고 했을 것 같다.

너무 심한 반대가 있었다면 좀 곤란했을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든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바다와 하늘이가 결혼을 한다면

그녀들의 결혼식에 대해 실컷 이야기 나누며 함께 하고 싶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축하한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아쉬운 이야기도 있는 이 날의 풍경을

아이들과 함께 보며 웃을 수 있어서 좋았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내년에도 다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결혼식 동영상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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