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문의 격세유전 생생육아 칼럼
2017.09.18 17:30 정은주 Edit
어머니의 사진자서전을 만들기 위해 옛 앨범을 뒤적이던 중
한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20대의 아버지 사진이었다.
예전엔 한 번도 자세히 보지 않았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희로애락이 새겨지지 않은 무구한 젊음이 거기 있었다.
반 세기를 건너뛰어 내 기억 속 아버지를 생각한다.
늘 분노지수가 높고 권위적인 데다
아내와 며느리한테 함부로 대했던 아버지가 나는 싫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 하나씩 되새겨 보니
내가 영향 받은 것이 참 많다.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어머니와 달리
우리가 진로를 택할 때 아버지는 한 번도 조언을 한 적이 없었다.
다엘을 입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입양의사를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네 뜻대로 하라’는 한 마디와 함께 잘 알아보고 하라는 당부만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긍정적인 면은
중요한 일에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기질이다.
인생의 큰 선택 앞에 겁을 내거나
사람을 사귈 때 손익계산을 하거나
얕게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한 건 아버지의 특징이었다.
아버지의 단점 중 내가 싫어하면서 닮은 것도 많다.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이 내게 보일 때,
사소한 일에 벌컥벌컥 화를 낼 때,
스스로를 다잡는다. 이래선 안 된다고….
말년까지 늘 자신만만하고 오만했던 아버지에게
우리가 장난스레 복수를 했던 일이 있다.
수능시험의 국어 문제가 어려워졌다고 동생과 얘길 하는 중에
옆에서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국어 문제 그런 게 뭐가 어렵냐. 내가 풀어도 만점 받을 수 있겠다.”
동생과 내가 발끈 해서 직접 문제를 풀어보시라고 했다.
우리는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골라 지문을 읽고 아버지에게 문제를 냈다.
그런데 일이 났다.
한 문제, 두 문제…모두 다 정답을 맞추시는 거였다.
당황한 우리는 서로 눈짓을 주고 받은 후 짐짓 말했다.
“다 틀렸어요. 맞추지도 못하면서 왜 큰 소리를…”
아버지는 우리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별로 굴하지 않는 눈치였다.
‘늦게 핀 꽃봉오리가 탐스럽다’라는 조금 특이한 교육관을
아버지는 많이 드러냈다.
어린 아이가 너무 영악스럽거나 튀는 행동을 하면
아이답지 못하다고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삼 남매는 또래보다 어수룩하게 자랐다.
결혼도 모두가 적령기라 불리는 시기를 훌쩍 넘겨서
부모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배우자를 택했고
사회적 명예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늦게 핀 꽃봉오리가 탐스러운 게 아니라
피자마자 질 때가 됐다고 우리끼리 우스개 소릴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저릿하다.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하며 소통하는 법을 몰랐고
자신의 상처는 철저히 혼자서만 갖고 가셨다.
예민하고 섬세한 성향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전쟁을 겪은 후
아픔을 치유하거나 드러내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해서 우리가 실수로 뭔가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불 같이 화를 냈던 아버지의 두려움과 상처를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으로 내려오는 일화는 나를 웃음 짓게 한다.
예전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어르신들로 구성된 일종의 팬클럽(?)이 있어서
아버지가 밖에 나갈 때마다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물론 확인할 길 없는 얘기다.
과장법은 우리 집안 특징이기도 하기에.
어쨌든 부모님 두 분 다 외모가 눈에 띄어서
우리 삼 남매가 태어날 때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태어나는 아이마다 외모가 너무 평범해서 주변의 실망을 불러왔다.
이 때 나의 할머니가 명언을 남겼다.
“이 고장이 아무래도 좋은 인물을 낳지 못하는 곳인가 보다.”
풍수지리까지 동원하여 유전자의 미스터리를 풀고자 했던
우리 조상의 지혜가 돋보이는 한 말씀이다.
아버지의 큰 키 대신 어머니의 아담한 키를,
어머니의 예체능 감각 대신 아버지의 무딘 운동신경을,
두 분의 미모(?) 대신 평범한 외모를 나는 물려받았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세유전(?)의 기미가 보이는 것이다.
다엘이 두 분의 장점을 모아서 닮아가고 있다.
아버지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 아버지의 20대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