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엄마도 비빌 언덕이다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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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해피 보이’다. 몇달 전 갑자기 발휘하던 출근하는 엄마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기 신공도 약해지면서 아침마다 대체로 기분좋게 “엄마 다녀오겠심다” 또는 “엄마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녀석아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규~) 말 문이 터진 이후로 종알종알 떠들면서 혼자서도 잘 논다. 실없는 농담 좋아하는 엄마를 닮았는지 벌써부터 할머니와 이모에게 농담을 걸거나 장난을 치면서(“할머니 얼굴에 방구 뿡 낄거예요” “이불 속에 숨어서 깜짝 놀라게 해주자”이런 수준이지만) 혼자 까르르 넘어가기도 한다. 언제나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씩씩한 목소리에 기분 좋은 얼굴의 명랑소년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퇴근한 뒤 옷도 갈아입기 전에 잠깐 아이와 놀고 있는 데 친정엄마가 말했다. “엄마 오니까 인이 목소리가 커지네” 원래 인이는 목소리가 큰 아이가 아니었나? 종종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면 “하루 종일 즐겁게 놀았다”는 대답을 듣곤 해서 아이가 명랑한 줄만 알았는데 엄마보고 목소리가 커지다니, 평소 눈치밥 먹으면서 기죽어 사는 애처럼 말야. “정말 그래?” 그랬더니 옆에 있던 아이 이모까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역시 엄마 ‘빽’이 좋구만”
 정말 몰랐다. 괜한 죄책감에서가 아니라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그리 좋은 엄마는 아니다. 먹이는 거, 재우는 거, 입히는 거 뭐 하나 할머니나 이모보다 잘 챙기는 게 없다. 그렇다고 잘 놀아주나, 잘 때 옛날 이야기 하나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반면 이모는 동화책도 너무나 재밌게 읽어주고, 박물관이다, 공원이다, 지역축제다,  부지런히도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닌다.
  그런 엄마인데도 아이한테는 ‘빽’이고 ‘비빌 언덕’이 되나 보다. 엄마만 들어오면 목소리가 커지고 급흥분상태가 된다니 말이다. 일주일에 한두번 차려주는 밥 반찬이라야 고작 달걀후라이나 달걀찜이 전부고, 외출이라야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나 동네 뒷산 산책이 전부이며, 동화책을 읽어준다면서 한 페이지 안에 쓰여 있는 고작 서너줄의 문장도 한줄로 스리슬쩍 고쳐 읽어주는 엄마를 좋아해주는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뭉클하기도 했다.
  아이가 커갈수록 아이 안에 엄마가 차지하는 그 거대한 존재감에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조그만 아이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자기를 재밌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 앞에는 엄마가 있다. 그 엄마가 나처럼 일하느라 바빠서 주중에는 얼굴 보기 힘든 엄마라도, 좀처럼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냉정한 엄마라도 말이다. 길거리나 놀이공원 같은 데서 아이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엄마를 봤을 때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엄마가 아무리 지독하게 다뤄도 엄마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린다는 거다. 누군가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가 엄마 없는 아이더라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이에게 꼭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모성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보면 이렇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마와 자식간의 특별한 끈이 있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일하는 엄마들은 엄마가 채워줄 수 없는 시간과 결핍을 보상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다. 더 재밌는 장난감, 더 많은 책들 등등. 하지만 어느 것도 엄마라는 존재를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엄마의 얼굴만 보면 목소리가 커진다는 우리 아이를 보니 사랑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엄마의 얼굴을 보여주고, 잠시라도 옆에 있어주면 족하다.
일하느라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는 엄마든 몸이 불편해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엄마든 엄마는 그저 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비빌 언덕이 된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건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셈이다. 나처럼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미안해 할게 아니라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는 것같다. 다른 것으로 보상해줄 게 아니라 그냥 비빌 언덕으로 아이 곁에 든든하게 존재하면 될 일인 거다.
 
* 이글은 월간 <베스트 베이비> 2012년 12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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