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뭣이 중헌디?

  명절이 다가오면 다시 어머니는 홀로 부엌을 지키셨다. 결혼을 하고 나니 명절이면 부엌에서 어머니께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어머니를 즐겁게 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과 남동생은 살갑게 어머니 곁에 다가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명절이면 어머니께서 시키는 일만 짧게 대답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어머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혼을 해 보니 어머니께 필요한 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곁에서 말을 걸어주는 일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면 혼자서 음식을 하는 외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밑반찬 하나 제대로 못했던 아내였지만 부엌에서 웃으며 말을 걸어주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친딸처럼 사랑하셨다.
 
 한 마디 작별의 인사도 없이 며느리가 떠난 날, 어머니께선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선 영정사진을 꼭 붙잡고 손을 떼지도 못하셨다. 어머니께서 그 날 잃은 건 며느리가 아니었다. 명절이면 부엌 살림까지 도맡아야 하는 여자의 삶을 이해해 주는 딸을 잃으셨다. 

 

 다시 명절 주방은 조용했다. 마흔이 다 된 남동생이 결혼을 해도 좋으련만 아직 혼사를 치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두 아들을 두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길은 결혼을 해서 손주를 품에 안기는 일이라며 명절 때 더 깊이 한탄하셨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건 결혼 자체이기보다는 행복한 결혼이라는 생각에 시간을 더 달라는 말로 어머니의 한숨을 덮었다.

 

 올해 꼭 칠순이신 어머니를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손가락이었다. 오른 손 엄지손가락 끝이 부어올랐고 나머지 손가락 네 개는 바깥으로 휘었다. 휘어 나간 손가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곡선을 그리면서 바람만 불어도 어머니를 괴롭혔다.
 “이젠 냄비 하나도 못 들겠구나. 그렇다고 여자가 살림을 안 할 수도 없고.”

 칠순인 연세에도 어머니께선 여자의 할 일을 걱정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손가락을 아파하시는 어머니를 보실 때마다 집안일을 거드는 아주머니를 부르자고 하셨지만 아직까지 손가락만 빼고는 멀쩡하시다며 한사코 거절이셨다. 그러면서도 살림을 하는 여자가 한 손을 쓰기 어려우니 고민이라며 혼잣말을 하시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직접 해 보며 깨달은 건 집안일은 무척 힘이 든다는 사실이다. 집안 일은 정신적으로보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집안일은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회사에선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앉아서 문서를 읽거나, 기껏해야 타자를 두드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회사의 일은 앉아서 하는 일이 많았고 그만큼 몸을 움직일 일은 적었지만 집안일은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는 일조차 온몸의 근육이 움직여야만 한다.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반찬을 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는 썰고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일만 해도 발과 손과 어깨는 쉼없이 움직였다. 도토리묵을 썰 때에는 힘은 덜 들지만 간지런하게 썰기 위해 신경을 더 쓰고, 무나 당근을 썰 때에는 손목과 손가락에 적잖은 힘을 주어야만 했다. 관절염이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이유도 허리가 굽은 어른신들 대부분이 할머니인 이유도 모두 집안일이 가져다 준 시련의 시간때문일 것만 같았다.

 

 차례나 제사 음식을 놓고 볼멘 소리를 한 건 어머니의 고단함을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었다. 차례 음식은 빨간 색이 없다. 고춧가루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왔으니 차례나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처음부터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 부터 시작된 차례 음식은 당시엔 1년에 한 번 허기를 채우는 기름진 음식이었겠지만, 2016년 비만과 고혈압으로 성인병을 걱정하는 시대에 차례 음식은 적어도 내 눈엔 건강을 해치는 음식으로 보였다. 

 “어머니, 조상님들도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하시지 않을까요? 회도 좀 놓고 짬뽕도 좀 놓고 그래요. 일 년에 한 두 번 조상님들도 외식하고 싶지 않겠어요?”

 아픈 손가락으로 차례 음식을 하시는 게 안타까워 명절이면 어머니 옆으로 가 음식을 간편하게 차리자고 불만을 터뜨렸다.

 

 영정 앞에 절을 하면 조상들이 지켜보며 정성을 헤아릴 거라는 마음은, 조상님이 실제로 그러는 게 아니라 조상이 그러시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마음이다. 조상들이 후손들을 지켜보고 후손들의 정성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 조상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마음이 그런 믿음을 만들었을 것만 같았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보니 떠난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다. 장례를 치르는 것도, 영정사진을 보며 말을 거는 것도 그건 내가 나를 달래는 과정이며 시간이었다. 장례는 고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남은 유가족들을 위해 조문객들이 찾아오는 것이었고, 고인의 유품을 간직하거나 고인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도 고인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남은 자가 마음을 달래는 행위였다. 그 시간을 지나가면서 남은 사람들은 슬픔의 터널을 빠져나갔다.

 

 아내와 이별을 하며 절규와 슬픔 속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사람과 행복한 기억을 자주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 것. 이별 뒤 모든 나의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바뀌었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바빴던 기자생활을 미련없이 그만 둔 것도 오늘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냥 가요.”
 “추석인데 어디를 가자는 거니?”
 “제주도요.”
 “그래도 될까?”
 “그냥 한 번 그래 봐요.”


 40년 넘게 단 한 번도 추석 차례를 거르지 않으신 어머니는 주저하셨다. 식구라야 작은 아버지 식구가 전부였지만 시동생에게 전화를 거는 것조차 부담이셨다. 생각이 많으면 행동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그냥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제주도로 향했다. 어머니 손을 쉬시게 할 마음에 아버지와 민호도 함께 동행을 했다. 집을 떠나면 고생이고 음식이며 숙소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집에 있었더라면 해야 할 일들 생각에 미소를 지으셨다.
 “내 생애 이런 날이 다 있구나.”
  숲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생각에 첫날엔 올레길을 함께 걸었다. 다음 날엔 호텔 길을 따라 쭉 이어진 공원을 산책했다. 셋째 날엔 감귤을 따며 가을의 풍성함을 손으로 만졌다. 민호는 숲보다는 바다를 사랑했다. 2016년 추석에 송편 대신 귤을 따 먹고 절을 하는 것 대신 산책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는 가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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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명절이면 부엌에서 혼자서 전을 부치시던 어머니를 보며 추석은 누구를 위한 추석이고 무엇을 위한 추석일까 란 질문은 혼자서 던졌다. 그리고 40년이 지나서야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기로 했다. 밥을 먹든 빵을 먹든 생선을 먹든 고기를 먹든 문화라는 건 어렸을 때부터 침묵 속에 나를 길들여 왔겠지만 지금와 생각을 해 보면 문화도 선택의 대상이지 의무의 대상은 아니었다. 가을 여행을 간 추석이 가족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추석 문화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 하나는 남겼다. 

 

 70년 만에 제주도 공항에 면세점이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하신 어머니는 아버지 건강이 걱정이시라며 홍삼액을 사시고 무척 좋아하셨다. 오래전부터 사고 싶었지만 부담스런 가격 고민을 해결한 듯 미소를 지으셨다. 앞으로 추석도 그랬으면 좋겠다. 의무보다는 설렘이, 부담보다는 기다림이, 숙제라기보다는 여행과 같은 추석을 만들자고 다짐을 했다. 내년 추석에는 가까운 일본에서 온천에 동행을 하자는 목표 하나도 생겼다. 매년 추석이면 전을 부치셨지만 어머니는 지금까지 가까운 일본조차 가신 적도 없으셨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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