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2막'의 조건

늦었다. 게다가 골목마저 낯설었다. 분명히 자주 왔던 골목인데… OOO 냉면집이 어딘가요? 결국 가게 앞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게 길을 물었다. 옆 골목이라고 했다. 게다가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한다는 설명도 들렸다. 서둘러 빨리 왔더니만 너무 와버렸다. 종종 걸음이 껑충 걸음으로 바뀌었다. 잠잠하던 팔도 크게 시소를 탔다. 오히려 엄격한 선배가 아니어서 더 엄격하게 느껴졌다. 내가 늦어도 미소를 짓겠지. ‘쿵푸팬더’의 환한 미소. 화를 내도 그 선배의 얼굴은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미리 자리 잡아 놓았어. 이 선배는 후배와의 약속에도 늦는 법이 없다. 걸음은 더 빠르게 움직였고, 두 팔은 더 빨리 시소를 탔다. 저 멀리서 냉면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선배, 늦어서 죄송해요.”
예약이 어려운 냉면집인 걸 생각하니 더 미안했다. 생색이라도 내지. 그러면 덜 미안할 텐데.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
“괜찮아.”
쿵푸팬더의 미소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더 미안했다. 똑같은 간격의 시간이지만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은 없다. 주부아빠인 나에게 점심 시간 1시간과 언론사 간부인 선배에게 점심 시간 1시간이 같을 수가 없을 테니까. 하루에만 회의를 세 번을 한다고 했으니, 점심을 먹고 나서 회의를 하는 게 아니라, 회의를 하는 사이에 점심을 먹는다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먼저 음식을 주문하고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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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살이 많이 빠졌네.”
 어머니가 가끔 하는 말.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선배였다.  
 “연애 하니?”
 똑같이 살이 빠졌건만, 어머니는 아내 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고생 때문에 살이 빠졌다고 했고, 선배는 혹시나 연애를 하느라 살이 빠진 게 아닐까 짐작했다. 같은 모습, 다른 진단. 어머니에게 내 외모는 ‘안 돼 보이는 외모’였고, 선배에게 내 외모는 ‘관리를 잘한 외모’였다. 살이 빠진 이유를 설명했다. 육아는 성공적으로 다이어트를 이끈다는 배경 설명.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챙기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을 챙기고, 저녁을 챙기고 밤이면 일찍 잠을 자야 하는 생활.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술은 미치도록 마시고 싶지만 미치도록 마실 수 없게 만들며, 안주는 국어사전에서만 확인해야 하는 독박육아. 설명을 듣던 선배가 한껏 웃었다. 그래요. 건강을 챙기기엔 독박육아가 최고입니다.


이해 관계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니 대화는 빗방울처럼 퍼졌다 흩어졌다. 카페에 모인 엄마들처럼. 옆 테이블을 슬쩍 쳐다봤다. 우리 목소리만 큰 게 이상했다. 옆 자리엔 예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 앉은 채 식사 중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는 공간은 그들이 직장에서 만난 관계이며 상사와 직원이 같이 있는 자리라고 말해주었다. 형식적인 대화 몇 마디와 젓가락을 놓는 소리만 가끔 들려왔다.

 

식사를 하다가 인생 2막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의 마음이 잠시 나왔다 들어가는 듯 했다. 가장으로서 누구라도 붙잡고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이겠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 선배의 나이를 따져봤다. 이제 선배도 인생의 2막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는 듯 했다. 인생 2막. 막이 올라간다는 건 한편으론 서글프다. 막이 오르기 위해서는 막이 내려가야 하니까. 인생 1막이 내려갈 때엔 그냥 내려가지 않는다. 박수 소리나 여운보다 많은 불안을 남긴 채 내려간다. 이제 곧 회사를 다닐 날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크려면 오랜 시간이 남았다는 것.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미래를 위한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불안. 그보다 더 직장을 못 그만두는 이유는 관계의 두려움도 클 것만 같았다. 직장이 없는 날 누가 반겨줄까 라는 두려움. 그 선배와 인생 1막에 관해 이야기를 한 게 벌써 15년 전이었는데 어느덧 우리는 인생 2막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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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15년 전쯤 봄 날에도 그 선배는 내 곁에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대학 교정을 찾았다가 우연히 가까운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정 없이 만난 자리였다. 계절이 화사하게 바뀌는 봄날이면 아내와 함께 옷을 갈아입는 나무 가득한 대학 교정을 찾았다. 시간이 멈춘 채 젊음을 품은 곳. 그 곳엔 반가운 변화와 열린 희망과 지금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선배는 후배의 연애 소식에 상대를 보고 싶어했고, 아내는 가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선배를 보고 싶어 했다. 대화를 나누면 대화의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대화의 느낌은 오래 남았다. 선배는 꽤 오래 연극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배를 만나고 난 뒤, 느낌이 좋다, 라던 아내.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기자이지만 연극을 이야기할 때에도 무척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으로 아내는 기억하는 듯 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구야, 되돌아보면 말이야..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참 소중하더라.”
선배의 말을 담담하게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 선배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과 시간을 같이 보내준 내게 고맙다는 듯.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건지,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는데 적어도 시간을 같이 보낸 건 분명했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내를 떠나 보냈을 때, 아무런 말없이 아내의 유골을 들고 장례식장을 떠나갈 때에도 조용히 길 가장자리에서 나를 바라봐 준 사람도 그 선배였다. 그 때만큼은 아무런 미소가 없었다. 기자생활을 접고 주부생활을 할 때, 가끔 집 앞으로 찾아와 나의 안부를 물어주었던 사람도 바로 그 선배였다. 같이 시간을 나누어준 사람. 사실 그 선배가 오랜 시간동안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 선배의 말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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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먼저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슬픈 내 감정에 머물며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바랐던 건 아니었던가? 잠시 그 선배의 모습을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후배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니?”
 “파업 중이라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 조만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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