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10년 우울증상(?) 고백 - 생생육아

다시 글을 쓰며...

 

  꽤 오랜만에 베이비트리에 글을 쓴다. 셋째 아이를 낳은 뒤로 소원해졌던(?) 베이비트리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 그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로 했다’는 내 결심을 실천하려는 또다른 의지의 표현이다. 오랜만에 등판(?)하게 되어 부끄럽고, 그만큼 쑥스럽다. 우선 지난날의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5회에 걸쳐 풀어보려 한다. 즐독 바라요~

 
 1. 프롤로그
 ‘나도 몰랐던’, 10년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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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다’가 적확하겠다. 결혼 후 지난 11년을 돌이켜 보면 회사와 일, 집과 가족. 이들 단어를 빼고는 논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불행하게도.ㅠㅠ 신혼 초 상큼했던 남편과 연애 감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남편을 봐도 이젠 가슴이 쿵쿵쿵쿵~ 뛰지도 않고, 되려 살이 닿는 게 어색하다. 애인이라기보다는 정말 가족이 된 느낌? ㅎㅎ
 그뿐인가. ‘엄마바라기’ 꼬마숙녀들은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안돼” “싫어”는 물론이고, “왜 엄마 맘대로?” “왜 그래야 하는데?” 반문할 정도로 머리가 컸다. 저것들이!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순간 ‘억~’ 하는 서운함이 치밀어오른다. 11살, 8살, 5살 소녀들은 이제 엄마보다 지들 셋끼리 노는 걸 더 좋아한다. (뭐, 우애가 좋은 거니까 이것도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다.) 남편이 그러하듯, 이들에게 엄마인 나는 그저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해주거나, 갖고 싶거나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사람 쯤으로 전락한 것 같다.(엄마=가정부????)
 
 “외롭다. 내 편이 없고, 아무도 내 맘을 모른다.”
 “사는 게 재미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집-회사 감옥’에서 지내야 하나?”
 
 배우자가 있어도 외롭다더니, 나는 지난 10년간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리고 그 마음이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커져갔다. 조금씩 나는 내 인생, 내 꿈, 내 삶의 목표, 자신감을 잃었다. 지루하고 루틴한 일상에 지쳐갔다. 그 빈자리를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열’로 메우려 했다.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이, 나의 행복이요 내 삶의 유일한 낙이요 내가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딸을 통해 대리만족 해보려는 ‘가당치 않은’ 욕심마저 생겼던 것 같다. 겉보기에 나는 멀쩡했지만, 나느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겉으로 그것을 들키지 않을려 했을 뿐. 들키는 것이 마치 내 자존심에 상처를내는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그렇다. 나는 지난해까지 ‘우울증 환자’였다.
 결혼 10년차쯤 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사는, 내 또래의 주부 다수는 나 같은 ‘잠재 우울증’ 환자일 거라고 감히 단언한다.(본인도, 남편도, 자식들도 인정하려들지 않지만) 병원 치료를 받거나,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이들보다 증상이 조금 덜할 뿐. 왜냐, 결혼생활이란 게,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시기만 다를 뿐 ‘열애-친숙함-무관심-권태-극복’으로 순환되는 매커니즘은 거의 동일하니까. 그리고 나처럼 10년차 즈음엔 무관심 혹은 권태의 기간일 테니까. 남편과도 육아와 가사일 때문에 의도치 않게 티격티격할 일이 본의 아니게 잦아졌다. 맡벌이임에도 육아와 가사의 일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 되고마는 현실.ㅠㅠ 그것 때문에 회사에서조차 출퇴근, 야근, 휴가, 휴일근무, 회식 등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ㅠㅠ 

  나는 그 적적함과 서운함들을 나와 유사한 고민과 생활을 하는, ‘동네 아줌마들’과 주로 풀었다. 비슷한 또래,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라는 동질감이 무엇보다 우리를 끌어들였다. 처음엔 브런치, 친분이 쌓이면서 속 깊은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 종종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밀해졌다. “학교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서?” “요즘 그 학원이 뜬대.”… 등 자녀와 교육 관련한 이야기뿐 아니라, 때로는 20대 추억팔이를 하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남편과 싸운 이야기, 시댁 뒷담화 등을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적어도 이들과 있으면 혼자라는 허전함도, 외롭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아줌마들 수다는 정말 소재도, 수위도 통제 불가다.) 그리고 알았다. 이들도 외롭다는 사실을.  남편과 자녀 모두 내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내가 술을 못 마셨다면, 어쩔뻔 했을까!)
 
 술은 부작용이 뒤따르는 식품이다. 단순히 숙취뿐 아니라, 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달에 500g~1kg씩 얄미울 만큼씩 체중이 늘었다. ㅠㅠ 그것이 한해두해 쌓이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과거에 입던 옷은 장롱 속에 쳐박혔다. 그런데도 맞는 옷을 구입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웠다. 박스티에 통 넓은 바지, 점퍼 밖에 입을 옷이 없었다. 젊고 세련된 엄마, 커리어우먼으로 딸들에게 기억되고 싶었으나 마음뿐, 나는 그 기준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은 꺾였으며, 자존감마저 무너져내렸다. 셋째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지난해까지 5년여는 자포자기 상태의 연속, 가히 내 인생의 암흑기라 할 만하다.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반대급부로 이 무기력한 기운들을 떨쳐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이겨내야 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혼자서. 왜냐, 나도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으니까.(언제까지 이렇게 막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인생은 한 번뿐이고,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쉽지 않았다. 실패의 연속. 더구나 남편조차 나의 무기력증과 비만, 나태함 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결론은 한결같이 “그래. 알겠는데. 넌 엄마잖아.” “널부러지지 말고 좀 빠릿하게 움직여봐”였다.(사실 남편도 결혼 이후 포기한 게 많다. 남편은 오로지 자녀들이 우선인 사람이다. 남편도 어쩜 나 못지 않은 우울증을 앓았을지 모른다. 여튼 그 점은 늘 고맙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망가졌을까. 연애 7개월만인 30살에 결혼했다. (29살에 하필 남편을 만났는데, 당시 결혼 조급증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남자를 놓치면 평생 독신으로 살 팔자라는 불안감...) 둘이 최소 2년은 연애하듯 신혼을 즐기자 했건만 3개월만에 덜컥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예기치 않은 임신, 엄마가 될 마음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은 졸지에 연인에서 ‘○○ 아빠’로 전락했다. 말 그대로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임신을 받아들였지만, 생활에서 임신으로 인해 내가 겪어야 하는 제약과 포기해야 할 일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음식, 회식, 문화생활…. 졸지에 애인도, 내 삶도 잃어버렸다. 그나마 당시에는 남편이 전적으로 나를, 출산 후에는 나와 아이를 세심하게 돌보고 챙겼다. 내가 힘들어할까, 우울해할까 노심초사하면서 첫 아이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지다시피 했으니까.
 첫 임신으로 잃은 것들은 제쳐두기로 했다. 아이를 한 명만 낳을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큰딸과 함께 셋이 즐기면 된다고 부부가 약속했다. 역시나 계획일 뿐이었다. 첫째를 낳은 뒤 3년 터울로 둘째, 셋째가 들어서면서 무참히 깨졌다. ‘임신 10개월-출산-모유수유’를 끝내고 잠깐의 휴지기를 갖기가 무섭게 아이가 생겼다.(그놈의 술이 웬수다! 타율은 또 왜 그리 좋았던 것인지….). 셋째를 임신한 뒤에야 ‘그래, 나의 30대를 전적으로 출산과 육아에 몰빵하자. 40대부터는 다르게 살자. 까짓것 10년만 고생하자. 인생에서 10년은 짧아’ 이렇게 마음 먹고 현실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편과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는 나날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된 일상까지도.
 
 굳이 그 변곡점을 40대로 못 박은 이유는 내 나름의 ‘10년 주기설’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10년마다 ‘내’가 변한다. 뭐 그렇게 살겠다는 뜻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살 때 “서른살까지 10년 동안 후회없이 놀겠다” 했고, 이를 실천했다. 그리고 서른살에 결혼했다. 그러니 “마흔까지 10년 육아에 전념하겠다”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럼 다음 ‘40대’는 어떻게 살 건데?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러니까 41살을 앞둔 어느날 ‘10년 주기설’이 불현듯 떠오른 거다. 지난 연말 즈음 10여년 전 직장 선배들을 만났고, 대학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막내가 다섯살이 되면서 좀 여유가 생긴 거다. 근데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 같이 “왜케 살쪘어? 안 그랬잖아” ㅠㅠ
 그 말들은 나를 자극했다. 까짓것 ‘아이들한테 멋지고 세련된 엄마’로 기억되자. ‘멋진 엄마’? 별거 없다. 40대 중년(아~ 슬프다)임에도 정신적·육체적으로 젊고 건강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들도 영유아기 때와 달리 이제는 엄마가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엄마 스스로의 인생을 가꿔나가는 걸 더 바라는 눈치다. 그리고 엄마의 삶도 있는 건데... 내가 그렇게 잘 살아야, 내 딸들이 40대가 되었을 때, ‘40대 엄마’를 자신들의 롤모델로 꼽지 않겠는가!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결혼 이후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것이 ‘나의 부재(나를 잃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우울증’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2015년 새해 계획을 세웠다. ‘살빼기. 책읽기. 공부하기. 책쓰기’.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목표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을 실천하는 중이다. 1월부터 6월까지 정말 혹독하게 체중을 감량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의 몸무게를 이제서야 회복했다.(처녀 적엔 못 미치지만)
 자연스럽게 표정이 밝아지고, 일상에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주변에서도 “보기 좋다”고 인삿말이라도 얘기해준다. 움직임이 굼뜨고, 느렸던 엄마가 날씬해져서 빠릿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딸들도 너무 만족해한다. “아빠곰은 날씬해, 엄마곰은 뚱뚱해~” 가사를 바꿔부르던 막내딸이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 제대로 노래를 부른다.
 
 “엄마, 살 빼니까 좋아?”
 “어.”
 “왜?”
 “그냥. 날씬하니까.”
 
 말 안해도 알 것 같다. 죽상이 아닌, 밝은 내 표정만으로도 딸들은 좋은 거다. 그런 점에서 여성, 엄마의 변신은 무죄다. 엄마가 웃고,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가, 남편이 행복해진다. 가족이 화목해진다. 그 변화의 키는 어느 가정이든 엄마가 쥐고 있다. 그렇기에 엄마가 가장 먼저 달라져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엔 외롭다고 느끼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차마 그 감정들을 토해내지 못한 채 홀로 삭히는 분들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 분들에게 감히 말씀 드리고 싶다. 외로운 여성들, 문득 내 처지가 안쓰럽고 억울해서 ‘우울’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처럼 ‘변신’을 도모해 보시라고.
  단, 그 변신은 철저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껏 남편과 자식을 위해 내 에너지의 100%를 쏟았다면, 그 중의 일부를 ‘변신’하는 데 투자하는 셈이다. 물론 그 ‘변신’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가 된다는 전제 하에서 진행해야 한다. 그것이 다이어트든, 학업이든, 취업 혹은 이직이든. ‘변신’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 ‘변신’을 이뤄내고 난 뒤 얻는 성취감이 당신을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을 행복하고 당당한 엄마로 만들어줄 것이다. 당신의 변신은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자녀와 남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 다같이 지금부터 실천해봐요. 힘을 내요! 화이팅~
 
* 다음글에선 내가 했던 ‘변신’의 노력 첫번째, ‘지난 6개월간의 다이어트’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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