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경력 5년차, 이제야 엄마 노릇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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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반쯤 열린 방문 틈으로 어둑한 빛이 기다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분명 첫째와 아이 침대에 같이 누워 있었는데, 지금 우린 둘 다 내 침대 위에 있다.

내가 내 발로 걸어서 옮겨왔던가? 아이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이 마르다. 어제 저녁, 육쪽마늘을 듬뿍 넣고 싸먹은 수육보쌈의 텁텁함이 아직도 입안에 머물러 있다. 아이를 재우는 동안만 누웠다가 일어날 참이었는데 그대로, 또, 잠들어버린 거다.


양치를 한 다음 서재로 가 습관처럼 휴대폰을 켰다. 
새벽 4시. 휴. 기쁘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스탠드를 켜고 안락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는다. 문득 이 시간에 혼자 있는 것이 꽤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사무실 업무도 바빴고, 둘째 아이 수족구와 내 몸살이 겹치고. 지난주는 남편 기말고사 기간이라 내내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뭘 하지?
주말에 다 못 끝낸 책을 읽을까? 디어 마이 프렌즈도 보고 싶은데. 늘 차고 넘치는 써야할 글 목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선택지지만 마치 심사숙고해서 여행지를 고르는 것처럼, 떠나기 위한 짐을 꾸릴 때처럼 늘 설렌다.

출근 준비 전까지 대략 3시간 남짓.
1시간 책 읽고, 1시간 글 쓰고, 6시에는 산책을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책을 펼쳤을 때,


“어엄마아~~~~”
큰 아이가 나를 부른다. 잠꼬대인가?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기다려 보자.
“어엄마아아아아~~~~!”
이번엔 끝소리가 약간 올라가 있다. 이런.
“준영아, 엄마 여기 있어.”
행여 둘째까지 깰까, 혹시 바로 잠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낮은 목소리로 다가간다.


“어디 갔었어?”
“거실에서 책 보고 있었지.”
“엄마가 말했었지? 준영이가 자는 동안 엄만 가끔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한다고.”
“응 알아. 근데 엄마가 오늘은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잠결이건만 또박또박,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전한다.

유난히 언어가 빨랐던 아이. 어느새 더 자랐구나 싶다.


엄마가 된 다음 내가 맞닥뜨린 갈등의 본질은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나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인가!"가 늘 문제였다.

예전처럼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싶은데. 본래의 나를 유지하며 살고 싶은데, 내 시간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두세 시간마다 젖을 먹여야 하는 시절을 벗어나면 해결될 줄 알았건만.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더라.
아이에 관한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 이중성.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다 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들이는 시간이 아까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하는 갈등과의 갈등.

업무에, 집안일에, 아이들 챙기는 일에 모든 체력과 시간을 소진해 버려서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할 만 한 여력이 없는 보통의 날들. 나는 민감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약이라고.
엄마경력 5년 차 쯤 된 요즘에야 균형 잡는 법을 조금 알 것 같다.
여건은 똑같다.
다섯 살, 세 살 두 아이에게 나는 여전히 1순위고, 그건 꽤 오랫동안 계속될 거다.
사무실 업무, 출판사 걱정, 집안일. 내가 안고 가야할 일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으리라.
비법이랄 것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정하고 그 뒤로는 그것에만 몰두하려고 한다. 사무실 업무는 사무실에서만(성미상 잘 안 되지만), 아이들과 있을 때는 오직 아이들만. 좋은 작가가 되는 것도 출판사로 얼른 성과를 보고 싶은 것도 '꾸준함과 최선'만 남겨둔 채 다른 부분은 일단 미뤄두었다.

잠도 충분히 자고, 남편과 대화도 꾸준히 나누고. 블로그에 가벼운 글을 쓰거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나를 민감하게 하는 요소들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정 마음이 안 다스려질 때는 극단적인 상상도 도움이 된다.
오늘 당장 죽는다면 뭐가 젤로 후회스러울까.
새벽에 글 한 편 못 쓴 것? 좀 더 자유롭게 살지 못한 것? 아이가 “내 옆에 있어줘” 하는 것을 뿌리친 것?
반대로 오늘 당장 죽는다면 뭐가 제일 기쁠까.
바라는 대로 여행도 많이 하고, 대단한 작품을 남긴 작가라 해도, 좋은 책을 많이 만들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다 해도, 내 아이가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제 삶을 살아간다면 그게 제일 기쁘지 않을까.

아마 그들에게 소중한 내 젊은 날의 시간을 나누어쓴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어른 컵에 시원한(냉장고에 있던) 물을 담아달라고 주문한 아이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도 한참 있다가 잠이 들었다.
뽀로로의 에디가 무슨 음식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로봇 만든 이야기를 했고, 백곰이 배꼽이랑 발음이 비슷하다며 웃었다. 새들이 벌써 일어나서 아침이라고 인사를 한다고, 엘사 공주 치마(털 달린 겨울치마)가 입고 싶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산책가자며 나에게 다짐도 받았다.


엄마랑 36년을 살았어도 엄마가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고작 다섯 살인 아이는 더욱 그렇겠지. 어쩌면 우리 삶은 어쩔 수 없이 평생 엄마와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엄마로 살 권리, 엄마로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경우 엄마가 된 다음에 깨달은 것이 많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 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운 내 엄마가 외할머니 제사 때마다 왜 그리 서럽게 통곡을 했던지 이해가 갔다.

잘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궁극적으로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 임을, 나의 삶은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세상과의 투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그렇게 알아차렸다.


사실 시간에 관한 나의 강박의 핵심은 '정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엄마란 존재는 과연 정체되고 발전이 없는가? 엄마 노릇이 하찮은 일이던가? 아니다. 나는 이제야 확신한다.

엄마 노릇에 충실하고자 하는 나를 사회는 경력단절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게 하지만, 그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간으로서 나는 좀 더 깊어졌고, 좀 더 많은 이야기와 사랑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무엇보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타이틀이 '두 딸 엄마'라는 데 대한 진심어린 수용이랄까.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최근에야 육아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대략 5년쯤 걸린 셈이다.


원래는 아이가 잠들고 나면 다시 거실로 나올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아이 옆에 계속 누워 있었다.

휴대폰도, 책도, 불안함도, 걱정도 없이. 나로서는 특별한 일이다.

앞으로 좀 더 잘할 수 있겠다, 나아질거라는 자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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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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