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 날 생생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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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학교 아이들 열두명이 1박 2일을 하러 우리집에 오기로 한 날은 1월 30일이었다.

본래는 다음날이 이룸이 생일이어서 이룸이가 초대한 아이들 열다섯명이 오기로 했었는데

이룸이가 양보를 해 줘서 생일파티 일정을 미루었다.

여름과 겨울방학에 학교 아이들 열댓명씩 와서 하루 자고 가며 놀곤 했던 것은 몇 년 째 해 오는 일이다.

매 번 남자 아이들만 왔었는데 필규가 고교과정에 들어가면서 학교에서 공동생할을 해 오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함께 공동생활 하는 아이들 열두명을 초대했다. 남학생 여섯, 여학생 여섯이다.

게다가 늘 이 모임을 궁금해하고 부러워하던 선생님들 아홉분도 저녁을 드시러 오기로 했다.

아이들 열둘과 교사 아홉, 거기에 우리 가족 다섯을 합치면 스물 여섯명이다. 워낙 많이 먹는 아이들이니

적어도 30인분의 식사는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메뉴는 늘 비빔밥이다. 다만 밥과 거기에 들어갈 비빔재료들 양을 훨씬 늘여야 했다.

마당 넓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온 후 집에 손님이 오고 식사를 대접하는 일을 수없이 해 와서 크게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3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 아이를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이 모두 오신다니 청소며 음식준비며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뼛속까지 빳빳한 긴장이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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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애들만 올때는 청소와 정리에 별 관심이 없던 필규는 이번에 여자 동기, 후배, 선배들이 오는데다

선생님들까지 온다고하니 발 벗고 나서서 청소를 도왔다. 방학이면 제 방에 한번 편 이불조차 며칠이고

개지 않고 뭉개가며 뒹굴던 녀석이 청소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몇달은 차근차근 쌓여왔을 묵은 먼지를

싹 청소했다. 여학생들에게 제 방이 지저분해 보이는 것은 싫었던 모양이다. 이것 저것 도와달라고 할때마다

굼뜨게 움직이던 아들은 계단을 치우라고 했더니 적어도 5년 이상 그대로 쌓여있던 계단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말끔하게 치웠다. (즉 안 보이는 공간에다 몽땅 옮겨 쌓아 놓았다)

물건 좀 치우자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해도 꿈쩍않던 남편이 부려놓기만 했던 수많은 물건들이 한순간에

감쪽같이 사라진 텅 빈 계단을 보는게 몇 년 만인지 정말 깜짝 놀랐다. 아들이 거뜬 거뜬 움직여주니

쌓여있던 쓰레기며 물건들이며 이런 저런 밀렸던 정리가 한번에 다 끝났다.

오호.. 여학생과 선생님 효과가 이리도 크다니, 녀석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었나보다. 덕분에 근 몇 년 이래

이렇게 집 전체가 정리되긴 처음이다. 매년 여학생과 선생님들을 꼭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전날 정오에 아들과 재래시장을 돌며 장을 보고 와서 오후 내내 집안을 치우고 밤 부터 음식 준비에 들어갔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콩나물, 시금치, 애호박, 당근, 무생채, 상추, 부추, 고기 볶음이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시금치 나물과 콩나물을 전날 무쳐놓고 무생채를 담궜다.

요즘 한참 맛있는 섬초 시금치 두 근을 다듬고 씻어서 삶고 찬물에 헹군 후 꼭 짠 다음 비벼먹을 때 뭉치지

않도록 가늘게 찢어서 무치기까지 참말로 많은 과정과 시간이 들어간다. 번거롭고 힘든 재료는 빼도 되지만

섬초가 들어간 비빔밥을 내가 좋아하므로 꼭 넣는다. 콩나물도 세번에 걸쳐 삶아서 무치고 당근 여섯개도

가늘게 채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볶았다. 무생채까지 하고 새벽 두시 무렵에 잠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 온 가족 이부자리를 몽땅 안방엔 넣고 마당을 치우고 집안을 마저 정리하고 나머지 재료들을

준비하면서 10인분짜리 압력솥으로 세번에 걸쳐 30인분의 밥을 지었다.

아이들은 네시부터 몰려왔고 다섯시 무렵 선생님들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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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우리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장작패기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아들의 학교에는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 많은데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도끼를 들게 되면 경쟁심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멋들어지게 장작을 쪼개고 싶지만 요령이 없어 힘만 잔뜩 들어간 도끼는 매번

장작을 빗맞고 그때마다 파도처럼 웃음이 터져나온다. 참나무 장작이 제대로 쪼개지만 환호와 갈채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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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따위 관심없는 아이들은 방에서 카드게임을 벌인다.

학교 일과 시간에 스마트폰을 쓰지 않게 되어 있는 아들 학교 아이들은 머리와 몸을 쓰는 다양한 놀이를 즐긴다.

우리집에 놀러 올때도 함께 즐길 여러 종류의 보드게임을 들고 온다. 스므살 아이와 열 너덧살 아이들이 어울려

유희황 카드 게임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언제봐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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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은 모두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이 몸에 베어있다. 준비하고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

하는 모든 일을 모두가 나선다. 선생님들도 이런 일에 익숙하니 준비하고 차리고 치우는 것이 순식간이다.

일곱가지 채소와 고기볶음, 채식 하는 아이를 위한 김가루, 우리밀 고추장에 국산 들기름까지 맛난

비빔밥이 한 상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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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큰 상 두개가 차려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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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앞 식탁에도 여럿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었다.

한 번 먹고 더 먹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밥 세 솥으로 다행히 모자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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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이 물려진 후에는 본격적인 게임판이 벌어졌다.

놀때는 아이들과 똑같아지는 젊은 선생님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쉐도우 헌터'라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속고,

속이고, 추측하고, 밝혀내고, 발뺌하고, 추궁하고, 감추느라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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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큰 방에서는 이룸이, 윤정이까지 함께 하는 게임판이 벌어졌다.

매번 학교 사람들이 오면 제일 신나게 어울리는 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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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김해 출장에서 늦게 돌아온 남편은 저녁도 먹지 않고 벽난로에 불을 먼저 지핀후에 2층에서 고구마를

가져다가 구워 주었다. 저녀을 그득하게 먹은 아이들도 남편이 구워주는 고구마 맛에 푹 빠졌다.

출장을 다녀오느라 청소며 정리며 도와주지도 못한 것이 미안했던 남편은 이런 것으로나마 우리집에

온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내자고 했을때 무척이나

반대했던 남편이지만 아들이 중등대안학교에 입학하고 그 학교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공부도 다른 활동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마음이 열렸다. 지금은 누구보다 아들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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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 선생님들이 모두 돌아가신 후 마당 데크위에 모닥불을 피웠다.

전날 필규와 이룸이까지 나서서 끌어다 놓은 땔감은 모처럼 추위가 누구러진 겨울밤을 후꾼하게 달구었다.

아이들은 밤이 아주 깊도록 불가를 떠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고, 웃느라 가끔 그 웃음소리에 불길마저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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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를 하고, 거실에서 영화 '위대한 쇼맨'을 보고 난 후 밤참으로 라면을 끓였다. 열 세명의 아이들은

스므개가 넘는 라면을 기새좋게 먹어 치웠고 남은 밥까지 말끔히 해결했다.

열 여섯에서 스물한살까지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돌아서면 바로 배고프고 먹을것이라면 언제든 소화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거기에 한창 먹성이 좋아진 윤정이와 이룸이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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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참을 먹고 나서 다시 게임이다.

그 사이 1층과 2층을 오가며 방을 정리하고 열 두 명이 잘 이부자리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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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언니들과 끝까지 놀고 싶어하던 두 딸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제 방으로 자러 들어갔고,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필규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이들은 새벽 늦도록 놀았다.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웃음소리는 배개맡까지 나를 따라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명랑하고, 그토록 우스개 소리를 잘 하고, 수다스러운 아들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지내고 있다는 것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선한 영향을 받으며 자라고

있는 모습을 이때만큼 가까이서 실감하는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모임에 몸과 마음을 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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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이룸이 생일이었다.

이룸이도 아이들도 늦게 늦게 일어났다.

아이들 열 다섯명이 자고 있는 방안을 조용히 돌아다니며 정리하고 아침밥을 준비했다.

원래 아침식사는 빵과 잼, 치즈 정도만 준비하지만 이번에는 거의 점심때가 되서야 아이들이 일어날

것이므로 오븐에 고구마을 가득 굽고, 밥을 지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정오무렵 일어난 아이들은 볶음밥과 군 고구마와 빵과 과일과 치즈를 맛있게 먹고 정리한 후 바로 이룸이

생일상을 차렸다.

31일이 이룸이 생일이니까 모두 편지를 준비해달라고 필규가 말했다지만 설마 다들 써 올까 싶었다.

그런데 케익에 촛불을 끄고 나자 한명씩 일어나 사라졌다 나타나더니 모두 선물과 편지를 내밀기 시작했다.

웹툰 작가가 꿈인 권영이는 이룸이가 제일 좋아하는 케릭터인 토토로의 한 장면을 붓과 펜으로 정밀하게

그린 그림을 내밀어 이룸이를 감격시켰고 언니들은 이룸이가 딱 좋아할만 한 귀여운 선물들을 준비해서

이룸이를 웃게 했다. 혹 옆에서 윤정이가 서운할까봐 윤정이 선물까지 준비해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 마음들이 너무 고맙고 이뻤다.

"엄마.. 평생 잊지못할 생일이었어요"

이룸이는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정말 그랬다. 아이들 놀러오는 날과 이룸이 생일이 겹친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좋아하는

오빠 언니들로부터 넘치는 축하를 받게 되었다. 이룸이를 낳은 내게도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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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를 모두 정리하고 집안을 치우고 아이들은 오후 2시무렵 집을 나섰다.

가기 전에 볕이 잘 드는 거실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올 해 졸업하는 스물 한살 권진이와 한글이, 지호는 이 모임에 언제나 초대받을 명예회원이 되었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리고 스므살 아이들 모두 너무나 이쁘고 건강하다. 몸도 마음도

참 반듯하다. 마침 환하게 들어온 햇살이 아이들 얼굴 하나 하나를 보석처럼 빛나게 했다.

내 아이의 형과 누나, 동생이자 친구, 동료로서 함께 배우고 익히고 커 가는 아이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다 내 아이들이다.

올 여름에는 새롭게 공동생활에 들어온 얼굴들이 생길것이다. 그땐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기가

이 공간을 또 채우리라.

아이들은 마당에서 오래 머물다가 기운차게 언덕길을 내려갔다.

열두명의 멋진 아이들은 이야기하며 웃으며 산길을 넘어 전철역까지 걸어갈 것이다.

이 아이들의 어린날, 젊은 날에 마음껏 밤새 놀 수 있는 날들이 있고, 반겨주는 마음들이 있고,

어슬렁거리고, 뛰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꼬리를 흔들며 손길을 바라는 개들이 있고,

나무와 산과 바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 축복을 선물할 수 있는 내 복도 얼마나 큰 것인지

매년 실감할때마다 마음깊이 감사를 느낀다.

이 집에 사는 한 이 집은 이 아이들의 집이기도 하다. 이웃들의 집이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 이후에 어떤 집에서 어떤 삶을 살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집이 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크고

넓은 집일테니 있는 힘껏 내 공간을 열어 사람들을 부르겠다.

같이 어울리고 웃고 먹고 나누며 즐겁고 뿌듯한 추억을 만드는 동안 가장 큰 선물을 내 가족과 내가 받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겠다.

잘가라 얘들아.

너희들이 올때마다 너희들과 어울리며 너희들의 마음 부푼 시절을 잠깐이나마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쁨이

너무 크다.

참 좋았다. 같이 있던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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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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