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국립공원 북쪽 자락에 숨어 있는 상신마을 뭇생명의 삶터, 국립공원

* 이 글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계간지 '초록숨소리' 2011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국립공원 보전운동을 하는 나는 전국 곳곳에 산재한 국립공원을 다녀야 한다.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힘들겠다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맞다. 좋고도 힘들다. 내가 사는 지리산국립공원이 아닌 다른 국립공원 출장이 잡히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이다. 해야 할 일보다 가는 길이 겁날 때가 많다.

계룡산국립공원 북쪽 끝에 자리한 상신마을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한다. 그런 내가 상신마을까지 가려면 기차, 전철, 버스, 택시 등 모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내게 상신마을은 깊은 산골이다.

 

상신마을은 공주시 반포면에 속한다. 상신마을에 가려면 32번 국도를 타고 공주 쪽으로 가다가 박정자 삼거리를 지나 좌측으로 들어서야 한다. 희망교를 지나 상신계곡을 따라 마을길을 걸으면 하신마을이 나오고, 하신마을에서 3km쯤 더 들어가면 상신마을이 있다.

상신마을은 남으로 길고, 북으로 갈수록 양쪽에서 좁혀져 삼각형을 이루는 분지형 마을로 버스정류장과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퍼져 있다. 버스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다. 갖가지 모양의 색 바랜 의자에 앉아 인근 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를 보고 있노라면 버스가 온다. 집집마다 차가 있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버스는 상신마을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고 있다. 상신마을 버스정류장은 스테인레스와 플라스틱 버스정류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초라하고, 촌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으나 하루 4번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리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상신마을이 절터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는 이제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었다. 당간지주 옆엔 말하는 어르신과 듣는 어르신, 마냥 하늘을 바라보는 어르신이 함께 앉아 계셨다. 어르신께 마을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70년밖에 안 살았어.’로 시작된 말씀에 의하면 상신마을은 500년쯤 되었단다. 마을이 있기 전에는 구룡사(九龍寺)란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망했다고도 하고, 절이 안 되어 갑사로 옮겼다는 말도 있단다. 절이 사라진 후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렇게 마을이 만들어진 것이다.

 

 

 

‘빈대’가 많아 절이 망했다니 무슨 의미일까? 절에 빌붙어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걸까, 아님 절 안에서 생긴 작은 다툼이 산문을 닫게 할 큰 싸움으로 번졌다는 걸까? 어떤 의미인지 묻는 나에게 어르신은 ‘으음, 글쎄’라고만 하신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구룡사는 이제 폐사지로 존재한다.

구룡사는 약 3cm 크기의 글씨로 구룡사라 찍힌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상신마을에는 백제와 통일신라 때의 각종 부도대석(浮屠臺石), 탑재(塔材), 기와조각 등이 있다. 구룡사의 규모는 상신마을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 조각들로 미루어 꽤 컸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상신마을은 계룡산국립공원 인근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 하늘과 자연에 예를 표하는 지하여장군과 천하대장군, 솟대가 서있다. 상신마을 솟대의 특이한 점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있는 것이든 모두 계룡산국립공원 상봉인 천황봉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신마을은 일제 때는 120호가 있었고, 지금도 130여 호가 산다고 한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들고남이 많았을 텐데, 마을 인구가 줄지 않았다는 건 살기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1933년 상신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전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와 직장 생활은 외지에서 하고, 정년퇴임과 동시 마을로 돌아온 석지영 노인회장은 상신마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신마을은 빈촌입니다. 들은 없고, 산에 화전을 해서 고구마, 배추를 길러 먹었어요. 지금은 지하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하늘에서 내린 물로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참 팍팍했습니다. 봄에는 나물 캐고, 가을에는 버섯과 머루, 다래 따서 먹고 살았답니다.’

어르신들은 마을이야기에 1856년 한양에서 태어나 한일합방 전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합방의 비보를 듣고 관직을 버린 후 상신마을에 은거했던 취음 권중면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1916년 회갑 되던 해에 상신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차리고 제자를 양성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상신계곡에 구곡(九谷)을 선정하여 바위에 새겨 용산구곡이라 했다. 그의 장남이 소설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인 봉우 권태훈이다. 평범해 보이는 상신마을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상신마을은 입구만 막으면 호수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옴팍하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그런 마을을 연상하면 된다. 전쟁이 나자 도회지 사람들은 첩첩산중 상신마을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피난을 왔다. 그러나 상신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와 머물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빚었다. 유엔군이 상신마을을 폭격하면서 산중 마을은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상신마을은 숨기 좋은 곳이었으나 일단 들어오면 나가기도 힘든 곳이었다.

상신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행주형(行舟形)으로, 샘을 많이 파면 배 밑창이 뚫어져 침몰하므로 재앙을 막기 위해 샘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얼마 전까지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식수였던 큰 샘이 나온다. 뚜껑이 덮인 샘을 통해 흘러 나오는 물이 맑고 투명했다. 맛도 좋았다.

 

 

 

 

상신마을길을 걸으면 전형적인 충청도 민가 정원을 볼 수 있는데, 충청도 민가 정원엔 큰 나무보다는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분꽃, 봉숭아, 금송화, 채송화, 맨드라미, 다알리아, 풍접초 등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꽃들은 잎이나 열매, 뿌리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점하는 자리가 아깝지 않았다. 정원은 따스한 햇살 아래 붉고 노란 빛을 냈다. 한 두 잎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마을길을 걸었다. 돌담엔 호박덩굴이 널려있고, 감과 대추는 붉은 색으로 익어가고, 장독대로 호두나무 잎이 떨어졌다.

 

 

 

 

상신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1시간쯤 걸린다. 낮고 포근한 시골집과 높은 담장에 말끔한 잔디밭을 갖춘 고급 전원주택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곳이 상신마을이다. 대도시 대전에 인접한 산세 좋고 공기 맑은 곳이니 고급 전원주택이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 싶었지만 원주민의 자리를 밀어내고 들어오는 대형 건물에 괜한 언짢음이 생겼다. 10년 후 상신마을은 옛 모습은 어느 곳에도 없고 널찍하게 자리 잡은 도시형 주택들만 남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어르신들은 상신마을엔 20여 년 전 터를 잡은 도예촌 때문에 사람들이 오간다며 큰 장사가 되는 것도 없는 마을이라 했다. 공기도 다르고, 풍경도 멋진 상신마을을 지키고 싶다 하셨다. 그러나 고급 전원주택이 많아지는 걸 보며, 지켜봐야 돈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돈 없는 원주민들은 먹고 살기 힘드니 집도 땅도 팔고 도회지로 나가고 있다고 걱정하셨다. 일제 때 산 위로 길을 뚫으려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막았는데 도시사람들이 들어오고, 차가 많아지니 그 길을 뚫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변하는 세상은 영산, 명산이라 불리며 길을 내고, 지형을 변화시키는 일이 금기시되던 계룡산을 변화시키려나 보다. 그래도 될까!

 

 

 

 

이제 가는 겨, 우리 마을 뭐 볼 건 없잖어, 익숙한 충청도 사투리를 들으며 상신마을을 떠났다. 상신마을은 지난 해 말에 있었던 국립공원구역조정으로 계룡산국립공원 밖에 있는 마을이 되었다. 국립공원 안에 사는 주민들의 최대 소원이 국립공원에서 빠지는 거라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뭔 큰 차이가 있겠냐고 했다. 국립공원 안팎 마을이 국립공원이란 경계선 하나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국립공원 안에 사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을과 주민들이 많아지도록 하는 일, 이건 정부의 몫인 것 같다.

 

글과 사진_ 윤주옥 사무처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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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안녕하세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윤주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