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나 딸이나, 흥!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앙앙 울고 있다. 주변에는 모두 하얀 옷을 입은 꼬맹이들이다. 곧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내 울음 소리를 잡아먹는다. 하얀 드레스도 환자복도 아니다. 태권도복이다. 대여섯살밖에 안된 여자아이 손을 잡고 태권도장을 찾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맏아들이 딸만 셋을 줄줄이 낳자 상심하셨던 할아버지는 그 중 둘째, 나를 아들답게 키워보려 애를 쓰셨다.  “생긴 것도 행동하는 것도 아들인데 고추만 안달고 태어난” 나는, 그러나 태권도장에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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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 F4, 여자끼리 뭉쳐보니!

 "캬, <미디어오늘>에 날 일이야."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 몇몇은 입을 샐쭉이며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그 즈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꺼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분석적인 자세를 보인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여기자들이 회사에 불만을 품고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어렵게 임신 사실을 부서에 알렸을 때 한 선배가 놀라며 이렇게 되물었다. "너도?" 알고보니 이미 타 부서에서 3명의 여기자가 임신을 ‘보고’했다고 한다. 여기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취재기자 4명이 거의 동시에 임신을 한 것은 <한겨레> 창간 이래 처음이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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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이가 내게 오더니 악관절이 싹~

‘임신부 투쟁’의 핵심은 ‘무조건 스트레스 줄이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빠른 눈치와 넓은 오지랖으로 점철된 피곤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술자리 약속이 2개든 3개든 되도록이면 모두 얼굴을 비추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편집 업무에 취재를 겸하든, 온라인 업무를 겸하든 존경하는 선배들이 하라는대로 일을 도맡았다. 부서 내의 문제나 갈등 상황에 꼭 끼어들어 감정노동을 했고 노조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남편이 1년동안 해외 지사에 나가있게 됐을 때 마침 우리 회사에서도 1~3개월씩 유급휴가를 권유했는데 "한창 일할 나이에 무슨 휴직이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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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 투쟁을 결심하다

   신기하게도 임신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임신 증상이 죄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기 전엔 괜찮더니 알고나니 왜이런가 싶어 나 스스로도 꾀병인가 싶을 정도였다. 경찰서 기자실에 앉아있노라면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점심 시간이면 건물 안에 퍼지는 구내 식당 반찬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특히 고기 냄새가 미치도록 싫었다. 배가 당기고 취재원 한 명만 만나고 나도 쉽게 피로해졌다.  경찰서 휴게실에 몸을 눕히는 날이 많아지던 어느 날, 함께 영등포 라인(서울의 강서, 영등포, 구로, 양천 경찰서를 뜻한다)을 출입하는 기자단의 회식이 있었다.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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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드’ 포기 일주일만에 찾아온 유혹

곤란이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으니 어쩌랴. 그렇게 한순간 우리 부부는 ‘노키드 인생’을 포기했다. 멍하고 얼떨떨한 순간이 지나가자 앞날에 대한 폭풍같은 고민이 밀려왔다. 우리는 앞으로 어찌 살게될까. 기자로서의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서른 둘이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이제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나. 평생 빚도 지지 말고 집도 사지 말자던 우리 부부의 신념은 계속 지켜지려나. 순식간에 사방팔방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버렸다. 회사 선배의 전화는 내 마음이 약해진 순간을 틈타 기습적으로 걸려왔다. 임신 사실을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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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안된 엄마에게 온 생명력 강한 아기

 임신을 준비하지 않았던 이에게, 뱃 속에 아기가 들어서 움을 텄다는 사실은 ‘충격과 공포’다. 충격은 말 그대로 놀람이요, 공포는 그동안 내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몸을 막 굴려 혹시라도 아이에게 이미 해꼬지를 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의 생명력은 엄청나게 강했다. 아이는 이미 “어쭈”하고 나를 내려다보며 자기 살 길을 잘 찾아내고 있는 듯 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한 날, 그날은 남편과 함께 끊은 ‘승마 교실’의 첫 시간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에 잠깐 산부인과에 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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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는 임신 홍수, 나만 특별한 줄 알았네

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노키드'라는 내게 “아기를 꼭 가져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날 축하해주겠지? 가족들은 놀라서 기절하지 않을까? 맏손주를 기다려오신 시부모님은 혹시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거 아니야? 이 모든 생각은 전부 깡그리 나만의 착각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는 작업을 마친 뒤에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 인생을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괜히 내가 눈치보며 사는 것일 뿐!   "그래, 축하한다" 오잉? 그게 끝? 임신 사실을 양가에 알리는 일은 생각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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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이가 왔다, 갑자기 강렬하게 운명처럼

 ‘그날’이 그냥 지나도, 축축 쳐져도 꿈에도 몰랐다  산부인과 빠져나와 긴 침묵 끝에 “거참 곤란하네” 2011년 6월 말, 우리 부부는 ‘윈도우 기본 바탕화면’으로 잘 알려진 중국 내몽고 자치구의 초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밤이었다. 까맣게 맑은 하늘에는 별이 아롱아롱 박혀있었다. “내몽고는 하늘이 달라.” 여러 사람에게 이 말을 듣고는 꿈꿔오던 여행을 떠나온 참이었다. 이른 여름휴가였다. 돗자리에 누워 미리 준비해온 와인을 마셨다. 건배를 하는데 남편의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폼은 있는대로 다 잡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신문사 사회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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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노키드 부부’로 살아가려던 가련한 영혼들이 갑자기 아기를 갖게되면서 겪게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나누고자 한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