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 주범 ‘나홀로 육아’

  아침 6시, 인기척에 살짝 눈을 떠보니 아기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가 방긋 웃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야 할 시간이란 뜻이다. 물 먹은 솜 같은 몸을 움직여 아기를 안아올린다. 아이와 잠시 놀아주던 남편이 출근을 해버리고 나면 집 안에는 아기와 나, 둘뿐이다.  적막한 공기가 부담스러워 텔레비전이든 라디오든 켠다. 아기의 시선을 잠시라도 잡아두는 데는 텔레비전이 더 낫다. 아기를 낳으면 텔레비전을 없애야지 다짐했는데 이제는 텔레비전 없인 하루가 버겁다. 아기에게 치발기를 주고 모빌을 보여주다 시계를 보면 10분, 거울을 보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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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도 ‘배 째라’며 배짱을 부리면 일이 잘되곤 했다. 학교 시험기간에 시험범위까지 다 공부하지도 못해놓고, 에라이 모르겠다 배 째라, 하고 잠을 자버리면 다음날 되레 시험을 잘봤다. 대학생이 됐다는 낭만에 젖어 술에 젖어 아버지가 정해놓은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갈 때, 혼나도 어쩔 수 없지, 체념하고 들어가면 아싸! 컴컴한 집 안에는 부모님의 낮게 코 고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오히려 전전긍긍 노심초사한 날은 꼭 시험도 망치고 아버지도 거실 소파에 앉아 현관문을 노려보고 계셨다. 아기 낳는 일을 어디 중간고사 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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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낳고 나니, 부질없네 부부싸움

“결혼해서 부부만 살 때는 다투고 갈등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낳겠다고 결정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이 키우는 엄마는 언제나 남편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 낳고 3년은 무조건 엄마가 키워라’ 등의 발언으로 수많은 엄마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 그만큼 널리 읽힌 육아서 <엄마 수업>에서 법륜 스님이 한 말씀이다. 지지든 볶든 아이 낳기 전에 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사랑으로 가정을 이끌란 말이다. 요즘 이 말에 크게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산후조리하는 아내를 두고 유럽 출장을 떠났던 남편의 만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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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어, 남편만 여전히 '자유' 입니까

   애당초 안 된다고 해야 했다. 룰루랄라 가방을 싸는 남편 옆에 앉아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유럽 출장을 다녀와도 될까?” 남편이 처음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출산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언제 가는데?” 출산 예정일 3주 뒤에 간단다. “산후조리하는 아내를 두고 유럽을 가겠다고?” 발끈했지만 생각 끝에 “가라”고 하고 말았다. 남편이 새로 맡은 업무 분야와 관련해 유익한 콘퍼런스가 열린다고 하니, 가지 말라고 하기 어려웠다.  ‘까이꺼’ 갔다 와라, 싶었다.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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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맞춰서 아이를 낳아야 해요”

“방학 때 맞춰서 아이를 낳아야 해요.” 충격적이었다. 준비 없이 아기를 갖게 된 나로서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똑똑해 보이는 그녀는 이른바 명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공부를 오래했고, 자신의 연구 분야에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학생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임신 5개월이었다. ‘시간강사 주제에’ 1년짜리 육아휴직은커녕 3개월짜리 산전후휴가도 언감생심이라 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박사 학위를 따고 시간강사를 시작하려면 적어도 20대 후반, 보통 30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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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소, 너는 어떻게 서있던 거냐

 나는 젖소를 상상했다. 푸른 들판에 듬직하게 서서 누가 밑에서 쪼물락 쪼물락 젖을 짜든 말든 멍한 표정을 짓는, 젖소를 상상했다. 젖을 짜는 손놀림이 조금 거칠어도 전혀 아프거나 간지럽지 않은 평온한 느낌. 모유수유는 그런 느낌일 거라고, 딱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이 따위 착각은 아기가 젖을 빠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간호사는 아기를 씻겨 내 가슴팍에 안겨주었다. "젖을 물려보라"고 했다. 어어, 물려요? 첫경험은 그렇게 순식간에 다가왔다. 하지만 아기는 세상에 나오느라 피곤했는지 젖을 잘 물지 않았다. 첫경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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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냐, 나도 너무 아프다

  몰랐다. 귀여워 할 줄만 알았지 곤란이 몸이 노래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잘 자는 줄만 알았지 기력이 없어서 쳐지는 것인줄 몰랐다. 곤란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아기를 출산한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날 했던 여러 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아기의 황달 수치가 ’20.2’로 너무 높다고 했다. 어서 소아과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고 심하면 입원하란다. 산후조리원에서 전화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황달, 황달이라. 정상적으로 태어난 신생아 60%가 생후 첫 주 내에 겪는 병이라고 하니 일단 너무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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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곤란해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런 임신에 놀라 엉겹결에 지은 태명, 곤란이. 이 이름은 우리 부부에게 ‘곤란이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니 이제 ‘곤란해도 괜찮다’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주문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이름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에 축하한다며 밝은 얼굴로 태명을 물어온 사람들은 ’곤란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왜 애 이름을 그렇게 짓냐", "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지금이라도 바꿔라" 등 여러 타박을 들어야 했다.  친정 엄마는 "결혼 5년만에 가진 아인데 곤란하긴 커녕 너무도 적절한 타이밍"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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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돈돈! 아, 전부 돈이로구나

 소박하게, 유난 떨지 말고, 주변에(특히 친정에) 민폐 끼치지 말고 한번 해보자! 아이를 낳기로 하고 난 뒤 나는 혼자 속으로 이렇게 결심을 했다. 얼마 입지도 못할테니 비싼 옷 사지 말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육아용품 욕심내지 말며, 태교니 조기교육이니 하는데 동하지 말자! 또한 딸 낳은 죄인도 아니고 친정 엄마 고생시키지 말자! 이렇게 다짐을 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소망인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우선 아이 옷을 비롯한 육아용품 이야기를 해보자. 내 경우 "첫 앤데 뭘 그렇게까지 얻어 입히냐"는 말을 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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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순풍녀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데는 출산의 공포도 한몫 했다. 거기, 그 좁은 곳을 찢고 커다란 아기가 나온다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몇년 전 아이를 낳고 출혈이 심해 누워있는 언니를 보고는 "그래, 나같은 엄살쟁이는 꿈도 못 꿀 일이야. 암, 그렇고 말고" 생각했다. 출산이라 함은 한 생명이 자기의 영양분을 새 생명에게 모두 준 뒤 소멸하는 과정, 그러니 출산을 하고나면 팍삭 늙어버릴 것만 같았다. 새끼를 낳고는 곧 죽어버리는 생물들도 많지 않은가!  그러니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 수록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어찌어찌하다 임신까지는 하게 됐으나 미처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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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노키드 부부’로 살아가려던 가련한 영혼들이 갑자기 아기를 갖게되면서 겪게되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나누고자 한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