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의 습격 숲 곁에서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땅에서 야생의 포유류를 만나고 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낮에는 어딘 가에 꼭꼭 숨어있다 주로 어두움을 틈타 움직이는데다 워낙 조심성이 많은 것도 그렇거니와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감각마저 사람보다 뛰어나서 마주치지 않고 미리 피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칠 때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거리, 빛의 방향, 구도를 선택하는 것은 고사하고 피사체에게 카메라를 향한 다음 초점과 노출을 맞출 시간조차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려 결국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방법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위장을 하고 숨죽이며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대상에 따라서는 그 기다림의 끝이 몇 달을 고스란히 삼키고 오는 경우가 있으며, 그 끝이 오기 전에 지레 지쳐 포기해야 할 때 또한 많으니 야생 포유류의 사진 한 장을 얻는 것도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기다리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만나고자 하는 대상이 아예 없는 곳에서는 평생을 기다린다 해도 그 대상이 눈앞에 나타날 리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세링게티 초원과 같은 지역은 없지만 그래도 야생의 포유류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곳이 있기는 합니다. 60년 가까이 자연 본래의 모습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입니다. 그러나 민간인통제선 안쪽을 포함한 비무장지대는 나라가 허용하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마저 개인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소정의 절차를 거치면 출입이 허락되는 몇 곳이 있으나 개인행동은 철저히 통제됩니다. 안타깝지만 분단국가의 아픔 중 작은 하나로 받아들이며 민통선 밖에서 서성거린 세월이 무척 길었습니다.

작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60년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일 년에 걸쳐 비무장지대를 취재하는 방송 팀과 인연이 닿아 드디어 비무장지대에 발을 딛고 그 안에 깃든 귀한 생명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삶 속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하천의 드넓은 초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라니의 모습, 위태위태한 바위 절벽을 곡예라도 하듯이 넘나들며 풀을 뜯던 산양의 크고 맑은 눈망울은 쉽게 잊히지 않을 기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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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의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친구는 멧돼지입니다. 완전히 성장한 멧돼지는 몸길이가 180 센티미터에 이르며 무게는 300 킬로그램까지 나갑니다. 몸집이 정말 어머 어마합니다. 15 미터 정도의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250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멧돼지와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셔터도 누르지 못하고 나무 뒤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지만 몸집으로는 멧돼지가 아니라 꼭 소 같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7 마리의 어린 새끼를 데리고 있었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여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멧돼지의 돌진을 피할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멧돼지는 무리를 이루어 다닐 때가 많습니다. 무리는 암컷과 그 새끼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짝짓기가 끝난 수컷과 새끼가 없는 암컷은 보통 단독생활을 합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습성이 강하고 도토리, 나무뿌리, 고사리, 풀, 버섯, 열매 같은 식물을 주로 먹지만 지렁이, 벌레, 쥐, 뱀 따위도 가리지 않는 잡식성입니다. 산에 먹을 것이 없으면 인접한 농경지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힘센 주둥이와 송곳니로 땅을 파헤치면서 먹이를 찾을 뿐만 아니라 하나를 다 먹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먹기 때문에 멧돼지가 한 번 내려오면 옥수수, 고구마, 감자, 배추 등의 밭작물은 쑥대밭이 되기 십상이고 논의 벼도 많이 망가집니다.

멧돼지는 귀가 밝고 특히 냄새를 잘 맡지만 시력은 좋지 않은 편입니다. 추위를 잘 견뎌 날씨가 추워져도 겨울잠을 자지 않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반면 더위에는 약합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서늘한 골짜기를 찾아 진흙으로 된 웅덩이에서 진흙 목욕을 자주하며 더위를 식힙니다. 헤엄도 잘 칩니다. 몸이 가려우면 나무에 몸을 비비는 습성이 있는데, 멧돼지가 몸을 비비는 비빔목은 영역을 표시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빔목을 잘 살펴보면 나무껍질 틈에 털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멧돼지의 털은 끝이 서너 갈래로 갈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암컷은 18개월, 수컷은 5살 정도가 되면 번식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월 ~ 1월에 걸쳐 짝짓기가 이루어지며, 임신기간은 평균 120일 정도이기 때문에 새끼는 5월에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암컷은 출산 전에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굵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새끼는 평균 6 마리 정도를 낳습니다. 새끼는 태어난 지 일주일이면 어미를 따라 다니기 시작하고, 2 ~ 3 주가 지나면 주둥이로 땅을 파서 먹이를 스스로 찾아 먹을 수 있지만 수유 기간은 3 ~ 4 개월입니다. 어린 새끼는 등에 진한 갈색 줄무늬가 선명하게 있는데 6 개월 정도면 사라져 체색은 흑갈색을 유지하다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져 회색에 가깝게 보입니다.

작년 여름 비무장지대에서 만난 멧돼지 가족 중 먹이를 찾아 하천을 건너는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촬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 모습이라 사진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멧돼지 가족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천을 넘어오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폭우로 하천의 유량이 많아지면 새끼를 등에 태우고 헤엄쳐서 하천을 건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이 그려집니다. 이후로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찾았지만 하천을 건너는 멧돼지 가족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야 경계심을 늦추고 건너왔지만 이후로는 어미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무척 신중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나서는 어린 새끼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혼자만 물을 건너온 적은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중간 즈음에 이르면 갑자기 멈춰서 코를 킁킁거리며 나의 냄새를 맡고는 바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어린 새끼들도 어미의 지시를 흐트러짐 없이 따릅니다. 멧돼지, 겉보기와 다르게 아주 예민한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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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산에만 있어준다면 멧돼지도 사람도 좋을 텐데 멧돼지가 산을 벗어나 한 해 땀 흘려 가꾼 농사를 망쳐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2005년 ∼ 2009년) 농작물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야생동물은 멧돼지며, 피해액은 335억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상위 포식자들의 멸종으로 천적도 없는데 번식력은 뛰어난 멧돼지가 산이 수용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총을 멧돼지의 천적으로 삼아 사살하는 것으로 응집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사살된 멧돼지는 자그마치 2만 171마리였습니다. 일 년에 4,000 마리 정도를 사살한 셈이니 할 말을 잃습니다. 멧돼지의 수는 줄었고 전기 울타리를 치는 등 다양한 노력도 있어 근래 농작물의 피해가 줄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농작물에 대한 피해를 넘어 결국 멧돼지가 도로에 뛰어들고 도심까지 습격하여 인명이 상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2010년 10월 한 달 동안 멧돼지 출몰로 인한 사건 ‧ 사고 관련 기사의 제목들입니다.

“경북 안동 시청에 나타난 멧돼지 2 마리 유리창 파손 후 사라져”, “부산 당감동 주택가 편의점에 멧돼지 난입, 멧돼지 사살”, “경기 고양시 주택가에 멧돼지 출몰해 주민 부상, 멧돼지 사살”, “경남 창원시 주택가에서 멧돼지 2 마리 차에 치여 죽음”, “충북 음성군 36번 국도에서 승용차와 멧돼지 충돌, 멧돼지 죽고 운전자는 차량 화재로 사망”, “부산 기장군 부산 ~ 울산 고속도로에서 승용차와 멧돼지 충돌, 멧돼지 죽고 운전자 부상”

올해 역시 10월에 이르면 이러한 기사들은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미 8월 말에 경남 창원시 진전면의 한 마을 야산에서 멧돼지의 습격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멀리서도 사람의 체취를 금세 알아차리고 바로 몸을 피하는 예민한 멧돼지가 민가와 심지어 도심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산이 좁을 만큼 멧돼지는 여전히 많고 그만큼 산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도로에 뛰어들고 도심을 습격한 멧돼지의 몸무게는 80 킬로그램 내외의 것들로 어미로부터 갓 독립한 친구들이 대부분입니다. 곧 12월이 되면 멧돼지는 짝짓기 철을 맞습니다. 덩치 큰 멧돼지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에 분주한 때입니다. 어린 녀석들은 영역과 세력 다툼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올해 또한 지난 해처럼 봄의 이상저온과 여름의 잦은 비로 멧돼지의 주요 먹이인 도토리가 흉년입니다. 실제 도토리가 평년 대비 1/10 수준 밖에는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력 다툼에 밀리고, 먹이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깊은 산을 떠나 산비탈의 밭을 기웃거려보지만 높은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예전에는 멧돼지가 살 수 있는 산이었으나 이제는 산이 아니라 차들이 쌩쌩 지나는 도로가 되어 있으며, 건물이 들어선 도시로 바뀌어 있습니다. 멧돼지가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멧돼지가 갈 곳을 잃고 도심을 습격할 수밖에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이 멧돼지의 숫자를 자연스럽게 조절해줄 친구들을 우리의 산에서 지켜내지 못하고 멸종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을 우리의 산에 다시 불러오는 길도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해야 합니다. 산을 더 자연답게 가꿔야 하고, 도토리나 밤톨 하나라도 산에 그대로 두고, 산을 밀어붙여 도로나 도시를 건설할 때 생태축의 단절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최대한 모색하고, 정 필요하다면 철저한 준비를 거쳐 먹이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또 다시 멧돼지를 향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가슴을 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대가로는 너무 작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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