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우리 시대의 평화통일론’ 아침햇발

2010년 8월13일자 아침햇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직도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오는 18일 그의 서거 1주기가 다가올수록 비통해하는 마지막 모습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가 마지막까지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화해 있기 때문이다. 대결로 치닫는 한반도 상황이 대표적이다.


그는 최후까지도 남북 화해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서거 뒤 형성된 조문정국이 한 예다. 대결 상황에 있던 남북이 그의 서거 앞에 방향 전환을 모색했다. 북한은 조문단을 파견했고, 이명박 정부는 임기 중 유일하게 남북대화를 진지하게 모색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는 더 짙은 먹구름에 덮여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쉽게 눈물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를 덮은 먹구름의 핵심 중 하나는 ‘평화통일론의 부재’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큰 지도가 없다는 말이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 대북정책은 흡수통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이를 통일론으로 거론조차 못하고 있다. 북한의 반발을 부를 뿐 아니라, 실현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흡수통일론을 요약하면 “북한이 붕괴하면 흡수해 통일한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학자들은 남한의 경제력과 국제정치를 고려할 때, “설령 북한이 붕괴해도 흡수하는 것은 중국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북한 붕괴를 상정한 듯한 대결정책을 강화해나간다. 지지세력의 이념적 성향 탓인지, 현황을 파악할 머리가 없는 탓인지 잘 모르겠다. 어찌됐건, 이 정부의 ‘암묵적 통일론’은 자칫 한민족의 활동범위를 통일신라 때보다 좁혀버릴 수 있다.

 

이런 ‘무대뽀 통일론’이 ‘김대중’을 더욱 생각하게 한다. 그는 남북 대결주의가 기승을 부린 독재정권 아래서 평화통일론의 싹을 틔웠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때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제안했고, 1973년에는 이를 발전시켜 공화국연합제 안을 내놓았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서슬 퍼런 유신독재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보다 불과 10여년 전에 조봉암 진보당 당수는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것 등이 빌미가 돼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 또한 자신의 통일방안 탓에 곧잘 용공으로 몰렸고, 1980년 사형선고를 받을 때도 이것이 죄목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가 생명을 걸고 심어놓은 평화의 씨앗은 결국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죽음의 5공화국’을 넘어서자, 노태우 정부는 그의 통일론을 인정하고 일부 채용했다. 그 자신도 대통령이 되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자신의 통일론을 부분적으로 현실화했다. 그런데 이 정부가 그 ‘평화’를 지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 시대의 김대중’이 절실하다. 이명박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향한 나침반을 제시할 이가 필요하다. 그가 내놓을 ‘우리 시대의 평화통일론’은, 독재 시절 김대중이 보여줬던 용기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2000년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의 2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두 정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평화통일 방안이 남북 내부의 합의와 남북 사이의 합의라는 ‘이중의 합의’에 바탕해야 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조항은 가장 현실성 있는 논의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과 진보세력도 이명박 정부의 대결정책만 비판할 뿐, 정작 ‘우리 시대의 평화통일론’을 함께 만드는 일엔 소홀한 듯하다. 남북 지도자가 합의한 ‘연합과 연방’이라는 단어와 직면하는 걸 꺼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시대에 김대중식 통일론을 발전시키는 것’, 그것은 서거 1주기를 맞는 김대중에게 보내는 가장 커다란 경의이며, 가장 뜻깊은 헌화가 될 것이다.  김보근 스페셜콘텐츠부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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