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아내’가 생겼다

 “오늘부터 자리 바꾸자.”
 침대 머리맡에서 머뭇거리던 아내가 입을 뗐다. 잠자는 위치를 바꾸자는 이야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내는 줄곧 아이 옆에서 잤다. 아이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달라며 보챘다. 젖을 물고 울음을 멎기도 했지만, 죄다 싫다며 우앙~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아픈가? 소화가 안 되나? 악몽 꿨나? 응가 했나? 배냇니가 간지럽나?
 하지만 잠결에 울음소리가 방안 공기를 갈라도, 난 절대 곧장 깨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리며 그저 아내가 처리할 거라 믿었다. 아내가 피곤함에 찌들어 도저히 못 일어날 땐 내가 아이를 안아 어르기도 했지만, 솔직히 가끔이었다. 나름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바깥일로 피곤하니까, 아침이면 또 출근을 해야 하니까. 고맙게도 아내는 나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밤낮없는 육아에 아내는 늘 수면부족이었다.
 그렇게 9개월 동안 집에서 아이를 돌본 아내가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오로지 경력 단절이 많이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는? 여러 고민 끝에 결국 내가 맡기로 했다. 아내의 출근에 맞춰 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 밤, 아내가 첫 출근을 앞둔 그 밤, 오랜만에 정장과 핸드백을 챙기던 그 밤, 아내도 나도 새로운 삶을 생각하며 긴장했던 그 밤, 아내는 나에게 ‘잠자리 교체’를 기어이 요구했다. 내겐 거절할 명분도 자격도 없었다. 쿨하게 오케이. 나는 아이 곁으로 기어갔고, 아내는 아이로부터 떨어졌다. 나의 육아전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가 바꾼 것은 잠자리만이 아니었다. ‘야간 육아’를 포함한 육아 일정 모두가 오롯이 내 손으로 넘어온 대신, 만원버스에 날마다 시달리는 출퇴근은 아내의 몫이 됐다. 아이를 돌보면서 틈틈이 밥·설거지·청소·장보기를 처리하는 요령을 나는 익혀야 했고, 혼자 벌어 셋이 쓰느라 빠듯해진 생활비 걱정은 아내가 떠안게 됐다. 아이 손에 늘어나고 음식물에 얼룩진 내 옷차림새는 볼품없어졌지만, 아무리 버거워도 퇴근 뒤나 주말엔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본능적 책임감과 부담은 아내가 가져갔다.
 요즘 보면, 아내는 항상 되는대로 최대한 일찍 귀가하려 노력한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돌아와 한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어서다. 엄마를 보며 활짝 웃는 아이의 환대는 언제나 가슴 뭉클하다. 나도 그랬다. 그 웃음 한번에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곤 했다.
 옷 갈아입고 씻고 저녁을 먹은 아내는 으레 “내가 이따 설거지할게”라며 다시 아이한테 간다. 나는 피식 웃으며 빈 그릇을 개수대에 담고 팔을 걷어붙인다. 아내가 저러고서 그냥 잠이 든 게 벌써 몇 차례던가. img.jpg나도 겪어봐서 안다. 아이랑 잠들기 전까지 놀아주다 보면 함께 곯아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내는 분명 이래저래 피곤할 것이고 못 끝낸 일 탓에 한밤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야할지도 모른다. “애랑 놀아주기나 해. 엄마 보고 싶었을 거야.” 설거지는 지금 하나 내일 하나 어차피 내 몫이다.
 어느 날 아침 아내가 집을 나서다 말고 영화 제목 같은 ‘고백’을 내게 건넨다.
 “오빠, 요새 나도 아내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야.”
 왠지 듣기는 좋은데, 그럼 나는 남편이 생겼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러기엔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왜일까?

** 이 글은 디자인하우스 간행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 2011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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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