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을 내미는 아이에게

저금통을 들고 현관까지 쫓아와 “아빠, 이거 줄 테니까 오늘은 돈 벌러 가지 마”라며 아빠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 내겐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18개월 아이는 아직 말을 못한다. 나의 출근은 아이가 아직 깨지 않은 새벽에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그걸 뿌리치고 집을 나설 자신이 솔직히 없다.

저금통을 내미는 아이를 모티프로 한 텔레비전 광고도 있었다. 그 광고도 결국 현명한 답을 내놓진 못한 채, 아빠의 웃음과 함께 다른 장면으로 넘겼다. 실제로도 아빠들은 제대로 답을 못한다. 한 아빠는 "아빠 회사 가서 돈 벌어와야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지”라고 했다가, “아빠, 나 앞으로 조금만 먹을 테니까 안 가면 안 돼?”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한다. 밤에 아이를 재우다 “오늘 밤 푹 자고 내일 아빠 회사 다녀오면 또 놀자”라고 했다가 “오늘 밤 안 자면 아빠 내일 회사 안 가도 돼?”라는 질문을 받은 아빠도 있다. 미안한 아빠는 그저 씁쓰레 웃을 뿐이다.

회사는 많은 아빠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그렇기에 어찌 보면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동료와 함께하는 곳이다. 일상이 회사에 맞춰 구성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출근 시간에 맞춰 기상 시간과 아침 식사 시간이 정해지고, 퇴근과 야근 및 약속 유무에 따라 저녁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이 정해진다. 불가피한 주말 출근이나 휴가, 출장도 모두 회사의 요구에 따른다.

결국 회사 일정을 뺀 나머지 시간대가 가정에 할당되지만, 이마저 온전한 것은 아니다. 일감을 싸들고 집에 오기도 하고, 쉬다가 갑작스레 출근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출산 이후 밤잠에 방해된다며 엄마와 각방을 쓰는 아빠들도 있다. 젖먹이는 야간 수유를 해야 하는 엄마에게 맡기고, 아빠는 옆방이나 거실에서 따로 잔다. 아이가 백일인 직장인 ㅈ씨는 “다음날 또 출근 생각하면 같이 자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하고, 아이가 곧 돌이 되는 직장인 ㅎ씨는 “출근이 일러서 애 낳고 나서 줄곧 각방 살이 신세”라고 한다.

이 아빠들이 가정에 소홀하다고 쉬이 단정할 순 없다. 그저 우리 사회의 다른 남성들처럼 회사에 다닐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빠는 회사에 가느라 육아를 할 수 없다’는 전통적 시선 덕이고, 우리는 이를 바꿔놓을 획기적 사건을 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지난해 영국이 경험한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육아 참여 같은 일이다.

데이비드 캐머런(46) 영국 총리는 2010년 8월 둘째딸이 태어나자 총리직을 잠시 쉬고 2주간 ‘아빠 육아휴가’(paternity leave)에 들어가 산후조리와 육아를 거들었다. 석 달 뒤 이번엔 야당 쪽에서 에드 밀리밴드(43) 노동당 당수가 둘째 아들의 출산을 맞아 육아휴가를 시작했다. 여야 지도자의 육아휴가는 아빠도 육아에 동참해야 한다는 기존 사회 여론을 십분 반영한 것이었고, 이 사건 이후 이런 목소리는 한층 힘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아이의 교육에서 아빠의 비중은 크다’ 정도의 수준에서는 공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사회적 고민이 성숙해 ‘아빠의 육아는 엄마의 육아만큼이나 당연하다’는 인식이 보편화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마도 저금통을 내미는 아이에게 해줄 현명한 답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컨대,아이 나이에 따라 일주일 출근 횟수를 정하게 해서, “우리 ○○이 3살이니까 아빠(엄마)도 일주일에 3일은 회사 가야해”라고 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너무 무리일까?
 
** 이 글은 육아휴직중이던 시기에 작성해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1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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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 정치부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