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천 포도주 난동 사건

자동차 뒤 트렁크를 열었다. 선배가 말한 대로였다. 포도주가 여러 병 보였다. 신부님이 미사 때 마시는 포도주라고 했다. 지인인 한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포도주라는 말도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아니 신부님. 아니 선배님. 신부님은 미사 때마다 포도주를 마신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포도주를 마셨던 것처럼. 미사 때 신부님이 예쁜 잔에 포도주를 한 모금 따라 마실 때면 신.부.님., 원. 샷. 속으로 외쳤다. 꼭 미사나 예배 때 경건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나 같은 신자가 있으면 하느님도 즐겁지 않으실까. 하느님의 사랑이나 은총에 대한 생각보다는 신부님이 미사 때 마시는 포도주 맛은 어떨까 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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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석양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을 무렵, 안양천 변에 세워둔 선배 차에서 포도주를 꺼내 왔다. 기자 동기 두 명도 함께 포도주를 날랐다. 한 여름 밤의 꿈이라면 문학적이고, 한 여름 밤의 포도주라고 해도 낭만적일 수 있다. 하지만 안양천 변에서 포도주라면 장르가 묘하다. 김장을 담그는 날 간식으로 피자를 먹는 느낌이랄까, 추석 날 차례를 지내고 달팽이 요리를 먹는 어색함이랄까. 그래도 아무렴. 좋네, 좋다. 동기들은 포도주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했다. 여름밤은 깊어 갔고, 시간은 멈춰선 듯 했다. 동기 두 명과 선배 한 명 그리고 나까지 모두 네 명. 눈앞에 술이 있고, 그 술이 달고, 사람이 넷이며, 그 모두가 남자, 게다가 그들의 직업이 기자라고 한다면, 술잔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게다가 쉽게 구할 수도 없는 포도주였으니, 느긋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안양천 밤 공기에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담기기 시작했다. 모.두. 원. 샷. 남들이 뭐라든 원. 샷. 주변의 시선이 있었던가, 보이는 건 술 잔뿐이니까 다시 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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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언제부터인가 원 샷 소리는 고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땅이 휘청거릴 즈음, 오고간 대화는 점차 거친 느낌을 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좋은 관계는 좋은 말만 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내 말을 받아줄 거라는 신뢰가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서로 오간 고성에 담긴 말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 선배는 후배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대화는 자주 내용을 남기지 않고 느낌을 남긴다. 선배가 보는 세상은 이렇고, 내가 보는 세상은 선배와 달랐다는 말. 기억이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선배는 한 명이었고, 그 선배가 마주한 후배는 모두 세 명이었다.
 
 앉아 있어야 할 내가 어느새 서 있었다. 영화 필름 중간이 뚝 끊긴 것처럼. 바로 앞에 선배가 보였다. 그 선배도 일어서 있었다. 고성은 내 입에서 나왔다 흩어졌다. 비슷한 단어들이 서로 연결돼 오고 갔다. 치겠다, 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 선배의 입에서 나왔고, 그러시라 라는 뜻이 담긴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감정을 담은 말들이 터져 나왔다가 흩어지기를 몇 번 반복이 됐다.
그리고, 난. 한 여름밤 안양천에서 환한 ‘별’들을 보았다.
퍽.
헉.
풀숲에 쓰러졌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건 주먹이 전달한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술에 취하면 쉽게 잠이 들었는데, 이렇게도 쓰러지니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만취하면 큰 사고를 나도 다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더니만, 이해가 갔다. 나중에 내 몸을 보니 모두 멀쩡했으니까. 그래도 넘어지는 순간 후회는 좀 됐다.
-내가 왜 치라고 했을까.
란 생각 하나. 
-치라고 했다고 정말 칩니까.
란 생각 둘.
반쯤 감긴 눈으로 앞을 보니 내 동기 한 명이 선배를 뒤에서 부둥켜안은 채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엄마가 아이를 엎은 모양처럼, 그날 선배의 덩치는 유난히 커 보였다. 그러든 말든, 졸음이 몰려온 난 풀숲에서 누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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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안양천 포도주 난동 사건이 있고 몇 년 뒤 그 선배는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문대 출신에, 석사 학위만 세 개. 정치부 기자였고, 유명 출판사 임원 자리에 있다가 유망한 정치인 곁에서 중요한 업무를 처리를 했다. 항상 그 선배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의 자리엔 권력이 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한 선배의 모습은 치열했다. 치열한 시간은 최선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랬던 그 선배가 신년회 자리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꺼냈다.
 “집을 잘 챙기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컸더라.”
 ‘물론, 우리끼리는 잘도 마시고 놀았죠.‘
 안양천과 마찬가지로 이 날도 포도주가 있었다.
 “더 이상 아이들과 대화하기 어렵더라고. 거리감이 느껴졌거든.”
 기자로, 기업 임원으로, 정치인으로 최선을 다했던 그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마도 아이들은 기자였던 아빠와, 임원이었던 아빠와, 정치인이었던 아빠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최선을 다하는 기자였지만, 아내가 떠나는 그 전날에도 출입처 기자실에서 기사를 썼었으니까.

 

  일주일 전쯤 그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힘이 있는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 선배의 눈 높이에서는 소박할 수 있겠지만 소중한 삶의 터전을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회사는 앞으로 3년 쯤 지나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다시 자신의 꿈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앞으로의 꿈은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이라고. 듣는 순간 반가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 선배도 주부의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주부의 자리는 힘도 없고 사회적 평판도 인정도 없지만, 단 하나,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을 매일 굵게 만들어가니까. 안양천에서 보인 큰 목소리도 커다란 주먹도 넘쳐나는 힘도 이젠 그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그는 기자도 아니고, 유망한 정치인 곁에 있지도 않지만, 그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선배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단단함을 지키기 위해 제 몸을 갈라놓는 메마른 땅 위로 비가 촉촉히 내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갈라진 땅이 부드럽게 변해 생명을 키워내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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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언젠가 그 선배가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할 때, 이번에는 지지말고 한 마디 거들어야 겠다. 
 "선배, 감칠맛이 안 나면, 액젓으로 간을 해요."라고. 주부는 내가 선배니까.  포도주는 사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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