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재영 사무처장, “사람 덜 죽이고도 국방 가능하다” 정세

해병대를 비롯한 한국군의 병영 내 악습 철폐를 주장하다 전역한 지 20년 만에 ‘기수열외’를 당한 해병이 있다. 군인인권연대 정재영 사무처장이 그 주인공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 억울함은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치유할 수 없는 원한으로 남고, 산 가족들의 가정까지 무너트린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군 사망사고의 일선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정재영 사무처장을 만나 해병 2사단 총기사고를 진단해보고 군 사망사고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들어봤다.  


대담 김종대 편집장 jdkim2010@naver.com
정리 김동규 기자 ppankku@naver.com



군 사망사고 현장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정재영 대표는 10년 정도 단체를 이끌어 오고 있다. 이런 중요한 단체를 혼자 힘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군인 인권연대가 출발했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군에서 사망하는 장병들에 대한 언론 보도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장병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고,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같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시민단체를 조직하거나 운영해본 경험이 없었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보니 이른바 시민단체와 인권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처음 단체를 결성할 때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기성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사망 장병 유가족 단체로 출발했다.


군인 인권연대에서 소개할 만한 주요성과는 어떤 것들이 있나?

우리 단체가 군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고들에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등 눈에 띄는 큰 업적은 없다. 군내부에서도 자해사망은 사안 자체가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사소한 사고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고, 병사 한 명이 자해사망했을 때 언론에서도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국방부가 마련한 지침에도 2명 이상이 사망하여 사회적 관심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 사고를 ‘중요사고’로 분류하고, 언론, 시민,인권단체 등의 개입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지휘관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크고 작은 사고 현장을 항상 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략 320건 정도의 사망사고 현장에 우리가 있었고 군의 조사에 동참했다. 이것 자체가 가장 큰 성과라고 본다. 사망 장병 유가족에 대한 도움에서는 법률서비스가 있다. 장병 개개인의 자해사망 책임이 죽은 본인과 유가족에게만 있는 것인지, 우리 사회와 국가가 나누어 책임질 부분이 없는지를 살펴 재판을 청구하고 재판부의  판결로 개인과 국가의 책임부분을 명확히 한다. 이를 통해 망자와 가족들이 누려야할 당연한 권익을 찾도록 했다. 이러한 소송의 경우 대부분 승소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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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인권연대 정재영 사무처장

일단 주된 활동은 먼저 현장을 지키는 것이고 책임규명, 진상규명, 그리고 법원 판결까지가 하나의 활동이란 말로 이해된다. 사망 장병이 발생했을 때 어떤 경로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나?


대부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제보를 받는다. 자녀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은 부모는 사실상 패닉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어디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청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장병의 형제나 친척 등 또래 아이들은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제일 먼저 인터넷을 찾는다. 군 관련 인권단체 사이트를 찾다보면 우리 사이트가 링크돼있는데, 보면 바로 연락을 하게 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현장에 가보면 유족 측 연락이 신속해서 소속대 헌병보다 먼저 도착할 때가 간혹 있다.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사고발생부대에서도 경황이 없는 나머지 사고 사실을 바로 가족에게만 연락하고 나중에 헌병에 연락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위치가 가까운 경우는 우리가 군 수사진과 비슷하게 현장에 도착할 수도 있다. 특히 김포, 강화의 해병사단이나 서부전선 1군단 예하부대, 수도권 주변의 수방사 예하부대 등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 사무실이 김포공항 부근에 있다 보니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있다.


법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법률 전문가가 상주하고 있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률서비스의 관점에서 우리 단체에 자문해주시는 변호사들이 몇 분 있다. 대표적으로 민변의 심재환 변호사와 이근윤 전 부장판사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의 이상준 변호사를 비롯한 파트너 변호사들이 있다.

우리 유가족들이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도움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병역 문제가 국민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힌 공익적 요소가 있음을 이해하고 기꺼이 나서 변론을 도맡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근무피로도 누적도 악습 존재 요인

이번 사고가 발생한 해병대의 경우 다른 군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는가?

다른 군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사고가 발생한 부대는 2사단 8연대 1대대인데, 사실 나는 27년 전 같은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사고와 관련해 김모 상병과 정 모 이병이 당한 가혹행위의 일부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7년 전 내가 그 부대에서 근무했을 당시 선, 후임간 자행되던 불법가혹행위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이런 고백을 많이 했다.

“해병대를 비롯한 군 병영내의 악습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만들어져 내 세대를 거쳐 내 자식이며 우리 아버지의 손자인 지금의 현역복무자들에게 대물림됐다. 결국 이것은 그 악습을 만들었고, 또한 끊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책임인 것이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고쳐야한다고 말하지 않은 대가를 우리 아이들이 치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저급하고 비인간적인 병영문화 자체는 지휘관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기수나 육군의 차수를 없애고 빨간명찰을 떼기 전에 이런 반성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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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대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군인인권연대 회원들.
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군에서 사망한 장병들의 어머니들이다.


지금 예비역 사회에선 전우회조차 사과성명 한 장 내지 않았다.

해병 예비역 대부분은 오히려 김 상병을 나태하고 나약한 배신자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김 상병의 행위를 불러온 근본적인 문제, 즉 병영내 가혹행위의 문제점에 주목하기보다 “해병대가 강군으로 발전한 배후동력으로 선후임간 구타, 가혹행위가 상당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왜곡된 인식으로 사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선후임간의 구타 가혹행위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과거에는 오히려 저변문제로 인한 사고가 거의 없었던 점도 예비역들로 하여금 “김 상병이 제대로 안 맞아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예비역들이 어떤 반론을 낸다 하더라도 법적 관점에서 보면 선후임간 구타, 가혹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다. 2005년 병영생활 5대강령을 왜 만들었나. 병사들에게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을 분리해 그 공간에서 주어지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활해 숨통을 좀 열어주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제도를 시행하고 감독해야 할 고위지휘관들의 이행의지가 적극적이지 못하다보니 육ㆍ해ㆍ공군은 물론 해병대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큰 효과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핵심문제는 기본권 같다. 사실 임무나 훈련이 힘들다는 것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고 강한 군대의 대명사 해병대니까. 그 힘든 훈련들도 휴식과 사생활이 보장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사고가 거의 내무생활 부조리에서 발생한다.

현실적으로 임무수행에 필요한 물자, 인력, 화력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월등한 실적이나 전과를 올리기는 힘들다. 그러다보니 강제로 병사들을 내몰아 밀어붙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이른바 해병대는 “악으로, 깡으로”라는 구호로 정신전력화한 것이다.

물리적, 신체적 한계를 넘는 과업을 부여해 명령으로 강제할 때 그것을 구현해내는 방법으로 병사들 상호간, 선후임 간의 구타와 가혹행위는 아주 효과적이고 손쉬운 수단이 된다. 해병대는 이처럼 치졸한 리더십을 군기로 포장해 해병정신으로 교육했던 것이다, 이는 선배해병들이 전장에서 쌓아올린 빛나는 전통과 업적을 물려받고도 자신들의 정신적 자산으로 삼아 계승, 발전시켜 활용할 의지와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한 예비역 장군이 이번 사고를 분석하며 원인들 중의 하나로 제시한 의견이다.
“육군의 경우 각 연대에서 1개 대대 즉 3개 보병대대 중 1개 대대가 전방에 들어간다. 나머지 하나는 대기를 하고 하나는 훈련을 한다. 그런데 해병 2사단은 9개 대대 중 7개 대대가 전방에 있다. 쉽게 말해서 육군은 9개 대대가 3교대 근무를 한다면 해병대는 1교대도 안 되는 것이다. 0.7교대 정도 된다. 그러면 근무 피로도가 얼마나 누적돼 있겠느냐. 당연히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27년 전 내가 근무할 때도 그랬다. 장군은 당시 초급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사단장이 됐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이게 해병대의 운명 아니냐.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어떤 대답을 하겠느냐”는 답이 돌아왔지만, 이 예비역 장성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고 본다. 연평도 사건 이후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생겼다. 인원이 2천 명 정도 충원될 것이라 하는데 그 인원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리적으로 인력충원이 완료될 때까지는 육군과 해공군에서 파견되는 인원들을 제외한 필수인원이 1사단과 2사단 등 많지 않은 해병대의 예하부대들에서 차출돼 올라갈 것이다. 이럴 경우 어느 부대에서는 소대 30명이 10개 근무조를 만들어서 경계근무를 선다고 했을 때 한 개 팀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병들의 피로도가 더 가중되지 않겠나. 오늘도 해병대 원사 하나가 목을 매 자살했다.

또 한 가지 예가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해병대는 염하계획이라 부르는 부대개편을 통해 2해병여단을 사단으로 증편했다. 당시 포항의 1사단과 백령도, 연평도 등지에서 인원을 차출해 1개 연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병력이 충원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병력을 갑자기 늘릴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차출해 충당한 것이다. 당시 병력 차출의 부작용은 매우 심각했다.

상호이질감이 있는 부대원들이 한데 모이게 되자 해병대 특유의 기수에 다른 선후임간 위계가 확립되고 열악한 환경에서 구타와 가혹행위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그 흐름이 80년대를 지나 9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가뜩이나 업무가 과중한 2사단에서 병력이 빠지면 과거의 불행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취업 정책으로 변질된 인권 상담관 제도

군에서는 병영문화개선 활동을 많이 했다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상담제도도 도입했고 관심사병제도와 그 사람들을 수용하는 그린캠프, 비전캠프 같은 것들을 통해 예방 노력을 많이 해왔다고 한다. 이런 군의 시책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군 인권 상담관 제도는 우리 단체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던 사항이다. 2002년에는 국방부에 직접 인권 상담관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입대 후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병들과의 상담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줘서 극단적 행동을 자제하는 효과를 얻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국방부에서는 제도 도입을 거부했다. 그러다 2005년 28사단 530GP사건(김일병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방부가 우리 제안을 수용해 최초 20여명의 민간인 인권상담관이 임용됐다. 이들은 사회에서 활동하던 심리 상담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당시 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도한 그분들의 교육에 협력해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제도 도입 7년차가 되는 지금의 상황은 암울하다. 당시 임용됐던 민간인 인권 상담가들 대부분이 해고되고, 그 자리를 전역한 예비역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언제 해고됐는가?

특정 시점에 한꺼번에 해고된 것이 아니라 최근 2~3년 사이에 진행됐다. 민간 전문상담관들이 해고된 그 자리는 다시 군에서 전역한 예비역 군인들이 채우고 있다. 병영에서 사망하는 장병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을 보며 심리상담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자는 취지로 제안해 시행된 제도가 제대군인 취업정책으로 변질된 것이다.


지금도 20여명을 유지하고 있는가?

지금은 제대군인들로 채워진 상담관 숫자가 90여명이 넘는다. 장병들의 생명과 관련된 제도를 제대군인 취업정책으로 변질시킨 것에 대해 국방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국방부는 “그분들도 전문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임용된 전역군인들은 제2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모 장성의 친구로, 목사로 활동하던 사람이 급조한 심리상담분야의 시민단체에 가입한 회원들이었다. 주요지휘관의 지인이 급조한 단체에 제대군인 출신 상담관들을 회원으로 전원 가입시켜 신분세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이 전문가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제도가 변질되고 전문성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들어갔으니 애초에 의도한 목적을 달성 할 수 있겠나? 요즘 언론에는 이들의 숫자가 불과 90여명에 불과해 제대로 된 상담활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이 보도 된다. 숫자를 늘려야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5천만 국민의 인권을 책임지는 국가인권위원회 직원이 몇 명인가? 65만 장병의 인권을 돌보는 90명의 인원이 부족한가? 아니다. 지휘부가 가진 인권에 대한 의식자체가 부족한 것이 원인인 것이다. 숫자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 치면 최소한 활동 흔적은 볼 수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제도개선을 한다면서 반만 한 것 같다. 일단 만들어놓긴 했는데 운용의 전문성이 없고 효과도 없고.

실무부대에서 적용할 제도를 일단 만들어 놓기만 하고 그것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자해사망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놓기는 하는데 그것이 실무부대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돌아보는 것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전캠프와 그린캠프 운영이다. 비전캠프는 1999년 군에서 자해사망장병이 늘자 문제가 있는 인원들을 선별해 사망률을 줄여보자는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한계가 있었다. 2박 3일에서 3박 4일간 운영되는 비전캠프 운영을 통해 자해사망 가능성이 있는 병사들을 어느 정도 찾아낼 수는 있게 됐지만 마땅히 조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그린캠프다. 그린캠프는 비젼캠프를 다녀와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병사들을 별도 수용하는 곳인데 사실 이것은 불법 감금시설에 가깝다. 관련 전문가가 상주해 치료나 상담 등의 적절한 과정을 제공하지도 않고 실효성을 기대할 만한 프로그램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단순히 밀폐된 공간에 가둬두기 때문이다.

일례로 화장실에 가보면 용변을 보는 모습을 다른 감시자가 지켜보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더구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 자행되는 인신에 대한 구속은 법치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심각한 불법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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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군복무 중 총에 맞아 사망한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좌측 첫 번째).
국방부는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지만 사망 후 26년 만에 사법부에서 타살로 인정됐다. 

 

150명 죽어 5천만 지키면 효율적?

우리나라는 군대의 특수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군인정신이란 것은 특별한 게 아니고 시민정신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제복을 입었을지라도 기본권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보통 군인에 대해선 상대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특수성이 아니라 예외성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법무관들이나 인권을 담당하는 분들에게 인식의 벽이 있는 것 아닌가?

군인도 법을 지켜야 한다. 군의 임무와 역할은 헌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군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보면 그러한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위지휘관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속마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 육해공군을 막론하고 그들 대부분의 일치된 시각은 이렇다.

정권이나 특정 정부는 유한하지만 국가와 국가를 보호하는 군대는 동일운명체로서 무한하므로 군은 시류의 변화나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이념을 고수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마치 양심수의 신념처럼 확고하다.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기 때문에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군이 항구적이고 초월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내가 느끼기에 현직 국방장관도 진정한 의미에서 대통령의 지휘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성우회와 재향군인회 등에 소속된 예비역 선배장성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정책은 군에서 뿌리내리기 어렵다. 결코 문민통제를 실현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군 고위지휘관들은 군에서 이렇게 많은 장병들이 죽어나오는 현실 속에서도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인권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사석에서 모 장군은 나에게 “우리는 5천만 국민을 지키는 군대다. 연간 150명이 죽어서 5천만을 지킬 수 있다면 이것처럼 효율적인 투자가 어디 있는가. 이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이야기 해봐라. 날 납득시키지 못하면 우리 군은 그냥 이대로 갈 것이다”라고 말 했다. 이것이 그들의 본심인데 대외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니 ‘군에서도 할 만큼 하고 있는데 어떡하라는 말이냐’는 식의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나 독재국가를 제외한 민주국가에서 징병제를 택한 나라 중 우리나라처럼 구타나 가혹행위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경우가 있는가? 징병제인 대만이나 독일, 이스라엘 같은 곳에서 이런 문제가 사회문제로까지 번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대만군에서 사망사고가 있었다. ‘황마마’라는 어머니 이야기다. 황마마는 ‘황씨 성을 가진 아이의 엄마’라는 뜻이다. 황마마는 어느 날 군에 보낸 아들 황궈장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몇 달 뒤 중국 해안에서 발견된 아들의 머리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때부터 황마마는 군에서 사망하는 장병들의 문제를 수면위로 띄웠고 이후 대만군에는 옴부즈맨 제도가 활성화 됐다. 황마마는 이 과정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미친 여자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만 군 인권 개선의 상징이 됐다.

대만은 우리나라처럼 징병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만큼은 아니지만 병사들의 처우를 기본적인 수준으로 돌보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최소한 OECD가입국 중 한국만큼 구타와 가혹행위로 인한 인권침해 문제가 많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러시아의 군내 인권침해문제가 심각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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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영 사무처장은 인권상담관 제도의 정상화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뜯어고치기 어려우면 덜 죽이자"

국방부에서는 국내 동일연령층의 자해사망률에 비해 군의 자해사망률은 절반밖에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제일 답답하다. 통계는 왜곡되면 안 된다. 우리 군대는 65만이다. 65만 명의 연령구성분포도를 봐야한다. 만 19세~23세 인원이 70%가 넘는다. 그렇다면 인구 10만 명당 자해사망률 비교를 하려면 동일 연령대에서 표본을 적출해야 한다. 사회구성원 중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자해사망률도 높아지지 않는가.


자해 사망하는 장병들을 어떻게 하면 더 줄일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모든 군자해사망의 책임이 국가와 군에 전적으로 있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한다. 최소한 절반의 책임은 그 가정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장병들이 군대라는 획일적인 집단에 들어가서 요구받는 것은 하나의 일체된 행동이다. 그 과정에서 부적응자가 생길 수도 있고 조직을 불법으로 이탈하는 장병도 있는 것이다. 그럼 적응하지 못하는 그 장병들은 다 죽어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군 스스로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함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자원에 대해서는 과감히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지휘관들은 항변한다, “애초에 상한 사과를 납품해놓고는 상했다고 군을 원망하고 책임지라고 한다”. 군인으로 부적합한 문제 있는 자식을 군에 보내놓고는 정작 문제를 일으키면 군을 원망하고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이의를 사과납품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애초에 사과납품은 군에서 요구한 것이다, 상한 사과는 납품을 받지 마라. 그리고 나중에라도 문제를 발견했으면 즉시 반품을 해라.” 자식농사를 지은 우리 부모들이 책임을 질 테니 억지로 품고 있다가 임의로 폐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자해사망한 장병들 가운데에는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처럼 특정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자해사망 장병들 중에는 극도의 집중력으로 뭔가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중해 몰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일반적인 젊은이들과 달리 이런 아이들이 장기적으로는 두드러진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그들이 남긴 글이나 유서를 보면 그야말로 어린 철학자이다. 그 아이들이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직의 획일화된 문화에 적응이 좀 늦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죽어야 하나?


착잡한 이야기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 민주화되고 인간다워지고 선진화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같이 느껴진다. 이 현상을 어떻게 개조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고위 지휘관들은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방송용 멘트로만 존재할 뿐 본심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고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노력 한다면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면 분명 더 줄일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고를 줄이기 위해 집중하다 보니 군 본연의 임무에 차질이 발생한다. 지휘관들의 지휘 부담이 가중된다. 우리는 그 비효율성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겠다. 그게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측면에서는 더 효율적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념으로 굳어져 있다. 신념이란 것은 깨기가 참 힘들지 않나?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단순하게 이야기한다.

“여러분 지금까지 잘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조금만 덜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전우회 제명당해도 할 말은 하는 해병


TV토론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해병대 전우회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전우회에서 제명됐다.


무슨 이유로 제명이 됐나?

토론 프로그램에서 육해공군의 병영 내 저변문제는 물론 해병대 내의 악습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구타 근절도 함께 주장했다. 그랬더니 “해병대가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선후임간의 구타나 가혹행위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문화 속에서 정예강군으로 존재해왔던 게 아니냐? 하루아침에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해병은 배신자다”라는 취지로 말하더라.


따로 연락이 온 것인가?

당시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여러 개로 분산돼 활동하던 해병대 전우회의 총재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사람이 나에게 “앞으로 정 해병은 어디 가서 해병대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식 제명이니까 그런 줄 알아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역한 지 25년이 넘은 내가 이른바 해병열외를 당했다. 내 아이디로 홈페이지 게시판 접근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은가? 나는 해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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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동료 장병 15명을 사살하고 북으로 넘어간 김일병 사건에 관련된 지휘관 확인서.

당시 사망한 장병들의 유가족이 도착했을 때 이미 이들의 시체를 연병장에서 태우고 있었다고 한다.

지휘관이었던 최석주 대령이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확인서를 써주고 일인당 244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전우회 건 말고도 개인적인 불이익이 많았을 것 같다.

나보다는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다. 특히 본의 아니게 진급이 막혀 군복을 벗은 군인들도 있고, 여러모로 도움 주시는 분들께 보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우리 군인인권연대가 아니면 사망한 아이들과 그 유가족이 기댈 곳이 별로 없다. 앞으로도 불이익이나 불편은 다소 있겠지만 군자해사망자가 대폭 줄어들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도 병사들의 인권을 위해 힘을 써달라고 부탁드린다.

무엇보다 국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내 자식이 군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아가는 데 적극 참여하고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정재영 군인인권연대 사무처장 약력

1964년 충남 공주 출생
목원대학교
디펜스포럼 운영위원
군사플랜 전문위원
전 국가인권위원회 군전문위원
군인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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