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꽃을 심는 사람 화순댁의산골마을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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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눈 감지 마요! 일어나요~~오!”
고요함을 가르는 네 살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까무룩 잠이 들 뻔했던 나는 눈을 바로 떴다. 황급히, 젖을 물고 있는 둘째의 상태를 살핀다. 다행히 미간만 찡그렸다 펼 뿐, 감고 있는 눈까지 뜨진 않는다. 다다다다다! 1m 떨어진 거리도 걷는 법이 없는 아이가 거실을 가로질러 내 품으로 전력질주를 해오고 있다. ‘쉬잇~ 태희 잔다~ 태희 자~~’ 눈짓 손짓으로 애원을 해보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기’가 유일한 목표인 어린 몸뚱이는 멈출 줄을 모른다. 잠든 아이를 재빨리 눕히고 큰아이를 안아 올리는 순간 무릎은 빠지직 머리는 흔들. 30개월, 9개월 두 아이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가자!”
동생이 잘 때라야 온전히 엄마를 차지할 수 있는 아이가 엄마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그래 봤자 밭두렁 아니면 논두렁 마실. 그래도 시간이 남고 체력이 되면 보건소 계단에서 볕 좀 쪼이다 휠체어가 다니는 길을 오르락내리락 기차놀이를 하다, 뒷마당에서 따식이랑 꼬꼬야들 구경하고 오는 게 전부지만 아이는 질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산골 마을의 봄이란 마치 매일 얼굴이 바뀌는 어린아이들 같아서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다. 담벼락 밑 땅바닥에 바짝 몸을 수그리고 피어 있던 보라색 꽃을 발견하고 “와, 넌 언제 태어났다니!” 했던 게 엊그제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새초롬한 노란색 꽃이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 하루를 쉬면, 그만치의 새로움을 놓친다.

 

3월 말, 아이의 머리칼을 제멋대로 날리는 바람결에는 아직 겨울 흔적이 남아 있다.

“아이 똥 냄새!” 무엇보다 이맘때의 산골 마을 구석구석은 똥 냄새로 그득하다.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움켜쥐는 아이가 귀여워서 엄마는 아이가 요청하지도 않았건만 등에 태워 버린다. 꺽꺽대며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듣고 싶어 손가락으로 아이 궁둥이를 조물락거리며 시인이라도 된 양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단어들을 조합해본다.

 

봄 냄새는 꽃향기가 아니라네.
커다랗고 누런 황소가 철푸덕 하는 소리를 내며
똥을 누는 장면이 저절로 떠오르는,
퀴퀴하고 퇴퇴하고 찐득 달콤한 거름 내라네.
거름 냄새는 생명의 냄새.
우리 집 밥상, 내 아이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냄새.
꽃봉오리든 뭐든 모두 그다음이라네.

 

“엄마, 저게 뭐지?” 아이 걸음이 빨라졌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감각은 아이가 늘 월등하다. 과연 우리 이웃 사촌 농협 주차장 양쪽 가장자리에 못 보던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아이는 꽃이 잘 보이는 넓적한 바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꽃 초’를 열심히 불어 끌라, 오가는 할배 할매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하랴 바쁘다 바빠. 

 

그나저나 누굴까. 50가구도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꽃을 심은 사람이. 나는 참지 못하고 농협으로 들어갔다. “저기 저 꽃들, 여기서 심으신 건가요?” 마침 꽃을 심은 당사자가 당직이었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아들에 곧 태어날 아들 쌍둥이까지 세 아이의 아빠는 수줍게 웃으며 호기심 많은 이웃집 여자에게 남은 화분을 몇 개 들려주었다.

 

엄마가 화분을 마당으로 날라놓자 아이가 분주해졌다. 일단 화분들이 제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더니, 물을 주어야겠단다. 수도장이 있는 뒷마당으로 가 아이용 물뿌리개에 물을 채웠다. 어린 정원사는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질라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뚱뒤뚱 오동통한 엉덩이, 마른 날의 노란 장화, 아이의 까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봄 햇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엄마 또 가자!” 하는 환희에 찬 표정.
아, 참 아름답구나. 참 감사하구나. 참 행복하구나. 나는 그 순간 벌어지는 것들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자주 들려주던 시가 있었다.

 

딸을 위한 시/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시를 들려주는 대상은 아이였지만 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이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살피는 사람,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마음과 실천력을 가진 사람.

 

나는 아이가 이날들을 오래 기억했으면 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꽃을 심고 가꾸는 사람들처럼, 너도, 나도 죽는 날까지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싶었다. 때론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한 사람이 웃었다면, 그가 산다는 건 따뜻하고 아름다운 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됐다고 만족하기를 바랐다.

 

마침 도시에서 친구가 놀러 온 날이었다.
구례 산수유 마을과 섬진강 매화꽃구경을 하고 온 그는 아이가 정성을 쏟고 있는 우리 집 마당의 키 작은 꽃들을 눈여겨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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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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