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딸 엄마 임신부의 두 얼굴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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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감별이 가능한 임신 4개월 무렵. 사람들이 내 심정을 물어올 때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뭐든 귀하지.” 하며 흔들림 없이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젤로 궁금해 죽겠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딸딸 엄마 임신부에게 갖는 오해에 관해 이야기 할까 한다.


보통은 “아들이세요?”
노골적으로 가고 싶으면 “아들 들었어?”
거두절미 “뭐에요?”


두 여자아이 손을 잡고 집 밖을 나서면 꼭 한 번은 듣는 말들이다. 어찌나 궁금한지 길을 막고 묻고, 내 팔을 붙잡고 묻고. 내 반응이 시원찮으면 옆에 있는 꼬맹이들을 추궁하기도 한다.
긍께, 거시기, 배 속에 든 것이 아들이여 딸이여.
이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대개 여자들은) 옆에 있는 남편에게, 또 다른 여자에게 귀엣말로, 확신에 찬 눈짓으로 이야기한다. 아들 낳으려고 또 (임신) 했구먼.
그렇게 나는 아들을 간절히 원해서 셋째를 임신한 여자로 오해받으며 산다.


셋째 성별 이슈는 남 인생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들만의 가십이 아니었다. 가족, 친한 친구, 직장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둘이나 있으니 아들이면 더 좋겠네.”, “이번엔 아들이어야지!”
각자가 선택한 ‘언어의 온도’가 다를 뿐, 바람은 오직 하나, 이번만은 부디 아들이어라 였다.
마치 온 우주가 내 배에 대고 아들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가장 절절한 건 아들이 없어 한스러웠던 엄마들의 호소다.


보청기를 꼈어도 대화가 어려운 아흔 살의 시외할머니. 큰딸인 시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세월이 아무리 변했어도 아들은 있어야는디, 있어야는디.” 주문을 외우셨단다. 할머니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일곱 중 네 명의 자식이 사는 전라도 광주가 아니라 수도권의 요양병원에 있는 것도 유일한 아들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큰며느리로서의 중압감이 얼마나 컸던지 첫째인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줄곧 아들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엄마는 마침내 나와 일곱 살 차이가 나는 아들을 낳은 데 성공한 케이스. 반면 큰이모는 딸만 둘인데 어느 날 남편이 밖에서 낳은 아들을 불쑥 들이밀 것만 같아 젊은 시절 내내 마음을 졸이며 살았단다. 두 딸이 결혼해서 각각 아들을 낳고 나서야 그 마음의 짐을 벗었다니. 아들이 대체 뭐라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딸자식, 조카 고생하는 게 싫어서 “하나도 괜찮아. 요즘 세상에 둘이면 넘치지.” 할 만큼 누구보다 나 먼저 생각하던 분들이었다. 게다가 우린 아들 없이 살고, 살았던 시절을 공감하는 딸딸 엄마 동지들이 아닌가. 그런데 셋째를 임신했다니 얼마 전 아들 태몽이 네 것이었나 보다, 정서방이 살이 확 빠진 걸 보니 이번엔 아들이네 하면서 아들을 점쳤다.


시아버지가 기뻐할 거라는 이유로 아들을 바라는 군단도 있었다.


나도 왕래할 만큼 시부모님과 친하게 지내는 아주머니가 있다. 임신 초, 반찬을 주신 데서 시댁 다녀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대문 앞에서 복숭아 박스와 카레를 주고받는 찰나, “이번엔 틀림없다. 시아버지가 얼마나 예뻐하실꼬!” 하며 내 손을 꽉 쥐시는데 그 믿음이 어찌나 굳건하던지 정말 이번엔 아들인가보다 하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배 속의 아이가 여자로 밝혀지던 날, 산부인과에 같이 갔던 시어머니는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아직 모른다.”고 둘러댔다고 하셨다.


가장 의외였던 건 친정아버지였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가 8년여 동안 혹독한 가슴앓이를 할 때도 이미 태어난 (딸) 둘이면 충분하다, 아들을 낳기 위한 셋째 없다 할 정도로 이 문제에 있어 상당히 신식이었다.

할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아들, 벌초감 타령을 하며 두 분을 괴롭히던 장면이 내게도 선명한데. 하여간 그 수난조차 묵묵히 넘겼던 분이, 더구나 평소 남의 인생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아버지가 셋째도 딸이라니까 하시던 말씀, “시아버지가 좀 서운하시겠지만 뭐...”


그렇다면 이들이 아들 염원의 구심점으로 지목하는 당사자, 나의 시아버지는 어떨까.


세 아들 아버지인 시아버지는 애 보고 살림하는 집안일, 돈 버는 바깥일에 선이 분명한 타입이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시어머니나 세 아들들에겐 여전히 완고한 면이 있다. 그렇다 보니 손주 문제에 대해서도 오직 아들, 아들 할 것만 같지만 오히려 그 누구보다 성별 문제에 대한 말을 아꼈다.


셋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시아버지가 처음 건넨 인사는 “고맙다, 수고했다.”였다. 성별과 관계없이 어쨌거나 손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아들을 낳을지도 모를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는 데 대한 인사였다. 첫째, 둘째 때도, 시어머니와 남편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통에 결국 내가 셋째도 딸임을 밝히던 밤에도 “그게 어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더냐. 딸도 귀하다.”며 지극히 상식적으로 반응하셨다. 내가 아이 엄마가 된 이래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니가 늘 고생이다.”며 격려하실 정도로 며느리와의 관계 만큼은 이해와 신뢰로 구축해 오시던 분인데...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 추석 때였다. 시아버지 고향에 성묘 갔다가 한 친척 집에 들렀다. 점심이 한참 지난 오후여서 어른들은 막걸리로, 임신부와 아이들은 급히 내온 송편과 부침개로 허겁지겁 속을 채우는데 어디선가 얼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인디!”

시아버지였다. 어머, 아버지. 저희가 그렇게 말 할 입장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이제 막 첫 손녀를 본 큰댁 작은아버지가 불그름한 얼굴로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그러는 형님네는 이번에도 손녀라면서 뭔 소리요? 난 이제 겨우 시작이구먼.’ 하며 정색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면서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더냐, 딸도 귀하다.” 하던 자상하고 배려 많은 시아버지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인디.” 하는 고향 마을 큰형님의 솔직한 아들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버지가 귀엽기도, 짠하기도 했던 순간이었다.


배 속의 아이가 혹시 아들인가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임신 초부터 알 수 없는 피부 트러블에 입술이 멍이 든 것처럼 시퍼렇다가 벗겨지는 등 이전과 비교해 몸이 많이 부대끼고 입덧도 심할 때였다.
성별 감별이 가능한 임신 4개월 무렵. 사람들이 내 심정을 물어올 때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뭐든 귀하지.” 하며 흔들림 없이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젤로 궁금해 죽겠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나는 며칠 간격으로 산부인과를 3번 연속 찾아갔다. 동네 병원 정기검진 한 번, 남편과 서울 갔을 때 피부 트러블 상담 차 한 번. 출산할 병원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친정 동네에서 또 한 번.

의사는 물론 그 누구도 내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치밀한 동선과 스토리를 짰다.


서울에서 만난 젊은 산부인과 의사는 아들인지 딸인지 확신할 수 없다며 초음파 기계를 한참 들여다봤고, 남편은 분명 가랑이 사이에 뭐가 있었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남편에게 “뭐야, 아들이기를 바란 거야? 확실히 결론 날 때까지 자제합시다.” 했지만 솔직히, 나도 설렜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새로 태어날 아이 성별을 얼른 알고 싶은 것,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뒤 한 후배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젊은 나이에 안 되셨네. 그래도 손주를 보고 가셔서 참 좋으셨겠구나.’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 딸 하나를 키우던 후배가 막 둘째를, 아들을 낳은 참이었다.


내가 정할 수 있는 문제라면 셋째도 딸이기를 바랐었다. 딸 셋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뭐랄까, 딸 둘 아들 하나의 엄마보다 세 딸 엄마로서의 내가 더 잘 그려졌달까. 익숙함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아들 염원 사회에 또 한명의 딸을 내보냄으로써 하이킥을 날리고픈 일종의 반항심도 있었다. 딸인 내가 아들이기를 바랐던 할아버지. 그때문에 괴롭고 슬펐던 엄마와, 딸이 뭐가 어떻냐고, 할아버지도 결국 여자가 낳은 게 아니더냐고 바락바락 대들던 어린 나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세상이 환영하든 말든, 곧 태어날 아이와 써 나갈 이야기들이 너무도 궁금하고. 지난 몇년 간 쌓아온 엄마 내공으로 더 크고 깊은 사랑을 쏟아부을 생각에 얼마나 설레는 지 모른다.

이것이 세 딸 엄마로 살게된 솔직한 심정인데, 그런데, 의사로부터 “아들입니다.” 하는 소견을 듣는 상상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이 사회와 개인이 겪고 있는 가부장제에 대한 충돌이자 균열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이 요구하는 남자로, 아들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들의 아들 트라우마를 깨부수는 동시에 만족시키고픈 욕구.

아들 위주의 사회를 떠받들며 살아갈 것을 강요받은 엄마들의 상처를 내 안에, 내 딸들에게 되 물림하고 싶지 않은 의지의 부딪힘.


앞으로 나는 이러한 질문을 세상에, 나 자신에게 더 자주 던지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미완성이다. 딸딸딸 엄마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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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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