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되는 경력이란, 삶이란 없다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2017년 무기계약직 전환선발 실무면접전형에 합격하셨음을 안내해 드립니다.
실무면접전형 합격자는 공개채용 절차의 다음 단계인 최종면접 전형에 응시해야 합니다.
응시하지 않을 경우 자동 불합격 처리됩니다.”


남편과 두 아이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아침. 두 번째로 세탁기를 돌려놓고 다 마른 빨래를 개다가 메일 한 통을 읽었다. 2주 전 치렀던 인·적성검사, 팀장급 및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실무진·영어 면접 결과 통보였다.


지난달로 2년 계약이 종료되어 퇴사한 나는 내가 근무했던 기관의 계약직원을 대상으로 한 ‘무기계약직 전환 선발’ 시험을 보는 중이었다. 도서관 문화행사 및 전시 업무, 채용 인원 1명. 과기특성화대학 행정업무 치고 꽤 특수한 직군이다.
채용 공지를 확인하자마자 ‘내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자요!’ 외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학보사부터 국회의원 정책비서, 1인출판사 대표까지 기획과 홍보 일을 두루두루 섭렵해 왔고 거기다 내 책까지 펴낸 어엿한(?) 작가 아닌가!
농담이 아니다. 진심으로 탐이 났다. 엄마로서 다시 나온 사회, 첫 기관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고, 내 역량과 비전을 ‘문화’란 창구를 통해 펼치고픈 열정도 컸다. 그리고 오래 함께 하고픈 동료들, 때론 눈물마저 그렁거리며 응원해주는 착한 사람들.
내가 도서관 문화행사 및 전시 담당자 무기계약직 시험을 봐야하는 이유는 이렇게 차고 넘쳤다. 이런 간절함을, 내가 바로 적임자임을 실무면접장에서 가감 없이 드러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이들은 모두 여자였다. 정확히 몇 명이 지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서류심사 뒤 1차 전형에 응시한 지원자는 나를 포함해 10명이었다. 그 중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낸 직원이 절반이 넘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중반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그중에는 이번 직군의 경험자, 한마디로 전임자의 전임자도 있었다. 당시는 계약직원이 해당 업무를 수행했다는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던 첫 시험에 실패한 후 두 번째 도전이란다. 그는 대전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이렇게 과거에 계약직으로 근무했다가 다른 기관의 계약직, 혹은 무기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다시 돌아올 찬스를 엿보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처럼 2년 계약이 다 되어가거나, 계약-몇 달 휴직-다시 재계약 하는 식의 고용으로 수년 간 업무를 이어가고 있는 현직 계약 직원들이었다.


추정컨대 유일한 애 엄마 수험자로서, 제일 나이 많은 언니로서 점심시간 몇몇에게 커피 인심을 썼다. 가슴이 벌렁거려 도저히 못 마시겠다는 친구는 입담이 좋았다. “면접만 들어가면 긴장돼서 울상이라는 말을 듣고 나온다”는 말에 다들 꺄르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자켓을 걸칠까 말까”, “이름표가 삐뚤어졌네요”
다들 영어 면접을 두려워했다. 나는 후배 동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어서 “물어보지 않더라도, 일단 준비한 (외운) 문장을 다 쏟아내고 나와라” 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정작 나는 화장품을 두고 와 빌려 썼을 정도로 면접 앞에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중 단 한 명만 합격이라는 것, 나머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업무로 돌아가 또다른 계약직, 무기계약직, 정규직 채용에 끝없이 곤두서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소모적인가. 치열한 현실과는 달리 서로를 경계하기보다 독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였고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착잡했다.


그리고 최종면접 대상 통보를 받은 아침,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사실 퇴사 전부터 오래 고민했던 것을 이제야 글로 쓸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두 단어를 덧붙인다. 셋째 임신. 정말 사건이라고 밖에 말 못하겠는 일.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 세상에나! 나는 지금 셋째를 임신 중이다.


올해 성탄절 즈음 태어날 예정인 아이의 태명은 가와, 이름은 재희라고 지었다.
임신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2017년의 하이라이트로 명명했던, 대망의 부탄여행을 취소한 것. ‘가와(GAWA)’는 ‘재희, 기쁨이 있다’는 뜻을 가진 부탄 말인데, 8월에 만날 예정이었던 부탄인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임신이면 임신이지 꼭 일을 그만둘 필요가 있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이번 무기계약직에 최종 합격한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혜택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결혼식만 올린 뒤 오스트레일리아로 장기 여행을 갈 때도, 서울을 떠나고, 1인 출판사를 차릴 때도. 수많은 선택지 중 굳이 내가 살아온 길이 만들어진 건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놈의 감 때문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화순의 산골마을에서 2년 만에 다시 도시로 나와 월급노동자로 사는 건 실보다 득이 많았다. 회사 5분 거리 아파트에 살며 8시 반에 아이들과 회사로, 직장어린이집으로 출근하고 6시에 네 식구가 우르르 모이는 일상은 ‘저녁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 빠듯해도 일정한 고정수익이 있으니 계획이란 걸 세우는 기쁨이 생겼다. 덤으로 생긴 시간의 수혜자는 어른이었다. 퇴근 후 돌아가며 남편은 공부를 했고 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엄마 노릇 6년. 즐거울 때보다 버거울 때가 더 많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든 때를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혼자 두 아이를 돌보며 풀타임 전업맘으로 살았던 3년의 시간이라고 답한다. 너희들 때문에 내 인생에 이게 뭐냐, 하는 식으로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온전히 나를 위해 쓰던 시간을 누군가와 나눠 써야 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웠다.
집보다 회사가 편했고,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팀원들이랑 나누는 대화와 협업이 더 보람찼다. 업무상 야근이 잦았지만 일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나로선 대개 즐거웠다. 퇴근 후나 주말, 사무실에 앉아 책장을 뒤적일 때가 제일 편안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내식대로 오용하여 휴식을 정당화하고 아이들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


그러니, 참말로 의외였다.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들었던 생각들이 말이다.
아이들에게 내 시간을 더 나누어준다면 육아가, 엄마노릇이 좀 즐겁지 않을까. 어쩌면 즐거운 엄마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닐까. 나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생각은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나는 왜 전업맘일 때나 워킹맘일 때나 아이들과 있는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나 하는 점이었다.


첫 아이 임신 때 회사를 그만둔 이후 내 일은 글쓰기였다. 그 일로 당장 돈은 못 벌어도 좋아하는 일이고 잘하고 싶은 일이었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무조건 붙잡았다. 임신 기간 동안 평균 열 시간 이상 앉아 원고를 썼고, 출산하자마자 청탁원고도 받았다. 두세 시간마다 젖을 물려야 할 때도 틈틈이 공모전 준비를 했다. 울며 엄마를 부르는 소리, 방문을 두드리는 주먹 쥔 작은 손을 외면하며 걸어 잠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 맡기면서까지 무리해서 출판 외주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나도, 아이들도 멍이 들어갔을 텐데 그게 나란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그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자위하며 더 앞만 보고 달릴 것을 요구했다. 돈도 벌어야 했지만 나의 커리어를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 해왔다는 걸 증명해보이고도 싶었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보여주고 싶었을까. 나? 남편? 부모? 자식들? 세상?


나부터 본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
쉬지 않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순전히 나 스스로가 쌓아 올린 강박인가, 사회가 주입시킨 이데올로기인가? 심지어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도, 좋은 작가가 되겠다는 것도 ‘끝없이 발전해야 한다’ 는 욕구가 낳은 왜곡된 목표가 아닐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엄마노릇이 즐겁지 못했던 건 육아에 드는 시간이 나 개인을 ‘정체되고 도태되게’ 한다는 의식 때문은 아니었나? 나는 진정으로 사회적 성공과 인정보다 육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세간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걸어왔지만 실은 다른 방식으로 동조해왔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기왕 임신한 거) 다시 한 번 경력 단절녀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냐. 남들은 모두 앞을 보고 가는데 나만 정지해 있는 듯한 불안감이 수시로 찾아드는 세계다. 점심 식사 후 여유로운 커피 한잔이 그리운 세계고, 팍팍한 살림살이의 세계다. 24시간 퇴근도 휴식도 없는 풀타임 전업맘의 세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다 결국 나락으로 치닫고 마는 세계, 그때마다 채용 공고 사이트를 뒤지며 집을 뛰쳐나갈 궁리를 하는 세계. 내가 여기에 또 뛰어들려 하다니. 대단하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다. 그 무시무시한 세계를 지나면서 내가 배운 것들이 증거다. 붙박이 같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어른도 자랐다. 당장은 줄어든 소득에 생활이 쪼들리겠지만 간소하게 살고자 했을 때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오히려 더 풍족했다. 내가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나, 할 만큼 감정의 밑바닥을 훑으며 나 자신에 몰두할 수 있고, 그것이 결국 글로 써지며 나란 인간을 완성해 가더라.
사회는 나를 금방 잊겠지만 세상과 나의 소통은 더욱 깊어지고 다양해질 것이다. 최선을 다해 엄마 노릇을 해보겠다만, 나는 나 자신이 무척 중요한 사람이므로 완벽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나만의 길을, 방식을 찾아갈 것이다. 사회가 부르는 대로 나는 지금의 나를 경력 단절녀로 정의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단절되는 경력이란, 삶이란 없다. 그렇게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유전자를 길러내어 3년 뒤 마흔을 맞이하는 것이 지금의 꿈이라면 꿈이다.


외로운가? 5년 전 첫 임신과 함께 회사를 떠날 땐 그랬다.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했다. 지금은 힘이 난다. 시를 쓰고, 책을 내고, 어린이 식당을 열고, 입양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심리 상담을 하고, 엄마 정치에 참여하고. 회사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자신과, 세상과 열렬히 싸우며 단단해지고 따뜻해지는 나의 선배와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당신들을 백삼아, 응원삼아 가보는 거다. 장대하고 숭고하되 자유로운 엄마, 아니 나만의 길을.



재희첫초음파.JPG


재희를 만나러 처음 병원에 갔던 날, 엄마와 동생이 궁금한 두 아이들의 뒷모습



* ‘일하는 엄마 글쓰는 엄마’에서 일하는 엄마의 범주를 회사 노동자에서 좀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하여 이어가면 어떨까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코너명을 지었던 것도 일하는 엄마를 워킹맘으로 한정했던 인식의 결과였던가 싶네요.
어쨌거나 이 긴 글의 결론은 셋째를 임신했다는 것. 아, 어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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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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