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해서 좋은 집 아이가자란다어른도자란다



유년기와 십대를 보낸 집들의 공통점은 대체적으로 지저분하다는 거였다. 염소 몰고 다니던 시절, 고향마을 전북 진안의 산골마을 맨 끄트머리 집이 그랬고, 그 산골마을보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진짜 산골마을 분교의 관사도 그랬다. 25년 전부터 부모님이 살고 계신 전주시내의 아파트는, 흠... 대단하다.
  
이른 아침 아빠가 비질을 끝낸 마당과 처마 밑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던 장작, 한겨울의 연탄더미 정도를 제외하면 시골집 살림은 한마디로 필요한 건 다 있는 잡화점이었다.
  
지게, 호미, 쟁기, 콩 타작할 때 쓰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 늘 마른 흙이 묻어 있는 장화와 비옷, 개밥 그릇이 된 찌그러진 놋그릇, 날이 무뎌졌어도 쓸모가 있는 부엌칼, 지푸라기, 깨진 장독, 온갖 씨앗과 줄에 매달린 옥수수와 마늘과 메주, 쌀자루, 말린 나물과 과일들, 부뚜막 불쏘시개용으로 모아둔 이면지, 누렇게 바란 옷, 빵꾸가 난 옷, 그래서 걸레가 된 누렇게 바라고 빵구가 나고 늘어날 대로 늘어난 할아버지 난닝구.
태워 없애지 않는 이상 버려질 일이 없는 물건들은 그대로 살림살이의 지위를 부여받아 집안 구석구석을 알차게 메웠다.
  
재밌는 건 도시로 이사 온 다음이었다. 아파트에서 먹고 자면 사는 분위기도 네모 반듯 아파트스럽게 변할 줄 알았는데, 저절로 사라질 걸로 믿었던 산골마을 잡화점의 기운은 엄마 아빠가 사들이는 도시의 물건들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생애 최초 도시인이 된 40대 중반의 남자와 십 수 년 만에 다시 도시인으로 돌아온 40대 초반의 여자는 에너지가 넘쳤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 그들은 버스를 타거나 차가 있던 다른 부부와 한 조가 되어 주말만 되면 쇼핑에 나섰다.
  
어느 날은 유화가 그려진 커다랗고 무거운 액자 몇 점이 들어왔고, 또 다른 날은 길쭉하고 풍성한 인조 갈대가 퐁당 잠길 만큼 커다랗고 하얀 도자기가 거실 한쪽에 세워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커튼이 달아져 있거나 식탁이 길을 막고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세 남매 중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는데 나와 여동생이 함께 쓰는 방 한쪽 벽에는 근사한 나무 무늬가 새겨진 삼익피아노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도시 가정의 필수품이라고 여겼던 걸까. 평소 빵을 즐겨먹는 집도 아닌데 엄마는 주방에 토스터기를 두었고, 아빠는 시커먼 장식장이 딸린 오디오 세트를 장식장 한 가운데에 들여놓았다.
    
커다란 꽃무늬가 전체적으로 박힌 진한 하늘색 커튼, 보라색 장식장, 에메랄드빛 소파와 밤색 식탁. 소파 위쪽으로 남은 벽면의 절반 이상을 뒤덮었던 무시무시한 대형 거울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고등학교 때, 거실 쪽에서 귀신이 내 방으로 날아오는 꿈을 꾸며 가위에 몇 번 눌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놈의 거울 탓이었다.
  
삼남매 중 유일한 아들의 유치원 졸업사진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정사진과 내 키만 한 괘종시계와 뻐꾸기시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던 벽면들. 액자고, 시계고, 거울이고 죄다 큼직큼직한 것들로 가득한 거실과 방들. 쓰다 보니 웃겨서 눈물이 찔끔 난다.
급기야 서예를 시작한 엄마의 작품들이 여기저기 휘날리고, 흙으로 채워진 비료 포대 자루와 밭작물들이 베란다와 안방 화장실로도 모자라 거실까지 뿌리내렸을 때, 나는 엄마 아빠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해도 깔끔한 집에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성미란 게 있는지. 나는 산골마을에서도, 도저히 정리될 가능성이 없는 부모님 아파트에서도 꼿꼿하게 정갈함을 유지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깔끔을 떨었다. 청소전문가 허지웅 작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정리와 정리로 인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건 어렸을 때부터 나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공부하기 전엔 무조건 책상부터, 방부터 치웠다. 줄 맞추고, 순서대로 배치하는 건 당연하고, 공책에 글씨를 써내려가다가 한 글자라도 틀리면 아예 찢고 처음부터 다시 쓸 정도로 유난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중요한 자료는 파일에 보관했고, 좀 더 오래가겠다 싶은 것들은 리본이나 포장지로 예쁘게 장식된 박스에 따로 담아 옷장 안쪽 모서리에 넣어두었다.
  
정리정돈의 기술이 빛난 건 부모님과 결별하면서부터였다.

좁았어도 자취방은, 신혼집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재작년 화순의 단독주택에서 광주의 아파트로 이사할 때, 나는 내 공간을 내 스타일대로 꾸미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치우고 거두고 늘 정리해야 하는 개똥도, 밭작물들도 없고, 아이들도 4살, 2살쯤 됐으니 "모두 제자리" 정도는 알아서 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마치 40대 중반의 내 부모처럼 나로서는 제법 큰돈을 들여 거실과 서재, 안방을 꾸몄다.

메인 컬러가 중요하다. 월넛과 화이트. 거실 한쪽 벽면을 하얀색 책장으로 채우고 그 아래 연한 회색의 푹신한 카펫을 깔았다. 두 아이의 침대도 흰색이었다. 흰색 회색이 섞인 이불커버를 씌우고, 로망이었던 대형 식탁도 샀다. 진한 비취색과 파란색 커튼으로 심플함에 포인트를 주었다.
  
“언니 집은 신기해. 뭐가 많은 것 같은데 지저분하지가 않아.”
나의 잡화점 동지들도 아름다운 나의 집을 찬양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의 집은 금방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책장과 침대와 옷장과 벽은 두 꼬맹이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서서히 덮였고, 바닥에는 온갖 스티커가 요란스럽게 붙었다.

여긴 엄마 책장, 저긴 너희들 책장, 벽이랑 바닥은 주인 할머니 꺼. 소유관계를 분명히 알려주었건만 그럴 때마다 이마에 주름만 늘지, 벌어지는 상황은 똑같았다.

어린이집에서 자랑스럽게 들고 온 자유분방하고 규격화 되어 있지 않은 ‘작품’들은 지저분함의 주범! 의자를 놓고 올라갈 수 있는 높이까지의 물건들은 죄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고, 심지어 내가 중학교 때부터 정갈하게 정리하고 보관해온 것들마저 아이들은 잘도 찾아냈다. 청소하고 딱 이틀 뒤면 거실은 온갖 책과 장난감, 인형, 시디와 교구, 밖에서 주워온 돌멩이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뒤범벅이었다.


아이들 물건만이 아니었다. 로망이었던, 나의 창작소로 지정한 8인용 식탁은 아이들의 장난감과 빨아야 할 빨래, 개야 할 빨래가 좌판처럼 펼쳐졌다.

나의 야근이 늘어나고, 그래서 남편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지난 몇달 간은... 아,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급기야 집안 어디에서도 고요함을 즐길 공간을 찾지 못한 어느 날 밤, 깔끔한 걸 좋아하는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르륵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쓰던 시간을 다른 사람과, 아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낯선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첫 책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에서 나이 드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여행하면서(혹은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시간’의 놀라운 힘이었다. 화초 키우는 즐거움도, 비우는 만큼 채울 수 있다는 것도, 호주 오기 전까진 체감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여행도 그랬다. 처음엔 무작정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다. 맘만 먹으면 1년 안에 세계일주도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장소 한두 곳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더 좋아졌다. 세계 일주가 목표였던 때보다 세상엔 멋진 곳이 너무 많아서 죽을 때까지 도저히 다 볼 수 없다는 것, 아니 다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지금이 훨씬 더 행복했다.
  
호주 대륙의 거친 아웃백을 지나 녹음으로 가득한 땅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곱씹어 본다.

고작 서른 살이었는데 저런 기록을 했었다니 어쩐지 기특하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해내는 일에 대한 경이로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고 풍부해 지는 것 같다.

도저히 어쩌지 못할 집에서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이었을까.

나만큼 치우는 데 관심이 없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자신에게 화를 내던 내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청소 뒤의 만족감을 즐기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상황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밥을 먹다가 일부러 바닥에 떨어트리는 아이에게 “너 요 녀석!” 하고 웃어넘길 때, 벽에 그림을 그리다 들킨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버려야 할 쓰레기가 문 앞에 잔뜩 쌓여 있어도, 분홍색 물때가 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때.

잘했어, 그러면 되는 거야. 나는 맘속으로 나에게 칭찬을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노력해온 내가 고맙다.


결정적으로 이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나다.

일부러 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큰 일인 줄 믿었던 것들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더라.

나 스스로를 못살게 굴며 스트레스를 받아 왔던 많은 것들,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문이나 직장생활도 글쓰기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자책과 다그침, 삶과 대인 관계에서 끊임 없이 창조되는 크고 작은 굴곡에 좀 더 너그럽고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 참 즐겁고 기쁘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너그러워지자 다른 사람에게도 비로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 다음에 더 잘 하면 된다는 생각.

청소고 정리고 일이고 글쓰기고 야망이고 뭐고 제일 중요한 건 집을 난장판으로 '꾸며가며' 열심히 내달리며 보석같은 웃음을 뿌리고 다니는 내 아이들이란 깨달음.


생각해보면 나는 매일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는 엄마보다 아이들과 같이 어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인형더미에 파묻혀 잠이 드는 엄마이고 싶다. 내 아이들이 나를 그런 엄마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잡화점이라고 표현했던, 나의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들을 떠올리며 여러 번 킥킥거렸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즐겁고 유쾌한 집의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은, 나는 좀 더 지저분하게, 대충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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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부모님의 잡화점 아파트에서 두 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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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 양호한 날, "눈이 안 내려서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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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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